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10월 2011-10-05   1511

문강의 문화강좌-착한 멘토들

 

착한 멘토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기 위해 이타카 섬을 떠나야했던 오디세우스는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를 그냥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자신의 친구 멘토와 유마이우스에게 텔레마코스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한다. 후에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를 향한 구혼자들이 들끓고 텔레마코스가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자, 여신 아테네는 멘토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텔레마코스 앞에 나타나 그에게 실용적인 조언을 한다. 18세기 프랑스의 한 작가가 ‘멘토’라는 고유명사를 ‘경험 많은 조언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처럼 썼고, 그 이후 ‘멘토’는 어리고 경험 없는 이에게 조언을 해주는 지혜로운 어른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최근 한국은 멘토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 하다. 100만부 이상이 팔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의 저자 김난도, 의사에서 창조적 벤처기업가와 교수로 변신하며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는 안철수, 역시 의사에서 경제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박경철 등은 대표적인 멘토다. ‘소셜테이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진행자 김제동 등도 멘토로 소개되며, 오디션 프로그램의 멘토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전국민 멘토’로 불리는 기타리스트 김태원 등도 이에 속한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부터 이들을 ‘멘토’로 호명했을까? 아마 출판사나 방송국, 언론과 같은 미디어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멘토’로 불리면서 가는 곳마다 청년들의 열광적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열광의 원인은 비교적 명백하다. ‘청년 실업자 100만 명 시대’라는 익숙한 문구 혹은 치솟는 등록금을 대기 위해 공부보다 알바를 해야 하는 대학생들에 대한 기사가 말해주듯, 최근 한국에는 현재의 난관을 빠져나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청년들이 넘쳐나고 있다. 멘토에 대한 청년들의 열광은 이러한 심각한 처지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궁전에 가득 찬 어머니의 구애자들을 보며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청년 텔레마코스들이고, 그럴수록 자신들에게 조언을 해 줄 멘토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시대는 ‘개판’인데 ‘멘토’들은 착하다

오늘날 청년의 ‘멘토’들은 각기 다양한 직업과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대개 ‘착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등을 토닥여주고, 청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콘서트를 시작하며, 시위대를 막는 전경들에게 햄버거를 쏘기도 한다. 이들은 착하기에 대중의 호응을 받고, 그래서 미디어와의 관계도 좋다. <무릎팍 도사>에 나와 강호동의 찬사를 받고, ‘스페셜’ 다큐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인터뷰 프로그램에 나와 특강을 한다. 

  시대는 ‘개판’인데, ‘멘토’들은 다 착하다. 이것이 우리 시대 ‘멘토’ 현상이 가진 핵심적 성격이다.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과 ‘창조’를 말하고, ‘자기혁명’의 기술을 전수하는 이 착한 멘토들은 사실 ‘개판’이 되어버린 시대와 정면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착실하고 성실하게, 쉽게 말하면 ‘착하게’ 이 고통을 견뎌내고 승리하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멘토들이 가진 ‘지혜’의 고갱이다. 이들을 ‘꼰대’로부터 차별화시키는 특징은 수평적 소통능력과 부드러움이며, 이들을 ‘꼴보수’와 분리시키는 특징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고, 이들을 ‘운동권’과 구별 짓는 특징은 투쟁과 갈등이 아닌 화합과 개혁과 대한 신념이다. 이 착한 멘토들은 자신들을 비판하고 소외시키고 투쟁으로 내몰았던 이전의 어른들과는 다른 부류가 된다.

  사회적 모순이 첨예화된 시기에 착한 멘토들이 칭송받고 있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시대적 경향을 본다. ‘탈정치post-politics’가 그것이다. 몫이 없는 자들의 투쟁이라는 근대적 ‘정치’의 이념이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정언명령 앞에서 별 실효성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 갈등과 투쟁과 혁명으로서의 정치는 행정과 관리와 거버넌스를 요청하는 탈정치로 바뀐다. 2007년 이명박의 대통령 등극은 이 탈정치 현상의 도래를 알렸다. 이후 사회적 모순은 더욱 깊어졌고, 투쟁을 통한 정치적 행위들 역시 시도되었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분노하라고 외치면서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투사’보다 이미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자신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멘토’를 청년들이 찾기 시작한 것 역시 이 실패들 이후다.

 

정치의 대체제로서의 멘토 

이 착한 멘토들은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와도 같은 정치의 대체제다.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몸에 안 좋은 카페인은 제거된 커피를 원하는 이들이 찾는 이 멘토들은 자기관리를 통한 사회적 성공을 원하면서도 지나친 갈등과 위험부담만은 피하고 싶은 이들의 ‘탈정치적’ 선택이다. 나아가 이 멘토들은 성공과 실패의 모든 원인을 개인에게로 환원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절실히 요청하는 ‘정치적’ 선택이기도 하다. 시스템 자체의 모순 속으로 파고들기 보다는 적당한 사회적 책임과 적당한 개인적 성공을 조합하라 조언하는 멘토들이야말로 시스템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인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텔레마코스에게 멘토로 변장한 아테네는 가장 ‘개인적’인 조언을 해준다. 텔레마코스는 조언에 따라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하지만 실제로 이 모든 상황을 궁극적으로 바꾸며 텔레마코스를 구원한 사건은 구애자들에게 날린 오디세우스의 가차 없는 화살이었다. 텔레마코스의 개인적 성장은 오디세우스의 냉혹한 화살이 없이는 무용지물인 것이고, 투쟁을 통한 정치적 행동이 없는 착한 위로는 애초의 난관을 만들어낸 사회적 조건을 극복하지 못한다. 우리 시대의 길 잃은 텔레마코스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멘토에 기대 위로받으며,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귀환만을 기다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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