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11월 2012-11-05   1177

[놀자] 어느 날 갑자기, 서바이벌 놀이

어느 날 갑자기, 서바이벌 놀이 

이명석 저술업자

 

 

 

상상 놀이

 

‘캔들 나이트’라는 게 있다. 그 밤에 모인 사람들은 전구를 모두 끄고 촛불 속에서 시를 읽고 노래를 부르곤 한다. 화석 에너지에 의존하는 소비적인 삶을 잠시 멈추고, 느린 호흡으로 지구와 환경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나름 흥미로운 행사이긴 한데, 나로서는 좀 따분하다. 전기 없는 밤이라고? 좀 더 본격적인 상상력을 발휘해도 좋지 않을까? 주변에 만만한 친구들, 혹은 꼬마들이라도 있으면 이렇게 운을 띄워 본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남한 전역이 블랙아웃이 되어 전기를 전혀 쓸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처음엔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나온다. 

  “세상이 깜깜해지니 별은 초롱초롱 잘 보이겠네. 옥상에 올라가서 은하수를 구경하지.” 

  “TV를 못 보니 가족들이 대화를 할 수 있어 좋겠지요.” 

  그러면 내가 못된 말들을 던진다. 

  “그럴 여유가 있을까? 당장 냉장고의 얼음이 줄줄 녹아내릴 텐데. 그리고 아직 여기 도착하지 않은 가족들은 어떻게 만나지? 전철도 못 움직이잖아.” 

  “자동차를 타고 오면 되잖아요. 그건 전기 없이 가니까요.” 

  “그래 똑똑하구나. 그런데 말야. 차의 기름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 주유 펌프도 전부 전기로 움직이잖아. 게다가 전산망 마비로 신용카드도 쓸 수 없어.” 

  달콤한 낭만은 찌릿찌릿한 공포로 바뀐다. 하지만 모두들 이 이야기에 쏘옥 빠져든다. 

제목 없음

위기를 놀이로 

 

시절이 하 수상하다. TV 뉴스에는 대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 태풍, 원전 고장, 불산 가스 유출 등 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최악의 혹서와 혹한, 폭우와 폭설이 매년 기상 관측사상 최고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이쯤 되면 마야 문명의 종말 예언이 아니더라도, 최악의 파국이 도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며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신기한 게 있다. 이런 뉴스를 들여다보는 나 자신이 단지 공포에 떨고만 있는 건 아니란 말이다. 이상하게도 눈은 초롱초롱해지고 피가 보글보글 끓는다. 어쩌면 나는 이런 상상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 

 

  최근 몇 년간 나는 이런 ‘서바이벌’ 상황에 대해 큰 관심을 둬왔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대비 훈련이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어떤 희열을 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러한 파국의 상황을 하나의 게임이나 놀이처럼 다룰 수 있다.  

  우선 경제적인 파국을 상상하는 게임을 해보자. 예전에   <만원의 행복>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연예인들이 단 돈 만 원으로 일주일 동안 생활하는 프로젝트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 프로젝트를 스스로 시행한다. 금액은 유동적이다. 어느 순간 게임 시작을 선언한 뒤에 집안에 있는 모든 옷을 뒤진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현금 중에서 천 원짜리 이하만을 모아서 일주일을 살아보는 것이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가급적 걸어 다니고, 문화생활은 몇 년 전에 사두고선 들춰보지 않은 책을 읽는 걸로 대체한다. 역시 식비가 제일 문제인데, 냉장고에 있는 썩기 직전의 식품들과 싱크대 선반 구석에 있는 것까지 깨끗이 청소하는 효과도 있다. 

 

 

 

부족하다면 상급 코스로

 

이렇게 생활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잠자리는 보장되어 있다는 조건이 너무 유리해 보인다. 그럴 때는 노숙 게임을 한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는 외투를 입은 채로 씻지도 않고 화장실 구석에 쓰러져 잠을 청해 본다. (본인의 게으름 덕분에 상습적으로 이런 훈련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밤늦게 바깥에 있다가 대중교통이 끊어졌다면, 근처 24시간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몰래 잠을 청한다. 이때 옆자리에 치우지 않은 컵이 있으면, 면피용으로 내 테이블에 가져오는 것이 좋다. 좀 더 용기가 생기면, 컵을 들고 가 커피 리필이 되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올해 초 건축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노숙인들을 위한 상자 집을 만들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것도 따라 해볼 만하다. 인터넷 쇼핑으로 가정마다 택배 상자가 넘쳐난다. 이걸 이용해 재난이나 파산으로 인해 집이 없어졌을 때 밤을 지새울 상자 집을 만들어 보자. 웅크려 잠을 청할 공간을 정한 뒤에, 차가운 바람을 막을 벽과 지붕을 만든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비닐로 방수 작업도 해본다. 그렇지만 완전히 밀폐되어서는 곤란하다. 바깥의 상황을 살펴볼 구멍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아예 도시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멀리 피난을 가야 하면 어떻게 해요?” 

  좋은 지적이다. 이제 커다란 배낭을 꺼내 놓고, 지진이나 천재지변으로 집을 떠나야 한다고 가정하고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보기로 하자. 랜턴, 라디오, 비상식량, 응급 의료함, 옷가지… 정말 이걸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바로 시험해보자. 그날 내로 반경 100킬로미터 밖의 지역으로 무조건 이동한다. 거기에서 하룻밤 야영하며 밤을 새워보는 거다. 

  서바이벌 놀이는 단순한 즐거움이나 재난을 대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 게임을 통해 밑바닥의 원초적인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그것으로 일상의 헛된 거죽을 벗겨낼 수 있다. 게임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  

 

 

 

 

이명석

저술업자. 만화, 여행, 커피, 지도 등 호기심이 닿는 갖가지 것들을 즐기고 탐구하며, 그 놀이의 과정을 글로 쓰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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