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09월 2012-09-05   2020

[통인] 한국 민주주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한국 민주주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바울 슈나이스 목사 – 오재식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대담


정리 박유안 번역가



1975년 도쿄의 크리스천 센터. 유신 독재에 의해 한국에서 쫓겨나 5층의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에서 일하던 오재식, 독일 동아시아선교회(DOAM)의 선교사로 3층에서 일하던 바울 슈나이스. 두 사람은 곧 한국 민주화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고, 도쿄에서 다진 우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오재식 선생은 참여연대 공동대표와 월드비전 회장을 역임하며 반백년을 NGO 활동에 매진했고, 슈나이스 목사도 DOAM 의장을 끝으로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제주 강정마을과 광주 방문을 위해 한국을 찾은 슈나이스 목사와 오재식 전 대표의 대담을 8월 13일 참여연대에서 진행하였다. 1970년대 한국의 암울한 독재와 그에 맞선 민주화운동, 또 독일 통일의 경험과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귀한 자리였다.

 

대담 진행에 앞서, “슈나이스 목사님이니까 ‘미니스터 슈나이스’라고 부를까요?”라고 여쭈니 그냥 ‘미스터 슈나이스’라고 부르란다. “독일에서 일본으로 온 선교사이셨죠?” 라고 묻자 통상적인 ‘선교사’라는 이름표가 자신에겐 너무 협소하다며, 자신에게 그 말은 그저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이란 뜻이란다. 이렇게 멋진 은발의 독일 노신사와의 만남일 줄이야. 최근 병환에서 회복하느라 힘드셨다는 오재식 대표의 목소리에서도 그런 기대감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오랜 친구들의 만남 아닌가.

아시아, 그리고 한국을 만나다


오재식
어떻게 처음에 아시아로 오게 되었나?


슈나이스
내가 태어난 곳인 중국에 가고 싶었으나 거긴 갈 수 없고, 가까운 데를 고른 게 일본이었다. 일본에 처음 간 건 1958년이다. 그때는 전형적인 구식 선교사여서 한국의 사회 문제는커녕 심지어 일본의 사회 문제도 몰랐다. 그 후 독일로 가서 목사로 일하며 동독과 협력했다. 1970년에 DOAM 소속이 되었는데, DOAM은 독일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선교단체이다. 그때 안병무 교수를 소개받아 한국에도 오게 되었다.


오재식
나는 1970년에 일본에 갔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75년, 도쿄에서 당신을 만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이 어떻게 한국에 대한 애정을 싹틔우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슈나이스 몇 가지 이유가 있겠는데, 우선 1973년에 김대중이 도쿄에서 납치됐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 그때 난 이탈리아에서 가족 휴가 중이었다. 가족들은 내 친구들도 연관됐을지 모른다며 다들 직접 한국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1973년, 1974년에 거푸 한국을 방문해, 주로 수유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안병무, 서남동, 강원룡 등 당시 젊은 신자들을 만났다.

1976년 5월에 김대중, 안병무 등 내 친구들이 큰 재판에 연루되었는데, 한 번을 제외하고 재판 전 과정을 참관했다. 심리 내용을 알아듣진 못해도 종일 앉아 있었다. 재판정에서 본 내 친구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나중에 재판 내용을 자료로 받아들고 다시 도쿄로 돌아오는 게 일이었다.


오재식
당신이 여러 방면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고 도왔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당신과 당신 가족들이 한국과 도쿄 사이의 국경을 넘나들며 메신저 역할을 한 일은 유명하다.


슈나이스
당시 KCIA(중앙정보부)는 내가 1975년부터 1978년까지 50회 이상 한국을 방문했다고 했다. 주로 금~월요일에 걸쳐 오로지 서울만 방문하는 주말 일정들이었다.

오재식 당신과 아내, 딸, 아들 모두가 그 메신저 역할을 맡았나?

슈나이스 그렇다. 나는 당시 김대중 씨의 대법원 재판 직후인 1978년 12월 홍콩으로 추방되었는데, 내가 추방되고 나니 더 이상 도울 사람이 없었다. 그때 내 아내가 나섰다. 1984년까지 200여 회에 걸친 서울 방문을 통해 소식들이 오갔다.

메신저의 역할 중에는 특히, 일본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에 ‘TK생’이라는 필명으로 ‘한국으로부터 온 통신’(1973~1988 연재)이라는 칼럼을 쓴 지명관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주 감동적이다. 북한도 구해서 읽었다는 그 유명한 칼럼을 통해 박정희 독재의 실상이 일본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낱낱이 밝혀졌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슈나이스 부부가 나서서 도쿄 주재 독일 국영방송 힌츠 페터 특파원을 광주로 파송하였고, 그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만행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2011년, 슈나이스 부부는 오월 어머니상을 수상하게 된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슈나이스 부부가 나서서 도쿄 주재 독일국영방송 힌츠 페터 특파원을 광주로 파송하였고, 그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만행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2011년, 슈나이스 부부는 5.18재단 인권상과 5월 어머니회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다.


오재식
김관석 목사 재판 때의 볼프강 슈미트 경우를 봐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유독 독일인들이 한국에 큰 관심을 보였다. 국가적 분위기나 정서에 어떤 공통점이라도 있는 건가?


슈나이스
볼프강이나 나의 세대는 어릴 때 나치 경험을 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새로운 독일, 민주 독일을 세워야 했다. 볼프강은 한국 친구로부터 신독일, 민주 독일을 세우기 위한 그의 노력에 대해 듣고 싶다는 요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오재식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지원이 많았다. WCC는 독일 교회의 지원을 받지 않았나. 독일 교회는 한국 민주화를 아주 많이 지원했다. 대학에서 쫓겨난 교수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의 가족 등을 갖가지 방법으로 비밀리에 도왔다. WCC가 공식적으로 뭘 할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는 끊임없이 도청과 미행을 당하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도움의 손길이 도쿄를 경유해서 전달되었다. 심지어 외교 행낭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건 KCIA라도 손을 댈 수 없다는 게 국제 규약이니까.


슈나이스
정말 그랬다.


오재식
독일 교회와 독일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오랫동안 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음에도 공식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유감으로 생각한다.


슈나이스
그런 얘기를 입에 올리기 쉽지 않았다는 걸 잘 안다. 사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의 진전을 지켜본 덕분에, 독일의 진보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60~70년대 독일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굉장히 많았다. 이들은 2~3년 일하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했는데, 돌아갈 데가 없어졌거나 형편이 어려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심각했다. 한국에서의 경험 덕분에 모든 사람의 인권을 소중히 보살펴야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오재식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도,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절대 일방향이 아니다. 도와주는 건 곧 그들로부터 배우는 거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곧 새로운 어젠다를 만드는 일이고, 돕는 일은 늘 쉐어링(Sharing), 즉 함께 공유하는 어떤 것이다. 모든 유대는 늘 주고받는 쌍방향이라는 것, 이것이 70년대에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민주주의, 함께 만드는 우리의 미래

오재식 발전, 경쟁, 경제성장 따위의 가치만 앞세우는 현 세태가 박정희의 70년대 초와 비슷한 것 같지 않은가?


슈나이스
한진중공업 사태, 쌍용차 문제, 용산 참사 등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한국에서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폭력이 되살아난 것을 보고 아주 심난했다. 백성과 대화하지 않는 정부, 권력기구의 폭력이 약자들을 향하는, 그게 바로 독재 아닌가.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정부나 기업이 보다 영리하고 정교하게 그런 일을 행한다는 사실 뿐이다.


오재식
<한겨레>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는 끝이 없는 과정이다’라고 지적하셨더라.


슈나이스
독일 역사에서 첫 민주주의는 1차 대전 이후 1920년대였는데, 파국으로 끝났다. 이후 나치가 등장했고 2차 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는데, 이건 독일인이 싸워서 쟁취한 게 아니라 영국, 미국, 러시아가 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동독이 있으니 종전 후 50년이 지나도 우리는 계속해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 했다. 민주주의 안에서 계속 스스로를 훈련했다고나 할까.

오재식 헌법이나 선거같은 ‘형식’이 아닌,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은 뭘까? 한국의 상황을 되돌아보며 생각해보자. 한국의 민주주의는 왜 이렇게 취약할까?


슈나이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안주했던 적이 없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늘 싸워야 한다. 독일 교육의 예를 들면, 보다 민주적인 교육을 위해 바꾸고 또 바꾸는 중이다. 몇 년 전까지 독일에서 유치원은 아이들을 모아두는 데였지만, 이제는 아이들을 어엿한 남자와 여자로 대우한다.

독일에도 부패 문제가 있다. 그런데 법정에서 부패를 다루는 절차가 아주 민주적이다. 부패로 이득을 본 자와 피해를 본 자의 목소리를 동등하게 듣는다는 뜻이다. 독일에서는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보다 민주적인 방법들에 철저하라’는 원칙이 있다.

한국에서는 재계와 정계의 관계가 너무 긴밀하지 않나 싶다. 독일에서는 이들 사이 거리가 아주 멀다. 정치인이 기업으로 가는 경우에도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른다. 슈뢰더 전 총리는 러시아 정유회사와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지금도 지탄받고 있다.

오재식 민주 투쟁으로 얻어낸 민주 체계를 지탱할 사회적 하부구조가 많이 취약하다. 경험도 취약하고, 윤리적 가이드라인도 갖추지 못했다. ‘경제적 성취가 너희를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게 거의 제1원칙처럼 통용되는 실정이다. 심지어 종교 단체조차 이익추구에 혈안이다.

슈나이스
독일은 통일에 따른 사회 통합에 30년 가까이 매달리고 있지만, 한국은 더 짧은 시간 내에 그런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린 너무 늙은 것 같지 않은가? 젊은 세대가 이런 상황을 보다 잘 깨닫고 고민을 해야 한다. 독일에서는 다행히 많은 젊은이들이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사태를 살피고 있다.

제주도 강정마을을 방문해 많은 젊은 활동가들을 만나고 온 슈나이스 목사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특히 당부하고 싶은 한마디를 여쭈니 젊은이보다 더 진취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운동과 통일 과정에 참여했으면 한다. 정부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만 하기 마련이다. 그걸 바로잡고 바람직한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보다 많은 젊은이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그들의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용기, 새로운 활력이 꼭 필요하다. 이 땅의 미래는 바로 당신들의 미래가 아닌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긴 과정을 거쳐 온 독일과 한국, 그리고 양국의 민간단체가 협력할 방안을 타진하고자 머리를 맞대는 오재식 선생과 슈나이스 목사를 지켜보고 있자니, 이 땅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의 할 일이 참 많음을 새삼 깨닫는다.



‘정의로운 평화’로

오재식
독일에서는 분단 시절에도 동서독 사이에 민간 교류가 있었는데, 남북한은 지난 60년간 거의 아무런 민간 접촉이 없었다. 독일의 통일 이야기를 해보자. 특히 지난 20년간 독일이 겪은 고통과 비용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슈나이스
보통의 독일인들은 아무 고통도 안 느낀다. (웃음) 그냥 체제 대결에서 이겼다고 도취하는 게 고작이다. 동독 사람들은 아직도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정부의 입장이란 “동독은 구원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행복하다. 문제될 게 뭐냐”는 식이었다.

아직도 동서독은 기반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시장은 통합되어서 상품 가격은 같다. 그러니 동독 사람들이 겪는 불이익은 정말 황당한 수준이다. 내가 동독인들에게서 듣고 느낀 건 그런 황당함인데, 서독에서는 내 동료들조차도 이것에 공감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동독의 청년실업 문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서독은 동독까지 지탱할 생산력을 가지고 있어 동독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 기독민주당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당이나 녹색당이 집권해도 이런 사정이 나아질 거라고는 보기 어렵다.

오재식
한국도 통일 후의 변화를 소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슈나이스
평생 걸릴지도 모른다. 한 개인에게 있어 그건 인생 전체에 걸쳐 소화시켜야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오재식
남한이 서독처럼 ‘너희 식량은 우리가 해결하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대응할까봐 걱정이다. 그러면 북한으로선 통일이란 게 사회주의적 자긍심을 버리고 밥 달라고, 경제적 부를 구걸하는 꼴이 된다. 독일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뭐가 있을까?

슈나이스
독일이 가르칠 게 뭐 있겠나. 만날 실수만 저지르는 나라 아닌가. 통일 후 20년이 지났는데도 서독인들은 동독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서독인들은 실제 통일에 기여는커녕 방해만 했던 주제에, 통일이 되고 나니 이제 와서 그게 자기 업적이라고 내세우고 자랑한다.

오재식
동서독 사이에는 어떻게 대화가 시작되고 유지되었는가?

슈나이스
어떻게 보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 지시에 가까웠다. 가령 교회의 경우도 그랬다. 동독 교회가 가진 오랜 경험은 아예 무시되었고 서독 교회가 교구를 접수하는 방식으로 통합이 이뤄졌다. 동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토의해보자, 이런 얘기는 없고, 다들 그냥 우리한테 들어와라, 우리가 너희를 인수하겠다는 식이었다. 동서독 간 대화란 게 대개 그런 식이고, 그런 풍경이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오재식
그래도 서독은 제3국을 통해 동독과 접촉하며 관계를 쌓으려 하지 않았나? 동독 체면도 세워주면서 말이다. 난 그런 걸 아주 성숙한 제스처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은 그런 것도 안 한다.

슈나이스
독일 통일 과정의 일부분만 알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교회 임금의 예를 들어보자. 베를린의 같은 교회에서 같은 책상에 앉아 일하는데 임금은 동독인과 서독인이 다르다. 그런데 물가는 똑같다. 그게 실정이다. DOAM 세미나를 할 때, 동독 측 참가자들의 참가비를 임금 수준에 맞게 낮춰주자고 하면 꼭 서독 사람들이 똑같이 내야 한다고 우긴다. 한국에서도 그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독일에서도 통일은 아직도 온갖 분야에서 참으로 힘겹게 진행 중인 과정이다. 오랫동안 철저하게 준비해도 힘들 수 있다.

오재식
정부는 양측이 다 한계가 있으니 시민단체가 역할을 하는 건 어떤가. 동서독 교회 혹은 NGO의 경우, 그렇게 양측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개입의 여지가 있었는가?

슈나이스
교회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모이는 곳이라, 하나의 입장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는 불가능했다. 다만 2년 전에 하나의 의미심장한 진일보가 있었다. 이제 ‘정의로운 법률Just Law’ 이야기는 그만하고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를 얘기하자는 거였다.

오재식
정의로운 평화라니,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민간 차원 혹은 종교 차원의 ‘정의로운 평화’ 대화 모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떤가. ‘정의로운 평화’란 대체 뭔지, 왜 그것이 통일 과정에서 중요하게 불거졌는지에 대한 경험을 한국과 독일이 나누면 좋은 출발점이 되지 않겠는가?

슈나이스
독일 교회는 매년 남북한 교회를 불러 의견을 나눠왔다. 좋은 시도였다. 남과 북이 공공영역에서 만나 그런 논의를 한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독일이 단순한 초대자를 넘어 적극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재식
경험을 나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참여연대와 같은 NGO를 통해서든 여러 통로를 통해서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오랜 시간 귀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

팔순을 바라보는 두 민주화 인사의 대화는 두 시간을 훌쩍 넘도록 이어졌다. 놀랍게도 두 어른의 생각은 여느 젊은이들보다 훨씬 젊었다. 무엇보다 지금도 하고픈 게 너무나 많은 두 사람이다.

생물학적 노화와는 무관하게 늘 젊은 정신과 기개로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고 벗들과 함께 행동하는 조직을 만드는 사람들. 이들이 민주주의를 일구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우리가 또한 그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슈나이스 목사 말처럼, 통일을 비롯한 ‘이 소중한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말이다.

“도와주는 건 곧 그들로부터 배우는 거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곧 새로운 어젠다를 만드는 일이고,
돕는 일은 늘 쉐어링(Sharing), 즉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모든 유대는 늘 주고받는 쌍방향이라는 것,
이것이 70년대에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한진중공업 사태, 쌍용차 문제, 용산 참사 등,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한국에서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폭력이 되살아난 것을 보고 아주 심난했다.
백성과 대화하지 않는 정부, 권력기구의 폭력이
약자들을 향하는, 그게 바로 독재 아닌가.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정부나 기업이 보다 영리하고
정교하게 그런 일을 행한다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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