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11월 2012-11-05   4382

[참여연대史] 거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 2000 낙천낙선운동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03  

 

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2000 낙천낙선운동


제목 없음
                               2000년 4월 8일 대학로에서 열린 <가자! 놀자! 찍자! 
                                      바꾸자! – RED 2000 FESTIVAL>에 모인 시민들이 
                                      ‘OUT’이 적힌 레드카드를 흔들고 있다. 

제목 없음

차병직 변호사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변호사)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호에서는 부패 정치인을 몰아내고 맑은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시민의 열망을 보여주었던 2000년 낙천낙선운동을 복기합니다. 

 

 

“이 7인의 인물들은 전사입니다. 총과 칼을 지니지 않은 전사들입니다.” 

 

  2001년 6월 28일, 당시 서울지방법원 4층의 형사법정에서 총선연대 사건의 변호인들은 이렇게 변론을 시작했다. 

 

  “피고인들은 싸우기 위해 이 재판의 법정에 선 것이 아닙니다. 피고인들이 이 법정에 서기 전에 행한 싸움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를 받고자 피고인이란 일시적 수식어를 거부하지 않은 것입니다.”

 

  7월 12일, 서울지방법원 제23형사부는 최열, 지은희, 박원순, 장원에게 벌금 500만 원씩, 정대화, 김기식, 김혜정에게는 벌금 300만 원씩을 선고했다. 죄명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이었다. 7인의 전사는 시민을 대표하여 정치 행동에 나섰고 시민의 뜻에 부응하는 한 선거법 위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직 정치 개혁을 향한 국민의 염원을 받들어 전면에 대신 나선 민주와 참여의 척탄병들이었을 뿐이며, 선거법은 그 행로에 걸린 우연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상존하는 구조적 질병처럼 느껴졌지만, 2000년대를 맞으면서 더 심화됐다. 1997년 연말에 벼락처럼 맞은 국가부도 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 조치의 충격 속에서 국회는 여야 합의로 정치개혁 입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무능한 행정과 정치를 탈피하고자 하는 자성과 시민단체의 질책에서 비롯한 시도였지만, 불안에서 벗어나리라는 국민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정치개혁입법특위는 7차례나 활동 시한을 연장했지만 상정된 44건의 법안 가운데 겨우 두 건만 통과시켰다. 

 

시민이 감히 국회의원 평가를?


1999년 국정감사를 맞아 <국정감사 모니터 시민연대>가 결성됐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40개 시민단체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평가를 목표로 발족했다. 위원회 회의를 감시하여 평점한 다음 베스트와 워스트 의원들의 순위를 매기겠다는 구체적 계획안도 있었다. 하지만 국회 14개 상임위원회 중에서 9개 상임위회가 방청을 불허했고 2개 상임위는 부분적으로만 허용했다. 시민단체가 감히 국회의원을 평가하는 행위를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변호사였던 K의원은 이랬다. “시민단체가 무슨 권력 집단이냐? 아예 완장 차고 교통단속도 하지 그러냐.”

 

  상임위의 문을 걸어 잠근 국회의 태도는 실망감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반민주적 의식을 드러낸 의원은 이듬해 선거에서 낙선시켜야 한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해 10월 하순 지리산에서 열린 국감시민연대 평가수련회에서 공정선거를 위한 감시 행위가 주가 된 시민단체의 종전 활동 방식으로는 유권자 심판운동을 전개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국정감사 모니터를 위해 모였던 단체의 실무자들 중심으로 낙선운동 기획팀을 구성했다. 국감시민연대의 공동사무국장을 맡았던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 이태호는 <부패무능정치 심판 시민행동 제안>이란 제안서를 기초했다. 

 

  그런데 11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제87조가 합헌이라는 결정을 했다. 노동조합을 제외한 단체의 선거운동을 못하도록 규정한 조항이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경실련이 제기한 헌법소송의 결론은 처음부터 큰 장해가 되었다. 12월 17일 걸스카우트 회관에서 열린 낙선운동 제안을 위한 토론회에는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선거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불복종운동도 불사하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여성단체연합이 주축이 돼 2000년 총선시민연대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경실련은 예상대로 위법한 행동을 할 수 없다며 불참했다. 참여연대의 간사 휴게실로 사용하던 1.5평 정도의 좁은 공간을 준비위원회 사무실로 삼았다. 준비위원회에서 처음 한 일은 각 단체에 제안서 보내기였다. 조심스럽게 선정하여 작업하다 보니 정식 발족 일주일 전까지 제안서를 발송한 곳이 50개 단체 미만이었고, 참가단체는 30개 남짓이었다. 

 

  총선시민운동의 기획은 치밀했다. 정당성을 확보하고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전 여론조사도 했다.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낙선운동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79.8%, 불법이라도 강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71.8%였다. 

 

  구속도 불사한다는 사전 결의도 있었던 만큼, 소수정예 군단을 꾸리려는 듯한 준비 과정이 불만스럽게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2000년 1월 초, 박원순은 실무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정면 승부다. 500개 이상 단체가 참가하지 않으면 아예 발족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전략 수정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수도권에 한정하려 했던 낙선운동의 범위를 전국으로 확장하는 계획은 불안하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300통이 넘는 제안서를 발송했다. 그 결과는 마치 낙천낙선운동의 결말을 예고하듯 놀라웠다. 매일 100개 단체씩 가입 신청을 했는데, 1월 12일 출범 선언은 모두 412개 단체의 이름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개혁 시민선언>이란 제목의 발족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했다. “새 천년은 도래했으나 정치의 새 천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제목 없음              1999년 국정감사를 맞아 <국정감사 모니터 시민연대>가 결성됐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40개 시민단체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 평가를 목표로 구성했다. 위원회 회의를 감시
             하여 평점한 다음 베스트와 워스트 의원들의 순위를 매기겠다는 구체적 계획안도 있었다. 

무자격자는 공천해선 안된다


낙선운동의 전단계는 낙천운동이었다. 출마 예상자들 중에서 무자격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을 공천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를 각 정당에 하면서, 국민의 호응을 얻기 위한 캠페인을 펼쳤다. 선정 기준은 7가지로 부패행위, 선거법 위반, 반인권 전력, 불성실한 의정 활동 등이었다. 방대한 기초 조사를 하였으나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구체적 결정 작업에 들어가서는 애매한 상황도 발생했다. 정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촉발된 탓인지 애당초 불참을 선언했던 경실련이 먼저 기습적으로 낙천자 명단을 발표하였으나 그 독단적 행위에 대한 큰 반향은 없었다. 

 

  본격 활동을 시작 할 즈음 총선연대의 이름 아래 모인 단체는 물경 1,054개였다. 총선연대는 먼저 현역 의원을 중심으로 심사하여 1월 24일 67명, 그리고 쉴 틈도 없이 출마가 예상되는 원외 인사를 대상으로 하여 2월 2일에 42명의 2차 명단을 발표했다. 그때 1차 명단에 6명을 추가하여, 낙천 대상자는 모두 105명이었고, 최종 102명으로 수정됐다.

 

  명단이 발표되기 전부터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명단이 발표되자 아예 공천 신청을 포기해 버린 정치인도 생겼다. 민주당의 김상현 의원은 한보철강으로부터 받은 돈의 대가성 때문에 1심에서 유죄였으나, 항소심에서 뇌물이 아니라 정치자금이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고심 끝에 총선연대는 낙천 대상자로 결정했다. 필사적으로 항변하던 김 의원은 최종 결정 이후 승복하였고 오히려 총선운동에 지지의 뜻까지 표시하였다. 지금 대통령인 이명박도 유력한 대상자였으나, 이미 98년에 의원직을 사퇴했고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어서 심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출마한 민주당 부총재 이종찬은 낙천·낙선 대상에 모두 포함되었는데, 결국 낙선하자 총선연대 주요 대표자를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하지만 즉시 박원순을 비롯한 몇 사람을 불러 점심 식사를 하면서 집행 포기 의사의 표시와 함께 스스로 화해를 청했다. 

 

  낙천자 명단 발표 이후 운동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2주 동안 2억 원 가까운 후원금이 들어오고, 수백 명의 학생과 시민이 자원활동을 신청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과 정치를 바꾸자는 뜻에서 홍보용 노래로 채택한 이정현의 ‘바꿔 바꿔’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총선연대 칵테일’을 만들어 팔아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레스토랑도 생겼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녹차 수백 통이 배달되고, 서울 변두리의 분식집 아저씨는 찐빵을 쪄다 날랐다. 낙천·낙선 운동을 다룬 MBC의 <100분 토론>은 재방송되기에 이르렀고, 얼굴이 알려진 총선연대 임원들 중에 택시를 공짜로 탔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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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감사 모니터 시민연대>의 활동에 대해 국회 14개 상임위원회 중에서 9개 상임위
           회가 방청을 불허했고 2개 상임위는 부분적으로만 허용했다. 시민단체가 감히 국회의원
           을 평가하는 행위를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낙선운동은 치밀하게, 단호하게, 평화롭게


낙천운동은 낙선운동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낙천운동과 달리 낙선운동은 해당 지역의 사정과 역량을 고려해야 했다. 낙천 대상자와 그에 준하는 부적격자를 모두 낙선 대상자로 할 것인가, 아니면 범위를 축소할 것인가가 논의되었다. 낙천운동의 결과 낙천률이 47%였으므로, 낙선운동의 효과를 높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격론 끝에 기준대로 낙천 대상자를 모두 선정하되, 집중 낙선 대상 지역을 설정하여 상징적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낙선 대상자 결정 과정은 험난했다. 지역과 중앙의 의견 차이도 많았다. 세 차례에 걸친 대표단과 상임집행위원장단의 연석회의 다음에 예비 명단을 확정하는 데에도 다섯 시간이 소요됐다. 그 다음에는 또 집중 대상 지역 선정을 하기 위한 토론이 네 시간 동안 벌어졌다. 정책자문단과 변호사자문단 그리고 유권자100인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86명의 최종명단과 22개 집중 지역을 확정했다. 낙선 대상자 명단 발표를 하기로 한 4월 3일의 바로 전날 밤에는 보안 유지를 위해 참석자 전원의 핸드폰을 수거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회의 장소였던 의정부 한마음수련원 건물에 송수신 방지 시스템까지 설치했다. 

 

  다시 정동 이벤트홀, 지은희 대표의 낙선 대상 명단 발표가 끝나자 이제 남은 것은 전력을 다한 행동뿐이었다. 총선연대 집행부 주요 임원들은 낙선 대상자를 한 명씩 맡아 맨투맨 낙선운동을 펼쳤다. 모든 활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은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선거법을 기준으로 정한 낙선운동 매뉴얼은 원칙으로 하되, 그것이 방해가 되면 물러서는 게 아니라 넘어서기로 했다. 불복종을 선언하고 명단이 수록된 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각 지역구에서는 가끔 충돌이 일어났다. 낙선운동가들이 해당 지역구 후보 지지자들에게 떠밀리는가 하면, 밀가루 세례를 받기도 했다. 잡음이 생기면 고스란히 총선연대의 책임으로 돌아올 것이 뻔했다. 박원순이 기민하게 평화 수칙을 선포했다. “때리면 맞는다. 물품을 빼앗으면 고스란히 빼앗긴다. 폭력이나 욕설 앞에서는 평화의 마스크를 쓰고 그 자리에 앉는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총결집한 운동이었다. 그 중심에 참여연대가 있었다. 참여연대의 거의 모든 역량은 총선운동에 투입됐으며, 내부 업무는 상임집행위원회에서 조정하고 유지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었다. 전체 낙선율68.6%, 86명의 낙선 대상자 중 59명이 낙선했다. 오히려 집중 대상 지역 낙선률 68.2%를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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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률 68.6%, 놀라운 결과를 따라온 논쟁과 주목 

 

낙천·낙선운동은 그 결과가 놀라웠던 만큼,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적합한 인물을 추천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 인물에 대한 비난만 일삼는 네거티브 선거전이다, 시민단체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가 등의 비난은 처음부터 있었다. 당시 여당이었던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을 위한 제2중대, 소위 홍위병 논란도 자민련이 거론하면서 시작됐다. 경이로운 낙선률을 기록하며 총선운동이 성공리에 끝났는데 과연 그 결과 한국의 정치가 개혁이 되었느냐는 엉뚱한 책임론도 나왔다. 

 

  모든 악의적 공격과 비판에 대한 대답은 마련돼 있다. 하지만 논쟁을 지면에서 다시 반복하는 것보다는, 2000년 총선연대 이후의 국내외 반응을 살펴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낙천·낙선운동을 계기로 세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NGO가 중앙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이한 현상으로 서양과 일본의 단체나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반면 한국 시민단체에 부과된 새 과제는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당시 주역의 다수가 정치 현실의 그 무대 위에 서 있기도 하다. 

 

  정치 쇄신을 목표로 한 총선연대 운동은 처음부터 보수 세력이 불법운동으로 왜곡하여 매도했고, 그 과정에서 부분적 선거법 위반도 불사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불복종 행위가 부각되었다. 7인의 전사들에 대한 항소심 재판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모두 벌금 50만 원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이 확정했다. 선거법 제87조 위반이 아니라 선거운동 방법의 위반으로 받은 유죄의 전과 기록은 정치 개혁을 열망한 시민들을 대신하여 받은 총선연대의 훈장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결코 무죄를 구걸하거나 선처를 호소하지 않습니다.” 시민불복종, 그 현실의 신화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연재 순서

#01 봄은 주총의 계절이었던 시절 – 1997 소액주주운동

#02 법원 하나를 날려버린 고발장 – 1998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03 거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 2000 낙천낙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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