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9월 2011-09-02   2221

문강의 문화강좌-폭동은 진행 중

폭동은 진행 중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온 반란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 약물로 인해 지능이 발달한 주인공 침팬지의 이름은 비록 ‘스파르타쿠스’가 아니라 ‘시저’지만, 줄리우스 시저 역시 원로회의 결정에 반발하며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끝내 황제가 되었던 반란자였다. 영화에서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게 된 시저가 내뱉은 첫 마디는 “아니야!”(No!)이다. 이 말은 자신을 ‘더럽고 냄새나는 멍청한 원숭이’로 비하하며 다루던 인간에게 던진 시저의 말이다. 자신이 부모로 여겼던 이에게 버림받은 시저는 감옥 같은 보호소 속에서 일종의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다양한 유인원 무리를 규합하여 탈출한 후, 자신들을 억압하고 무시하던 인간의 질서를 뒤흔든다. 이러한 유인원의 반란이 그들을 실험대상으로 이용해 자신들의 질병을 치유하고자 했던 인간의 시도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동물’의 상태에서 유인원은 자신들이 어떻게 도구화되고 물화되는지를 모르는 채 이용당하지만, 지능의 발전으로 인해 자신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인식’하게 될 때, 그 인식은 결국 현재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폭동과 반란이라는 사건을 낳게 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이러한 폭동과 반란의 사건들은 빈번히 등장한다. 로마의 스파르타쿠스 반란에서부터 중세 유럽의 천년왕국 운동과 농민전쟁, 프랑스 혁명, 미국의 흑인해방운동, 볼셰비키 혁명, 1968년의 봉기 등은 서구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고, 고려의 망이 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 조선의 동학운동과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1960년의 4.19 혁명과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 등 역시 그렇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어쩌면 이 수많은 폭동과 반란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12세기 초 고려시대, (역시 ‘무신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잡은)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개경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다른 노비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는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을 불질러, 우리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비록 만적의 반란은 다른 노비의 밀고로 성공하지 못하고 가담한 수백 명의 노비들이 강에 던져져 몰살 당했지만, 만적의 말 속에 담겨있는 정신은 동서고금의 모든 반란 속에서 공히 드러나는 보편적인 생각이다. “왕후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만적의 말은 정확히 ‘민주주의’의 근본적 원리를 지칭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평등’이다. 그것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이 모두가 정치의 영역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원리다. 가령, 플라톤의 『법』 3권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배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하고 정의로운 요건으로 ‘신의 호의’를 내세웠다. 이는 ‘신의 호의’가 생물학적 태생이나 후천적 능력과 상관없이 전적으로 신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들의 선택’은 ‘제비뽑기/추첨’라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 ‘추첨’이 가진 정치적 급진성은 그것이 언제나 ‘비어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는 데 있다. 이 타이틀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그 어떤 기존의 질서에도 구속받지 않는, ‘아무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장소인 것이다. 랑시에르는 바로 이 ‘아무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장소야말로 민주주의의 장소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정치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만적의 말과도 겹친다.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민주주의’는 그 태생부터 이러한 놀라운 급진성을 가진 이념이다.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이러한 급진성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의 지배자들이 민주주의의 급진성을 ‘많은 머리를 가진 히드라’라는 괴물의 이미지로 덧칠하며 경악했다면, 현재의 지배자들은 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도 그 급진성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옭아매는 데 골몰한다. 폭동과 반란을 통해 출현한 민주주의도 일단 자리를 잡아 관성에 빠지면 자신이 무너뜨렸던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와 비슷한 방식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변하는 민주주의는 자신을 ‘민주주의’라고 외치며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억압하기에 더욱 질이 나쁘다. 2007년 이후의 한국은 이런 퇴행적 경향의 최신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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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초 런던 등지에서 발생한 폭동


착한 위로를 넘어선 정치  

 

하지만 폭동과 반란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 8월 초 런던 등지에서 발생한 폭동은 경제적·정치적으로 소외당해 왔던 청년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무질서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8월 말에는 40년 넘는 기간 동안 철권통치를 해왔던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끝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불만에 쌓인 대중이 움직이고 조직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우리는 다시 목도한 셈이다. 폭동과 반란이라는 사건은 기존의 질서가 보장하지 않았던 것을 요청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현실의 결핍이 무엇인지를 혼란 속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내준다.

  한국의 대학생 역시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굼으로써 등록금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시위는 그들이 처한 엄청난 난국에 비해 너무나 ‘얌전’하고 ‘착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청년들을 ‘위로’하는 책이 100만 부 넘게 팔린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착한 시위나 정신적 위로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무언가를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은 자신의 요구를 끝까지 밀어붙일 때, 곧 폭동 혹은 반란에 이를 때 가능하다. 오직 그 밀어붙이는 행위의 이름이 ‘정치’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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