월간참여사회 2011년 09월 2011-09-02   1620

경제, 알면 보인다-은행들의 배신

 

은행들의 배신

 

 

제윤경 (주)에듀머니 대표

 

역사에서 배우는 거품 붕괴 시나리오

 

평범한 농부가 튤립 한 뿌리를 사기 위해 살고 있던 집을 팔고 땅을 팔고, 심지어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면 우리는 그 농부를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히 미친 사람이라고 가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흔히 벌어진 일이다. 투기의 역사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굉장한 사건이다. 투기의 역사는 늘 거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결국은 그 거품이 꺼지고 경제가 붕괴되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튤립 한 뿌리에 인생을 걸었지만 그것은 튤립의 가격이 계속 상승해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었다. 그 환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빚을 내서라도 투기 대열에 끼게 만든다. 마침 은행은 튤립 가격이 오를 것이기 때문에 튤립 매입 자금에 기꺼이 돈을 빌려준다. 이에 대해 찰스 킨들버거(『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저자)는 “은행들은 자금 대여자로서 어떤 때는 무척이나 강한 풍요감에 젖어 제한 없이 자금을 빌려준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다 시장에 돌연한 공포가 나돌기 시작한다. 그 시기는 대개 사람들이 지나치게 돈을 많이 빌려 그 이자를 갚거나 원금을 상환하기 위해 새로운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이다. 이미 튤립을 사는 데에 갖고 있는 자산을 대부분 소진하고 심지어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은 전부 끌어다 튤립을 산 상태이다. 결국 사람들은 더 이상 튤립을 살 돈을 마련할 수가 없게 되고 그로인해 튤립 가격은 사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하락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부터 은행들은 태도를 바꾼다. 찰스 킨들버거의 표현을 다시 빌리면 “어떤 때는 신중함이 극에 달해 차입자들이 바람에 휘둘리도록” 내버려 둔다. 그 바람은 바로 튤립가격의 붕괴이다. 풍요감에 후한 인심을 쓰던 은행들이 태도를 바꾸고 빚을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너도 나도 튤립을 팔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대했던 튤립 가격이 오르지 않자 공포심이 서서히 생기며 극에 달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빚만 남기고 팔지도 못할 꽃만 들고 있게 만든다. 사람들은 거지가 되어서야 튤립이 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에서 튤립이라는 단어를 아파트로 바꾸면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무사유’ 폭력에 파괴되는 서민

 

소득이 2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사람이 1억 2천만 원 빚을 낸다. 이유는 은평 뉴타운에 위치한 시프트에 입주하기 위해서이다. 3,500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면서 불편했고 초라했으나 살만했다. 다만 문제는 친정식구들이 놀러와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마다 한 편으로는 속상하고 또 한 편으로는 어떻게든 ‘나 잘 살고 있다’고 과시해보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른다는 것이다. 우연히 동네에 들어선 장기 전세 주택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청약을 했고 불행히도 당첨이 되었다. 33평 장기전세 아파트는 전세가만 1억 5천만 원이다. 주변 시세에 비하면 싸다는 사실이 황당한 빚을 일으키는 데에 경계심을 거둬간다.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사기 시작하면 빚에 대한 생각은 대담함으로 발전한다. 때마침 은행에서도 지자체와의 협약관계라며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돈을 빌려준다. 이쯤 되면 세상이 너무 좋아졌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소득의 30%가 이자 비용으로 지출되지만 친척들의 부러움과 ‘이제 살만하구나’라는 덕담 속에 빚에 대한 부담은 아깝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 최근 은행의 태도 돌변은 다가오는 태풍과 같다. 최근 은행들이 신규대출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정부의 압박으로 대출 중단 선언을 거뒀다. 대신 기존 대출 회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상 신규 대출을 중단한 것보다 더 무서운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에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에 적극 나섰던 전범에 대한 분석결과를 기고했다. 그녀의 결론은 잔혹한 유대인 학살 전범은 다름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전범은 나치 치하에서 성실한 관료로서 최선을 다했다. 다만 그의 문제는 자신이 수행하는 일이 유대인의 입장에서 어떤 폭력이 될 것인가에 대해 ‘무사유’를 했을 뿐이다. 바로 은행권의 태도 돌변은 이런 종류의 ‘무사유’에 해당된다. 성실하게 자신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집을 사거나 빌리는 사람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돈을 빌려주었을 뿐이다. 채무자의 소득수준이나 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을 때 채무자들이 돈을 ‘공짜’로 여겨 무리하게 빌릴 것이란 사실에 대해 ‘무사유’했다. 그러다 갑자기 너무 많은 신용이 풀려 채권 회수가 어려울 것이란 판단이 서자 신규 대출을 중단하고 기존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도 은행의 재무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성실한 업무를 했을 뿐 대출 회수에 나섰을 경우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기듯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무사유’ 했을 뿐이다. 은행 대출만 믿고 아파트 입주를 기다리던 사람들, 만기 때면 어김없이 만기 연장을 해주었던 은행에 대한 믿음으로 미처 대출 원금을 마련해 놓지 못한 사람들이 은행의 태도 돌변에 발을 동동 구른다. 역사적으로 은행의 이러한 변덕스런 영업 관행이 금융 질서 더 나아가 경제 전반에 쓰나미와 같은 위기를 불러왔다. 이러한 현상을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는 시장이 금융의 내재적 불안정성 즉 과도한 신용팽창과 변덕스런 신용축소 때문에 주기적으로 위기를 반복한다고 지적한다. 이 지적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는 ‘화창한 날 우산 주더니 비오는 날 거둬가더라’는 식의 은행을 향한 쓴 소리가 과하지 않다고 여길 만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어느 날 약속이나 한 듯 은행권 모두가 대출중단을 선언하고 기존 대출을 회수하겠다고 한다. 예고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이뤄지고 있는 조치이니 만큼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은 아닐 듯하다. 급작스런 신용축소가 지금과 같이 가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로 아슬아슬한 때에 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모를 리도 없다. 그렇다면 은행은 위기가 현실화되어도 상관없다는 도덕적, 윤리적 불감증에 단단히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 위기 속에서 서민 중산층의 삶이 파괴될 수 있음에 철저하게 ‘무사유’를 통한 폭력을 행사하며 시프트에 입주하며 가졌던 고마운 마음에 배신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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