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03-10-23   2251

<파병반대의 논리> 이라크 파병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각계전문가와 세계지성이 말하는 이라크 파병반대의 논리

1. 파병과 국익논쟁

명분인가, 실리인가?

이라크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서 파병론자들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병을 지지하는 일부 언론은 파병을 둘러 싼 갈등을 명분론과 실리론의 대립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라크 파병은 명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런 실리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분이 없다는 점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80퍼센트 안팎의 국민이 이라크 전쟁을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보고 있으며, 파병론자들도 자신들의 명분이 없다는 점을 대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국익이란 말로 포장된 실리의 내용과 계산법이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도 다 좋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미국의 침략전쟁을 거드는 것을 포함하여 어떤 일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발상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만일 국익이란 이름 하에 국가의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면 20세기 초 일본이 자기네의 국익을 위해 한국을 침략하여 강점한 것 역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지금은 “짐이 곧 국가”였던 절대군주제의 시대도 아니고, 군사반란의 주범 박정희가 집권하고 있는 시기도 아니다. 절대군주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으로, 독재자의 정권유지가 국가안보로 간주되는 그런 시기는 지나가 버렸다. 아직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상당한 정도의 민주화를 이룬 우리는 우리가 이룬 민주화에 걸맞는 국가이익의 내용과 추구방식을 새롭게 결정하여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국익의 모호함

조선일보 뿐 아니라 모든 파병 찬성론자들에게 국익이란 요술방망이이다. 현실정치에서 국익이란 말이 힘을 갖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국익이란 말이 갖는 엄청난 모호함 때문이다. 무엇이 국익인지, 그들이 말하는 국익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징병제에 의해 입대한 젊은이들이 흘려야 할 피는 이들의 국익계산에는 절대 포함되지 않는다.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 악화도 중요하지 않다. 파병론자들은 우리가 치러야 할 명백한 대가는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고, 우리가 얻을 수 있다고 그들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이익만 따지는 참 이상한 계산법을 쓰고 있다.

파병이 경제적 실리를 보장한다?

파병론자들은 한국이 이라크에 전투병을 보내야 막대한 전후복구건설 사업에 동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91년의 걸프전 때 한국은 약 5억 달러의 전비를 부담해가며 파병을 단행했다. 그러나 한국 기업이 전후복구건설공사에서 따낸 공사수주액은 기백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파병론자들은 1차 이라크 파병 때도 같은 논리를 내세웠지만, 한국기업이 어떤 공사를 수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제마 부대의 이동외과병원 건설이라는 아주 작은 공사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미국 내에서도 체니부통령과 깊숙이 연결된 벡텔사가 전후복구사업을 독점하였다고 시끄러운데, 과연 한국이 그 잔치에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베트남전 당시 박정희나 그의 경제관료들은 남의 전쟁에 들어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 시절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냈고 후에 전경련 회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유창순은 한 좌담회에서 파병과 국익의 상관관계 이야기를 한참하고 난 후에야 “아까 제가 사실은 우리가 파병을 하는 반대의 급부형태로서 가서 용역이라든가 하청이라든가 토목공사라든가 하는 것을 맡았다는 이야기는 참아 못드렸습니다”라고 쑥스러워 했다. 그러나 오늘의 파병론자들은 미국의 침략전쟁을 편들어 다리공사, 도로공사 따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파병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다?

국익론자들은 파병을 통해 국위를 선양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병론자들은 1975년 페루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 남과 북이 동시가입 경쟁을 벌였을 때 북한은 압도적인 다수로 가입이 승인되었던 반면, 남한은 가입이 부인되어 한국외교사상 최대의 참사로 기록된 사건을 역사에서 지워버린 모양이다. 남북이 국제무대에서 첨예한 외교경쟁을 벌이던 시기에 벌어진 이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한국의 베트남 파병이다. 제3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할 뿐 아니라 베트남 민족의 해방전쟁에 미국의 요구에 따라 막대한 병력을 파견한 한국이 “놀아 줘”하고 다가서자 “나가 있어”라고 답한 것이다.

2. 파병과 한미동맹론

공짜 점심은 없다?

파병론자들이 흔히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이 막대한 피와 돈을 만든 안보우산” 아래서 우리가 “공짜 밥 먹고 응석도 좀 부려” 보던 시기는 지나갔다는 것이다({조선일보} 2003년 9월 17일자, 논설위원 양상훈 칼럼, [공짜 점심은 끝났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치른 대가는 전혀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은혜에만 감격하는 것이 수구사대세력의 행태라지만, 파병론자들의 눈에는 베트남전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미군을 대신하여 흘린 피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미국의 침략전쟁에 따라 들어가 무려 5천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1만여 명의 부상자, 그리고 수만 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이 발생한 사실은 저들의 셈법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공짜점심이라니! 5천명의 젊은 넋이 공짜란 말인가? 의무대와 공병대 파병하고 나니 바로 전투병 2만 명 보내라고 요구하고, 그 전투병 도착하기 무섭게 전투병 2만 명 보내라고 해서 도합 5만 명, 연인원으로 치면 32만 명을 베트남 땅으로 불러들인 미국에게 우리가 공짜로 점심을 얻어먹었단 말인가? 주월한국군 사령관인 중장에게 필리핀군이나 타이군 중위에만도 못한 월급을 주면서, 남의 나라 땅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한국군 사병들에게 남베트남 정부가 자기네 사병들에게 주는 월급 정도만 주면서 부려먹은 게 미국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오히려 한국군을 공짜로 써먹으며 미군 대신 피를 흘리게 한 것 아닌가? 김대중 정권이 수구세력 눈치 보느라 얼마 하지도 못한 대북지원에 ‘퍼주기’라는 희한한 말을 붙인 조선일보는 정작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미국의 ‘퍼가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보이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인가?

한국보다 더 비싼 점심을 먹은 나라가 있는가?

1차 이라크 파병으로 한국은 또다시 미국이 일으키거나 주도한 국제 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1차 걸프전쟁 등 20세기 후반의 3대 전쟁에서 걸프전쟁 때 단역을 맡은 것만 빼고는 한국은 주연 또는 주연급 조연으로 활동했다. 앙골라내전이나 소말리아 내전에도 우리는 병력을 보냈다. 그리고 21세기 벽두에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1차 파병을 한 데 이어 전투병 위주의 2차 파병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흔히 미국과 한국은 혈맹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혈맹이고, 미국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면 프랑스나 영국은 어떠한가? 미국의 주축을 이룬 연합군의 노르만디 상륙작전으로 나치 점령 하에서 해방된 프랑스나 연일 독일군의 공습에 시달리다 미국 덕에 영토를 보존한 영국,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모든 서유럽국가들이 미국의 마샬플랜 덕을 톡톡히 보지 않았던가? 냉전 시기에 이들 서유럽국가들은 미국 주도의 나토를 통한 집단방위체제에 묶여 있으면서도 베트남전에는 영국이 불과 20여명의 병력을 보냈을 뿐 소 닭 보듯 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지금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의 도움을 입은 나라, 미국과 혈맹이라 할만한 나라는 한국말고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5천명 이상의 목숨을 바쳐가며 미국이 일으키거나 가담한 전쟁에 적극적으로 빠짐없이 참가한 나라는 없다. 과연 이 세상에 한국보다 비싸게 미국이 제공한 점심을 먹은 나라가 있는가?

파병을 북핵문제 해결의 지렛대로 사용한다?

파병론자들은 북핵문제의 해결이 시급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미공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이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파병을 통해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다소 불편해진 한미동맹을 복원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이 파병을 꺼리는 상황에서 한국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여 미국을 감동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이라크 파병이 한미관계에서 미국에 대한 한국의 발언권에 힘을 실어주는 지렛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연인원 32만의 대군을 파병한 베트남전을 비롯해서, 걸프전, 아프카니스탄전 등 여러 차례에 걸친 파병은 한국의 대미 발언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을 감동시켰는가?

‘이라크 해방’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깃발을 내세우며 민간인들에 포탄을 퍼붓는 미국도 베트남전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지만, 우리 정부도 32만 대군을 파병했던 베트남전으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나토 수준의 방위조약 –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경우 한반도 유사시에 미군이 군사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나 나토조약의 경우 자동개입이 보장됨 – 으로 격상, 주한미군의 주둔 보장 등을 대미관계에서 한국이 얻어내야 할 핵심적인 과제로 설정했다. 그러나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에 대해 미국은 풀부라이트 의원이 “일찍이 미국외교사에 있어본 적이 없는 터무니없는 미사여구”라고 비판한 립서비스만을 제공했을 뿐 조약의 개정에 전혀 응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베트남에 한국군을 안보내려면 안보낼 수 있었지만, 그러면 미국은 휴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보낼 것이기 때문에 한국군을 파병한다는 논리로 부도덕한 베트남전에 한국이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미국은 1971년 한국정부에 일방적인 통보 – 미국이 생각한 한국정부와의 사전협의 – 를 거쳐 주한미군 2만 명을 베트남이 아닌 미국 본토로 철수시켰다. 공병 수백명에 이어 전투병 수천명이 아니라 전투병 중심으로 32만 대군을 파병하고 우리가 얻은 결과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은 한-미 간의 쌍무적 관계인 반면, 북핵문제는 미국의 세계전략과 관련된 문제로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32만 대군을 파병하고도 한-미 간의 쌍무적인 관계에서 핵심적인 요구사항도 관철시키지 못한 마당에, 이라크 파병으로 이북에 대한 미국의 군사력 사용이나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너무나 위험하고 오히려 우리의 국익을 해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순진한 발상이다.

주한 미군 2사단의 한강 이남으로의 재배치를 막을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견하지 않을 경우 일부에서는 주한 미군 2사단의 이라크 파병이나 한강 이남의 재배치, 또는 심지어 2사단을 이라크에 파병할 것이라는 등 미국의 보복적 조치를 우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군 재배치 문제는 냉전 체제의 종식 이후 이미 10여 년 전부터 미국 자체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된 문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정부 뿐 아니라 미국정부의 고위당국자들도 거듭 나서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과 주한 미군 2사단의 재배치 문제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거듭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파병론자들은 우리가 파병을 안하면 미국이 보복조치로 미 2사단을 전방에서 후방으로 배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의 남침위협이 한층 증가될 것이라고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미 2사단의 재배치와 관련해서 정작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미 2사단의 재배치가 혹시 미군이 북한군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밖으로 이동하여 유사시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짐으로 인해 대북 선제군사공격의 유혹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지, 북한이 주한 미지상군 주력부대가 한강 이남으로 이동하였다고 해서 남침을 감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커지는 점은 아니다. 주한 미군 2사단은 한국이 이라크에 파병하든 하지 않든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의 미군재배치 계획에 따라 이동배치되게 되어 있으며, 파병 문제는 미군의 재배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파병론자들 중에서도 양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베트남에 대군을 파견했어도 미군은 철수했다

주한 미군 2사단 재배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다시 베트남 파병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하면서 박정희는 미국이 “한국군을 보내 달라고 그랬을 때에 물론 우리가 보내기 싫으면 안 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군을 보내지 않았을 때에는 여기에 있는 미군 2개 사단이 갔을 겁니다. 갈 때에 우리가 우리 병력은 보내지 않으면서 미군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붙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면서 “우리 나라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박정희는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이북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침략할 수 있는 그런 찬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치적, 심리적 불안이 일어날 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투자가 위축되고 차관을 들여오는 길도 여의치 않으리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는 문제는 박정희로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나토 수준의 방위조약으로 개정하는 문제 다음으로 박정희가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1971년 한국정부에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휴전선에 있던 미군 7사단을 베트남이 아닌 미국으로 철수시켰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군의 이동과 재배치는 한국의 파병에 대한 대가로 한국과의 협상에 의해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결정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라크 파병을 북핵문제의 해결이나 미군 재배치에서 한국에 유리한 카드로 사용하려는 발상은 수십만 대군을 베트남에 보내고도 미군 철수를 지켜보아야 했던 경험을 잊은 경박한 발상이다. 미국 조야의 보수파들이나 그들의 한국 내 대변자들은 종종 주한미군의 철수 문제를 갖고 한국정부를 길들이려는 시도를 한다. 우리가 한반도는 미군이 한국전쟁 당시 5만 명의 목숨을 바쳐 지켜낸 미국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역임을 상기한다면, 이런 주장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중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견제가 미국의 핵심적 이해로 등장하고 있는 21세기 전반에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증대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국제관계의 변화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토대로 미국의 부당한 압력행사에 보다 당당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만약 이번에 미국의 요구대로 파병한다면 2차파병으로 그칠까?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지만, 만약 한국이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한다면 미국의 요구는 거기서 그칠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베트남전 때도 1, 2차에 걸쳐 의무대와 공병대 2천여 명을 보내고 나니 3차, 4차, 5차 파병으로 이어져 총 5만 명, 연인원 32만 명의 대군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파병 병력의 규모가 5만 명으로 그친 것은 1968년 벽두에 이북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고 이북 해군이 미국의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끌고 가버린 초대형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라크에 전투병을 보내 스스로 모래 늪에 빠져든다면 베트남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떡 하나 주면 안잡아먹지” 식의 부당한 증파 압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국의 부당한 파병 압력에 시달려 왔고, 또 앞으로 5년, 10년 뒤에 미국이 다른 곳에서 전쟁을 일으킬 경우 우리는 또 다른 파병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한국군의 병력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대부분의 기간 한국군은 20만 안팎의 병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직후 한국군은 70만 대군으로 늘어났다. 이승만이 미국의 군사원조를 더 많이 얻어내기 위해서 병력을 늘인 까닭이다. 이 때 이승만은 미국에 대해 세계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이 병력부족 상황에 직면하면 한국군을 동원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 이후 미국은 한국군을 주머니 속의 공깃돌 마냥 필요하면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별동대로 여기게 된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서, 그리고 미국의 끊임없는 파병 압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남북의 공동 감군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3. 한국군 동원의 원칙과 파병문제

UN 결의가 있으면 파병이 가능한가?

우리 사회에는 미국의 요청만으로는 파병해서는 안되지만, 유엔의 결의가 있다면 파병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유엔의 결의가 있어 파병하게 되는 경우도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유엔 승인 하의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파병하는 경우다. 이 때는 미군 장성이 사령관이 되어 지휘권을 행사하고, 전비는 파견국가들이 자체적으로 부담한다. 둘째는 유엔이 직접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경우이다. 이 때는 유엔사무총장이 사령관을 임명하며, 전비는 유엔이 부담한다. 유엔 승인 하의 다국적군의 경우는 내용 상 지난 3월 미국의 요청에 의한 파병과 다를 바가 없다.

기정사실화된 미국의 침략행동을 국제사회가 사후 승인했을 뿐이다. 특히 이번 안보리 결정에서 정작 미국 측의 손을 들어 준 국가 중 이라크에 파병하겠다거나 전비를 부담하겠다는 나라는 찾기 힘들다. 유엔이 직접 파견하는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을 승인한 상황에서 한국이 파병하는 것은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의 군사행동을 우리 돈 써가며 뒷치닥거리하는 것일 뿐이다. 유엔이 직접 파견하는 평화유지군의 경우 유엔 회원국인 한국이 유엔의 요청을 완전히 외면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꼭 파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엔의 평화유지군이 실질적인 평화를 유지하여 이라크의 복구를 돕기 위해서는 이라크인들의 평화에 대한 최대의 걸림돌로 등장하고 있는 미점령군이 철수하고, 이라크인 자신에 의한 민주질서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사회에 대해서도, 이라크인들에 대해서도 조속한 시일 내의 주권이양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군이 이라크에 파병될 수 있는 경우는 이라크를 침략한 미군이 철수한 상황에서 이라크의 평화유지와 새로운 민주질서 수립을 위해 유엔이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기로 한다면, 동티모르 평화유지군에 한국군이 참여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사정에 맞는 규모로 파병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군의 장기점령 자체가 이라크인들의 당연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토벌을 치안유지라는 명목하에 지원하는 행위에 한국군을 보내 지원하는 것은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행위일 뿐이다. 파병론자들은 유엔 안보리의 결의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 파병이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인 파병론자인 조선일보 김대중이 9월 20일자 칼럼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는 “우리의 실리는 곤궁한 처지에 놓인 미국을 도와준다는 데” 있다면서 “유엔 깃발 아래라면 중동관계를 고려해서라도 굳이 우리가 나서야 할 여유가 우리에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파병과 같은 중요정책, 누가 결정해야 하나?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하는 문제를 놓고 국민들의 반대여론이 예상외로 높자, 파병론자들은 파병과 같은 중요정책은 ‘뭘 모르는’ 국민들이 결정할 것이 아니라 냉철하고 신중하며,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전문가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의 진로와 운명이 걸린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첫 번째 기준이 국민여론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면서 “자칫하면 국가적 결정이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포퓰리즘적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일보 등 수구족벌언론은 정부가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면 여론을 무시한 오만한 정권이라 비판하고, 시민대중의 여론을 따르면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이중잣대를 들고 있다. 국가안보나 외교에 관한 정책은 ‘뭘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아니라, 책임감 있는 엘리트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십 년 전 냉전이 시작될 무렵 미국 정치학계의 이른바 현실주의 이론가들이 주장한 낡은 주장이다. 중요한 정책일수록 엘리트들이 결정해야 한다면, 1인1표의 보통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정말 중요한 문제일수록 국민들이 판단하여 민주적 절차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

군대의 출동,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하나?

파병론자들은 파병을 하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빨리빨리 파병해야 이라크의 전후복구건설 사업을 수주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군은 헌법이 정하는 바와 같이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장사수단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체의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헌법에 따라 군동원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군대는 국가의 존망의 걸린 최악의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지는 젊은이들의 목숨이 걸린 파병을 공사 수주를 위한 해외 지사원 파견처럼 가벼이 보는 행위는 군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일부에서는 전투병 파병을 통해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군대는 스포츠팀이 아니고, 목숨을 담보로 하는 파병은 스포츠팀의 해외전지훈련이 아니다. 이렇게 군 동원을 가볍게 여기는 발상이 횡행하게 된 것은 군사반란을 일으켜 헌정을 파괴한 세력이 30년 간 집권하면서 군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삼아 가볍게 동원하는 작태를 일삼아 왔으며, 그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걸프전, 아프카니스탄전, 이라크전… 미군이 가는 전쟁이라면 우리 군은 빠짐없이 동원되었다. 우리 군이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헌법을 가진 대한민국의 국군인지, 아니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의 별동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부에서는 한미동맹의 강화를 위해 이라크에 파병해야 한다지만, 한미동맹 때문에 한국군을 동원해야 하는 경우는 딱 한가지, 미국 본토가 어떤 나라의 정규군에 의해 침략을 당한 경우뿐이다. 미국 본토가 침략당했다면 우리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의무에 의해 미국본토에 파병해서 침략자 격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을 따라다니며 뒷치닥거리하는 것은 우리 헌법에 부합되지도 않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동맹정신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준) 공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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