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없는 세상, 멀고도 가까운

수영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팀장
이 글은 2021년 12월 더슬래시 저널 핵(核): 재앙의 씨앗 에 기고한 글입니다

13,080개. 전 세계에 현재 존재하는 핵 탄두의 숫자다.(SIPRI Yearbook, 2021) 냉전 이후 그 숫자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인류는 여전히 지구를 수천 번 멸망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를 끌어안고 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향후 20년 동안 약 1조 달러를 새로운 핵무기 개발에 쓸 예정(IPB Statement, 2020)이라고 한다. ‘핵무기는 안 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는데,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왜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어야 할까? ‘한반도 비핵화’는 과연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데 어떻게 종전을 하나요?”

한반도의 종전과 평화를 이야기하다보면 거리에서, 댓글창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데 어떻게 북한과 종전을, 대화를, 화해를 할 수 있나요? 찰나의 시간,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상대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어지는 대화가 ‘핵무기를 개발한 비정상 국가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는 벽을 넘기는 매번 쉽지 않다.

북한은 왜 국제 제재를 견디면서까지 핵무기를 개발했고, 포기하지 못하고 있을까?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갈등에 대해 조금 더 솔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두 국가의 군사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해볼 수 있는 지표 중 하나가 군사비다. 50.1조 원, 2020년 한국의 국방예산이다. 34.6조 원, 한국은행이 추정한 2020년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이다. 북한의 모든 경제활동주체들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 금액의 총합보다 더 많은 금액을 남한은 국방비로만 쓰고 있다. 적게는 13배(Global Fire Power, 2021)에서 많게는 27배(SIPRI Military Expenditure Database, 2018). 남한과 북한의 군사비 지출의 차이다. 남한은 오랫동안 북한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으로 군사비를 지출해왔다. 주한미군의 군사비는 따지지 않은 수치다. 군사비뿐만 아니라 무기 체계의 질이나 경제력도 비교하기가 어려운 수준이다. 군사비와 군사력의 현격한 차이 아래서 북한은 핵·미사일과 같은 ‘보다 저렴하고 공격 효과는 극대화된’ 비대칭 전력을 개발해왔다.

재래식 전력이든 비대칭 전력이든, 남한과 미국, 그리고 북한이 서로를 이기기 위한 군사력을 축적해온 이유는 결국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유례 없이 긴 정전체제 아래서 70년 넘게 쌓여 온 서로에 대한 불신은 언제라도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대비 태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 관계를 해결하지 않은 채 ‘비정상국가’ 북한의 나쁜 행동을 제재하거나 군사적으로 압박해서 바꾸려는 많은 시도들은 지난 시간 동안 실패해왔다. 대화와 협상이 멈춘 동안 북한의 핵 능력은 더욱 커져왔기 때문이다.

한반도 핵 갈등이라는 난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북한이 더이상 핵이나 미사일을 개발할 필요가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서로 신뢰하지 못하면 지난할 수밖에 없는 비핵화 과정도 결국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들 중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같은 핵무기 보유국들이 있다. 북한과도 관계를 개선하고 더 적극적으로 대화하면서 비핵화 과정을 합의해갈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을 ‘어쩔 수 없는 일’로 퉁치고 넘어가자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국가도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제거해나갈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2018년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상호 신뢰 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합의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한반도 핵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과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이 합의는 앞으로의 평화 프로세스에서도 계속 유지되어야 할 원칙이다.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구상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있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동북아시아 평화를 만들기 위한 해법으로 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협정과 함께 제안되어왔던 것 중 하나가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구상이다. 전 세계가 동시에 핵무기를 금지하기 어렵다면 특정한 지역에서라도 핵무기를 금지할 수는 없을까? 비핵지대 구상은 이러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특정한 지역의 국가들이 핵무기의 생산, 보유, 배치, 실험 등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하면 핵 보유국들이 그 국가들에게 안전 보장을 약속하고 UN 총회에서 인정하는 방식이다. 이미 라틴 아메리카,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비핵지대 조약이 체결되어 있고, 다만 핵 보유국들이 아직 안전 보장을 완벽히 약속하지 않은 경우들이 있다.

동북아시아 비핵지대는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핵을 폐기하는 것, 한국과 일본도 미국의 핵 억지력에 의존하는 핵우산 정책을 폐기하는 것, 핵 보유국인 미국, 러시아, 중국이 남한, 북한, 일본에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확약하는 것을 동시에 합의하는 구상이다. 여러 시민사회단체들과 연구소들은 한반도와 동북아를 둘러싼 모든 핵 위협을 제거하는 포괄적인 해법으로 이미 전 세계적으로 선례가 있는 비핵지대를 동북아시아에서도 실현하자고 제안해왔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는 북한의 핵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사는 이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핵무기가 모두 사라진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무기도 금지하기 전에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핵무기금지조약

핵비확산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NPT)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국제적인 핵무기 통제 체제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되어온 것은 이 체제가 일종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점이다. 핵비확산조약은 1967년 1월 이전에 핵무기나 핵폭발장치를 제조하고 폭발한 국가(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은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국가는 ‘핵무기 비보유국’으로 규정한다. 그 전제 위에서 핵무기 보유국들의 핵무기 이전이나 지원을 금지하는 것과 핵무기 비보유국들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금지하는 것, 장기적으로 완전한 핵 군축을 위한 교섭을 시행하는 것,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사실 어딘가 어색하다. 비인도적인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지구상 모든 국가의 핵무기 보유를 금지해야 마땅할텐데 어떤 국가의 핵무기는 합법으로, 어떤 국가의 핵무기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의 권리나 의무를 다르게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 보유국과 그렇지 않은 국가들의 생각의 차이가 크고, 핵 보유국들이 군축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고 핵무기 현대화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조약은 많은 문제에 직면해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핵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위한 노력들은 계속되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핵무기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국제조약인 핵무기금지조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 TPNW)이다. 조약 당사국이 핵무기나 핵폭발장치를 개발, 실험, 생산, 제조, 획득, 보유, 비축, 이전, 사용 또는 위협하거나 영토에 핵무기나 핵폭발장치의 주둔, 설치 혹은 배치를 허용하는 것, 핵무기 관련 활동에 참여하도록 지원하거나 유도하는 것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 이 조약은 2017년 7월 7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2020년 10월 24일 50개국의 비준이 완료되어 발효되었다. 현재는 비준국이 56개국으로 늘어났다.

핵무기금지조약은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증언해온 원폭 피해자들, 조약에 일찍이 서명하고 비준한 미래지향적인 국가들,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 오랜 시간 애써온 전 세계 시민사회단체와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의 힘으로 함께 만든 소중한 성과였다. 물론 전 세계 핵무기의 90%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핵 보유국들, 한국과 같이 핵우산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아직 조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강력한 국제조약의 발효는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들, 핵무기에 투자하는 기업들에게도 앞으로 계속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불어 핵비확산조약을 비롯한 기존 핵 군축 체제들을 보완하고 촉진하는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생물무기, 화학무기, 대인지뢰, 확산탄 등 비인도적인 무기들은 금지된 후에 점차 폐기되어왔다. 핵무기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와 핵무기는 공존할 수 없다’는 믿음을 현실로 만들어온 사람들

“우리들은 전쟁 옹호자들에게 평화를 간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평화를 수락시키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 핵물리학자인 프레데리크 졸리오 퀴리(Jean Frédéric Joliot-Curie)가 스톡홀름 어필(Stockholm Appeal)을 발의하며 했던 이야기라고 한다.

약 70여 년 전, 1950년 3월 세계평화의회(World Council of Peace)에서 채택된 스톡홀름 어필은 ‘핵무기는 전면 금지해야 하고 핵 선제 사용은 전쟁범죄로 규정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선언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개발 경쟁이 격화되고 있던 시기, 이 어필에 전 세계적으로 2억 8천만 명이 서명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한국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을 막는 데 이 서명운동이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시간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만은 안 된다’는 금기를 만들어냈고, 지금까지 핵무기 사용을 실제로 억제해왔다.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언뜻 아득해보이는 목표는 그렇게 느리지만 조금씩 가까워져왔다. 각국 정부가 망설이는 동안에도 전 세계 시민사회운동이 서로의 활동에서 배우고 이어가며 불가능해보이는 미래를 앞당겨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다보면 전 세계 모든 곳이 비핵지대가 되는 날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글을 읽어주신 분들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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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미워하는 일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 평화운동을 한다. 이름은 수영, 좋아하는 것도 수영. 지금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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