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2월 2013-02-14   2694

[20년20장면] 어느 문패에 대한 20년의 명상 – 1994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Scene #6

어느 문패에 대한 20년의 명상

1994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전문 https://www.peoplepower21.org/about/sub.php?sub=m11

 

201302_참여사회2월호

1994년 9월 10일 변호사회관 서초별관 5층 강당에서 열린 참여연대 창립총회. 창립 당시 명칭은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였다.

 

시작이 중요한가, 시작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가?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는 속담도 있다. 시작도 중요하고 시작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짐짓 심오한 철학적 사변을 늘어놓기 위해서도 아니고, 유희적 언어논리 게임을 하자는 제안도 아니다. 시작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껴보기 위한 기억의 준비운동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행동을 어떻게 개시할 것인가. 20년 전 어느날, 공통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과거의 경험으로 만든 꿈의 알을 미래를 향해 던지기로 하였다. 그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 참여연대다. 그때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시작만 하면, 잘할 수 있어.’

 

“지금 우리는 시대적 전환기에 서 있습니다.”

 

1994년 9월에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으나, 양김의 단일화 실패로 선거에서는 노태우가 승리함으로써 군부정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개정 헌법은 민주화로 가는 문에 불과하였다. 그 문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5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그나마 김영삼이 집권 여당과 합당함으로써 가능했다. 따라서 1993년에 출범한 문민정부를 두고 대개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 정도는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원하는 사람들이 다시 채워 넣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전환기에는 고민이 있게 마련이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10년을 거치면서 사회운동을 꿈꾸는 자들에게 고민이 쌓였다. 87년의 개정 헌법으로 합법적 공간은 제도적으로 확장되었으나, 민주 진영은 그 변화된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대두됐다. 군부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몸을 던져 싸우던 일부 민주투사들은 바뀐 환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 공간에서 시민운동의 움직임은 꽤 활발하였다. 고민을 미리 떨쳐버리고 할 일을 찾은 사람들은 NGO를 결성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민주주의의 알맹이를 채우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전통의 틀에 갇힌 흥사단이나 YMCA 같은 조직 외에 목적과 분야를 선명히 정한 본격 NGO들이 등장하였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여성민우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전민련과 전국연합,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에 나타났다. 그 중에서 가장 폭넓은 지지와 관심을 받으며 시민운동이란 말을 사람들의 입과 귀에 익숙하게 만든 단체는 경실련이었다.

 

그러나 고민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한 사람들에게 경실련은 한계가 있어 보였다. 중산층을 강조하고 기존 운동 방식과의 단절을 강조하던 경실련 운동은 합법성만 추구하는 정의를 외치는 낙천적이고 보수적인 행동으로만 보였다. 무엇보다 종전의 민중운동과는 거리감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시민들과 동떨어진 운동을 도모할 수도 없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련의 해체와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은 전통적 정치투쟁노선이 대중성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이 몇 사람들의 시대적 고민이었고, 따라서 그때 그 사람들이 선 자리가 그들에겐 시대적 전환기였다.

 

 

201302_참여사회2월호

1994년 7월 25일 용산 참여연대 사무실 입주식 겸 <참여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준비위원회 상견례.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국가권력이 발동되는 과정을
엄정히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80년대 학번으로 학생운동 대열의 앞줄에 섰던 김기식은 책을 읽다가 몇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정치학과 사회학 관련 서적에서 발견한 참여민주주의라는 생소한 용어가 뇌리에 박혔다. 일본의 어떤 책에서는 연대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당장 운동권 친구들을 불러 모아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 연합(이하 참사연)>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바로 참사연이라 부르던 그 단체다. 그는 시민운동에 관한 24장짜리 글을 써서 들고 김근태를 찾아갔다. 하지만 김근태는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를 결성하여 현실 정치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선배의 소개로 막 박사학위를 끝낸 김동춘을 방문했고, 김동춘은 그를 <역사문제연구소>로 보냈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조희연과 박원순이 부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한국사회과학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공부하던 조희연 역시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시민운동을 구상하고 있었으나 진보적인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좌파 경실련이란 의미로 스스로 좌실련이라 칭하며 몇몇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아예 ‘진보적 시민운동론’이란 자신이 쓴 글의 별쇄본을 200부 찍어 들고 다녔다. 변론으로 번 돈을 역사 문제 연구에 쏟고 있던 박원순은 영국과 미국을 다녀와서 사회 변혁을 위한 새로운 활동의 방식을 도모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레바논 출신의 미국 변호사 랠프 네이더의 공익 변론을 통한 시민운동에 큰 감명을 받은 듯했다. 조희연과 박원순은 김대환과 유팔무를 추천했다.
김기식이 들고 간 글을 읽고 김대환과 유팔무는 참여민주주의라는 표현에 반색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소통이 시작됐다. 박원순은 변호사 홍성우에게 전화를 했고, 조희연은 김근태에게 끌려가기 직전의 김중배의 팔을 낚아 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오재식을 찾아갔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전민련 인권위원장으로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중심에서 겪은 서준식은 본격 인권운동에 매진하기로 결심하고 10여 명을 모아 <인권운동사랑방(이하 사랑방)>을 조직했다. 서준식은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인권운동이 목표였던 반면, 이대훈과 이성훈은 국제연대 활동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바로 그때 박원순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새로운 시민운동 단체 결성에 결합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두고 <사랑방>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서준식이 보기에 박원순의 구상은 좌실련이 경실련을 보는 시각과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적 진출을 열망하던 다른 활동가들은 새 단체가 국제연대 활동에 보다 나은 환경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표결에 부쳤는데, 9대 1로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의 지향점을 ‘참여’와 ‘인권’을 두 개의 축으로 하는
희망의 공동체 건설로 설정했습니다.”

 

94년 1월 어느날, 연남동 경성고등학교 앞의 참사연 사무실에서 최초의 모임이 있었다. 활동가, 학자, 법률가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었지만, 활동가들은 <참사연>과 <사랑방>을 중심으로 다시 나뉘었다. 봄을 넘기면서 새 운동단체의 모습은 구체화되었고,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와 불암산 유스호스텔 등으로 옮겨 다니며 논의를 거듭했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의 3분의 2를 단체의 명칭에 대한 논쟁을 하는 데 소진했다.

 

‘연대’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었다. 첫번째 쟁점은 김기식이 가져온 ‘참여’였다. 원칙주의자 서준식에게는 생소한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참여민주주의가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확립된 개념인가?” 그의 물음에 유팔무가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굳이 ‘참여’라는 말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푸른연대’라고 하는 게 낫겠다.” 대의민주주의의 기존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불신을 씻어줄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참여민주주의였다. 대안민주주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시민민주주의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당시만 해도 아주 낯선 용어이자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널리 사용된다. 보수적인 헌법학자조차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며, 참여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두번째 불씨는 ‘인권’이었다. 서준식은 출범할 새 단체의 명칭에 반드시 ‘인권’이란 말을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인권’을 넣지 못하면 그만두겠다는 태세였다. ‘시민’에 대해서도 찬반이 대립했다. 그때는 시민운동이라면 경실련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시민’이란 용어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죽어도 반대론’과 대중 속에 파고들려면 그래도 겉으로나마 그 정도 표현은 해야 한다는 ‘위장 취업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숱한 난상 토론 끝에 ‘참여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로 모양이 갖추어졌다. 그런데 ‘참여’는 활동의 방식 또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인권’은 목적적 개념인데 어떻게 동렬로 배치하느냐는 이삼렬의 이의 제기가 있었다. 확정된 것이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였다.
이름 하나로 모두 일체가 될 수 있을까? 저마다의 생각 속에는 개성에 따른 걱정과 조바심이 뒤엉켰지만, 어느새 출발선에 나란히 서고 말았다. 그 순간 각자의 머릿속에 매달려 있던 의문부호들은 놀랍게도 집단 속에 녹아 사라졌다.

 

 

201302_참여사회2월호

1994년 7월 25일 용산 참여연대 사무실 입주식 겸 상견례에서 고사를 지내는 박원순 변호사.

 

“모두가 힘을 합쳐 새로운 시대,
참여와 인권의 시대를 만들어 갑시다.”

 

1994년 7월 25일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용산 역전의 낡은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창립대회에 걸맞게 선언문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항상 부지런한 조희연이 평소 들고 다니던 논문을 요약하다시피 한 엄청나게 긴 글을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단체 명칭이 너무 길어 께름칙했는데,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논문 요약본을 선언문으로 채택할 수는 없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오며가며 두세 줄씩 쓰고 한두 줄씩 지웠다. 김중배의 초안이 바탕이 됐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의 글솜씨라면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이 유력하다. 박원순도 가담했을 테고, 이대훈이나 김기식도 끼어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이설이 없다. 하지만 지금도 창립선언문을 누가 어떻게 작성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1994년 9월 10일 서초동 변호사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오재식이 선언문을 낭독했다는 것이다.

 

이름이 너무 길다 보니 기억하기가 힘들었다. 초기 임원 중에는 완전히 외우는 데 한달이 걸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언론에서는 참여연대 활동을 거의 다루어 주지 않았지만, 어쩌다 눈에 띄지도 않는 1단 기사가 났다 하더라도 명칭을 제대로 쓰는 신문사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나 명칭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출범한 지 두 달쯤 지났을까, 그때만 해도 우호적이었던 동아일보 사회면에 참여연대가 크게 소개되었다. 그런데 기사 내용 중에 “기존의 민중운동과 다른 새로운 시민운동”이란 표현이 있었다. 개량적 시민운동과는 엄격히 다른 종전의 민중운동을 계승하는 진보적 운동을 하기로 한 창립 선언의 취지와 다르지 않느냐, 어떻게 홍보를 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며 서준식이 크게 반발했다. 결국 그런 일들로 인한 이견이 쌓여 그해 연말 사랑방은 독립했다. 그리고 다음해 9월에 열린 제1회 정기총회에서 ‘인권’을 빼고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로 명칭을 바꿨다. 많이 짧아지긴 했지만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4년을 더 외우다가 1999년 제5차 정기총회 때 약칭이던 <참여연대>를 정식 이름으로 확정했다. 그것으로 문패의 길이가 75%나 줄어들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름을 외우거나 명칭의 변천사를 회상하는 데 시간을 소모할 이유는 없다. 이제 그 뜨거웠던 시작은 볼 수 없다. 그것은 꽤 먼 과거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미래도 안개 속에 갇혀 있는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같은 거리를 두고 우리와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날의 경험은 열정의 지문처럼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창립선언문의 울림이 모종의 기억을 도와준다. 그때의 긴장감까지 남아 있느냐는 호령이 함께 들려올 때도 있지만, 새로운 세대의 감각과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항변도 만만치 않다. 그것이 서로 어울려 함성이 된다. 같은 이름 아래 새로운 행동이 펼쳐질 조짐이 보인다, 20년을 뒤로하는 창을 닫고 마당을 내다보니.

 

 

 

 

연재 순서

#01 봄은 주총의 계절이었던 시절 – 1997 소액주주운동

#02 법원 하나를 날려버린 고발장 – 1998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03 거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 2000 낙천낙선운동 

#04 호루라기를 나눠 드립니다 – 1994~공익제보자 지원 운동

#05 비가 싫어질 수도 있겠구나 – 2004, 2010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UP 캠페인

#06 어느 문패에 대한 20년의 명상 – 1994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글 차병직 변호사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변호사)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참여연대의 활동 방향과 가치를 담은 1994년 창립선언문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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