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02월 2012-02-06   1409

문강의 문화강좌-즐거운 노예, 부드러운 지배

즐거운 노예, 부드러운 지배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아무래도 올해의 화두는 ‘소통’인 것 같다. 언제부턴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언론은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사안들을 ‘소통’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해석하고 있으며, 총선 및 대선이 있는 올해를 맞아 뜨고 있는 ‘정치’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그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신년을 맞아 SBS가 특집으로 방송한 <만사소통> 3부작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중 한 편에서는 기업의 사장들이 변장을 한 채로 1일 노동자가 되어 하루 동안 고된 노동을 경험한다(그런데 왜 반대로 노동자가 하루 동안 사장이 되어볼 수는 없는 걸까?). 사장들은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쏟아내는 회사에 대한 비판들을 묵묵히 들으면서 자신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현장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고, 앞으로는 소통에 힘써야겠다고 카메라 앞에서 다짐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서로 만난다. 다른 말을 하는 모든 이들을 ‘빨갱이’로 대하는 심각한 레드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대한민국어버이연합 할아버지와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대한민국자식연합 청년이 만나고, 같은 학교 동기였다가 지금은 각각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진보 지식인’이 되어 있는 원희룡 의원과 조국 교수가 만난다. 이들은 각자 상대 진영(박정희의 생가와 부산 한진중공업 파업 현장)에 찾아가 ‘적’의 말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려 한다. 중간 중간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술집 탁자에 마주 앉아 맥주 한 잔을 서로 나누면서 환하게 웃는다.   

훈훈한 소통의 프레임 

이 프로그램에서 잘 드러나듯, 소통의 프레임은 상대방 입장에 서서 상대방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말한다. 그렇게 서로 말하고 듣다 보면 닫혔던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사장과 노동자, 진보와 보수가 함께 어울려 웃으며 술을 마시는 프로그램의 마지막 장면들은 우리에게 소통이라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한 이미지로 잘 보여준다. 그 소통의 장면이 어찌나 훈훈하던지, 원희룡 의원이 당장 크레인 위에 올라가지 않은 게 이상해 보일 정도다.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가 풍자와 욕설로 이명박 정권의 권위와 부패를 까발려 인기를 얻고, 안철수와 박경철 등 ‘멘토’들의 <청춘콘서트>가 젊은이들의 열광적 반응을 일궈내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선거에서 드러나자, 놀란 정치권은 20대 청년을 비상대책위원으로 앉히고, 20~30대에게 비례대표 의원직을 배정하자는 의견을 내고, 슈스케 방식의 후보 선출을 도입하는 등 너도나도 저공비행을 하면서 ‘소통’에 주력하는 중이다.

 
  이 떠들썩한 소란과 달리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소통’이란 명백한 한계를 가진 하나의 그럴듯한 판타지일 뿐이다. 모든 문제를 대화의 부재 때문으로 여기는 이 프레임은 면밀히 따지고 들어가야 할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린다. 불안과 격무로 시달리는 노동자의 고통은 하루 ‘현장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되고,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서로 만나서 회포를 풀지 않았기에 생기는 문제가 된다. 즉, 자본과 노동 간, 진보와 보수 간의 오래된 싸움의 해결책이 ‘체험’과 ‘회포’로 귀결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통이란 합리적 문제 해결의 과정에 속한 것이 아니라, 대개 인간적 이해와 뭉클한 감동, 따뜻한 위로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같은 정념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는 소통의 프레임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적 취약성과 같은 갈등의 근본 문제들을 가리면서 이를 정념으로 가득 찬 휴머니즘의 문제, 타협의 문제로 치환한다. 노비와 궁녀와 ‘소통’ 하면서 한글을 창제하는 세종대왕을 그린 <뿌리 깊은 나무> 등 최근의 판타지 사극이 보여주듯, 오늘 한국 사회에서 ‘정치’라는 것은 세상을 뒤흔들려는 인민의 급진적 비전이 아니라 따뜻하고 소탈한 지배자와의 ‘소통’의 열망으로만 오로지 나타난다.

  

‘예능’이 된 정치 – 탈정치 시대의 지배 형식

 
소통은 사회를 뒤엎는 급진적인 정치의 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시대의 믿음이고, 자본주의 아닌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사회가 지니는 부적이며, 도를 넘은 근본적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 소통만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이 ‘쉬운’ 분위기 속에서 갈등을 전면화함으로써 더 나은 체제를 만들려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힘을 잃어버릴 때, 그 때 정치는 ‘예능’이 된다. ‘닥치고 정치’, ‘달려라 정봉주’ 등의 만화적인 슬로건, 역사도 이념도 없이 무조건 문호를 개방하는 정당, 자신의 세계관과 정책 구상을 보여주는 대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와 울고 웃는 유력한 정치인들이 그 예다.

 
  이 모든 ‘정치 예능’들은 사소하고 부드러운 것, 그래서 어디서나 잘 팔리는 것들이 모든 딱딱하고 전투적인 것들을 제압해 버린 이 탈정치 시대의 지배적 형식이 되었다. 다수의 삶이 이미 노예적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이 ‘휴먼정치예능소통쇼’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아이러니는 어쩌면 자연스럽다. 이미 사람들은 자신이 자본이 지배하는 체제의 노예라는 생각을 하는 대신, 그 체제가 주는 작은 즐거움들을 누리는 게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꽉 막힌 이명박이 나간 자리를 소통 좋아하고 쿨한 누군가가 채운다고 해서 이 거대한 체제의 장치가 망가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소통의 즐거움이라는 윤활유를 통해 눈이 풀린 노예들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 권위에 의한 지배에서 소통에 의한 지배로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지배가 아닌 것은 아니다. 부드러운 지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극단적 광신자’라는 딱지만 붙이면 된다. 말을 들어주고 걱정해주면서 진짜 바꿔야 할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소통의 정치,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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