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평화바이러스> 임동원과 김용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김용순 동지는 지난 6월 16일 교통사고로 하여 장기간 입원치료를 받아오다가 주체92(2003)년 10월26일 5시에 69살을 일기로 애석하게도 서거하였다.…동지는 다년간 당 중앙위원회 지도기관 성원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였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북한 관영 <중앙통신>이 27일 보도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부고’가운데 일부다.

김용순의 죽음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건 ‘임동원’이라는 인물이었다. 임동원과 김용순, 자신이 선택한 반쪽 조국을 위해 한 생을 바쳤고, 만년엔 분단된 조국에 화해와 협력의 오작교를 놓으려 고단한 투쟁을 거듭했던 동갑내기 두 인물.

김용순. 1934년 7월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국제관계학과에 입학했다가, 이 학과가 국제관계대학으로 독립하면서 1기 졸업생이 됐다. 모스크바 유학을 거쳐 대외업무를 보던 그는 해외공관에서도 근무했으며, 72년 노동당 국제부 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했다. 80년 10월 조선노동당 중앙위 위원에 선출됐고, 88년 당 국제부장, 90년 국제담당 비서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남북비핵화공동선언 합의 하루 뒤인 1992년 1월21일 뉴욕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아놀드 캔터 당시 미 국무부 차관과 북-미간 첫 고위급회담을 하기도 했다. 92년 12월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임명됐고,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됐다. 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 93년 8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94년 7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명실상부하게 대남 분야 최고 책임자로서 지금껏 일해 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표적 엘리트이자 당료-관료였던 그는 1990년대 이후 남북관계에서 늘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특히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을 모색할 때면, 늘 북쪽의 대화 창구로 나서왔다.

나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당국간 회담 취재 과정에서 그를 몇차례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로 정부간 협의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금강산관광사업과 개성공단사업 등 경제협력 협의를 하는 한편, 통일전선부부장으로 ‘대남공작’을 했을지도 모를, 그 복잡다단한 일들을 한몸으로 수행해온 인물을 내가 어찌 가늠할 수 있으리. 다만 몇 차례의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그가 다른 북쪽 관리들과 달리 옷맵시를 중시하는 멋쟁이라는 점, 관료보다는 수완 좋은 정치인에 가까워 보였다는 것 정도다.

남북관계의 모호한 복잡함, 특유의 이중성 만큼이나 ‘김용순’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그 평가가 극을 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한다. 어쩔 수 없는 소심함 탓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의 ‘조의’ 표시에 ‘이적행위’나 ‘고무찬양’의 잣대를 들이대는 인간이 없기를 바란다. 누군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일단 애도를 표하는 것이 인간적 도리일뿐더러, 화해와 협력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정세현 통일부장관의 “인간적으로 조의를 표한다”는 말로, 조문에 갈음했다.

임동원. 1934년 7월 평안북도 위원에서 태어났다. 육사 13기로 육사 교수를 거쳐 합동참모본부와 육군본부에서 ‘전략기획’ 업무를 맡았으며, 80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잠시 외교관 생활을 하던 그는 90∼93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참여해 저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 탄생의 산파 노릇을 했다. 그는 특히 군축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 권위자다. 이른바 ‘김신조 침투 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67년 그가 펴낸 <혁명전략과 대공전략>은 ‘게릴라전에 대비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예언자적 식견’이 담겼다는 평가를 받아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관계는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통일외교안보정책에 관한 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주파수가 완전하게 일치하는 ‘김대중의 분신이자 최고의 동업자’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둘의 관계는 공히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빌리 브란트와 에곤 바르의 관계에 비유되곤 한다.

임동원은 2001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의 여파로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한 국회에서 ‘친북좌파’로 몰려 불신임을 당한 바 있다. 보수적 출신성분으로 따지자면 대한민국 성골 수준인 그가 ‘김대중’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면, ‘친북좌파’소리를 들을 일이 있었을까.

그는 지금 대북 송금 사건의 피고로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나는 그가 재판정에 피고로 서 있는 모습이 아직도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상회담 추진 당시 국가정보원장으로 회담 준비를 총괄 지휘했던 그에게 대북송금과 관련해 적용된 ‘죄목’은 통일부 장관과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실정법 절차에 따라 신고하지 않았다는 따위의 것들이다.

화해를 통한 냉전적 질서의 해체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그를 재판정에 세워 한국사회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목적이 정당하다고, 부당한 수단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 이런 비유가 타당한가. 나는 정녕코 모르겠다. 특검 수사도 1심 재판도 끝난, 지금 그는 2심 재판에서 언론과 여론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역사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임동원과 김용순. 재판정의 피고와 불귀의 객.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의 ‘대리인’으로서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공생의 길을 모색한 두 주역이 마주한 ‘운명’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한 시대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고 있는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 언젠가 남북이 통일된다면, 역사가들은 2000년 6월13일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날을, 남북관계가 적대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물꼬를 돌린 역사의 분수령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김정일뿐만 아니라, 임동원-김용순이라는 인물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2003년 10월26일. 제주에선 사흘간의 ‘민족평화축전’이 막을 내렸고, 금강산에선 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1천명이 넘는 남쪽 관광객들이 붉게 물든 ‘풍악산’의 절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모든 언론이 호들갑을 떨며 중계하고 보도할 일이건만,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이건 무관심이라기보다는, 남북의 만남이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탓일지 모른다. 삶에 필수적인 공기에 사람들이 감사를 표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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