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일반(pd) 2003-12-23   616

<이제훈의 평화바이러스> 송두율, 비적대적 전향, 중간파

아마도 10년 전 늦가을이었을 거다. 면접관이 물었다. ‘누구를 존경하는가.’ 나는 ‘여운형 선생’이라고 답했다. 면접을 앞두고 미리 준비했던 답변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 여운형 선생을 엄청 존경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마도 근현대사에서 여운형과 같은 길을 걸어간 이들에게 가슴이 저리는 안타까움 비스무리한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모르겠다. 중도노선, 또는 중간파.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서 그 이름은 ‘패배자’와 동의어였고,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운명과 다를 바 없었다.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른바 ‘사법적 잣대’로 보자면, 아마도 핵심 쟁점은 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아닌가 일 것이다.

검찰은 그가 ‘후보위원’이라고 하고, 송 교수는 “없는 사실을 인정할 바에야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하겠다”(12월1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4(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2차 공판에서)고 답했다. 긴가 아닌가, 논쟁은 치열하지만, 나는 모른다. 이 쟁점의 결론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내 머리와 가슴을 겨울밤 맵찬 바람처럼 되풀이해 쓸고 지나가는 의문이 있다.

‘전향제도’이라는 게 있었다(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 분들은 홍기선 감독의 <선택>을 보시면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듯하다). 대한민국 사법체계에서 더 이상 ‘전향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세력들은 송두율 교수에게 ‘확실한 전향’을 요구한다.

‘니가 친북이 아니라면 확실하게 전향하면 될 거 아냐?’라고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검찰도 ‘반성과 참회’라는 용어를 활용해 사실상의 전향을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법체계를 잘 아는 검찰은 “송 교수에게 개전의 정을 보일 경우 관용 조처하겠다는 원론적 얘기를 한 것이 전부”라며 “‘전향 권유’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하고 있기는 하다.

‘전향’(轉向)이 뭔가. 국어사전을 보면, “①방향을 바꿈. ②종래의 사상이나 이념을 바꾸어서 그와 배치되는 사상이나 이념으로 돌림”이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전향’하면 흔히 떠올리는 뜻은 ②에 해당할 터이다.

방향 바꾸기는 어느 쪽으로든 가능할 터이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전향의 방향은 한쪽으로 고정돼 있다. “반일에서 친일로 즉 불령선인에서 황국신민으로, 용공=친북에서 반공=친남으로 즉 빨갱이에서 반공투사로의 전향만 있었다. 그래서 전향서들은 논리나 문투에서 천편일률적”(계간 <역사비평> 2003년 겨울호 ‘책머리에’에서)이다.

송 교수는 ‘반쪽 조국’ 남한에 들어온 이후 온갖 논란에 휩싸이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 질서를 존중할 것’을 다짐하고, “그동안 남북의 화해자를 자처하며 써 온 ‘경계인’이라는 표현이 ‘회색분자’라는 오해를 빚는다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세력과 검찰이 은연중에 압박하는 그 ‘전향’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방향전환은 전환이되, 대한민국 사회에서 말하는 그런 뜻의 ‘전향’은 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인 것 같다. 송 교수의 이런 태도를 일러 계간 <역사비평>은 ‘비적대적 전환(전향)’이라는 낯선 개념어를 동원해, “송두율은 (적대적)전향도 비전향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도 지난 16일 2차 공판에서 “한국사회도 0과 1의 사이에 0.001도 있고 0.999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21세기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0도 1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를 서성이는 것으로 아직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있는 ‘조국’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비적대적 전향’ 또는 ‘비적대적 전환’이라…, 글을 읽은 이후 오래도록 머리를 맴도는 개념이다.

나는 ‘송두율 문제’가 한국의 역사에서 중대한 변화를 전조하는 시대적 징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없이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온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가 하늘을 뒤덮은 먹장구름마냥 한국인의 머리와 가슴에 그득한 이 즈음, ‘이도 저도 아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낯선 ‘그 무엇’일 것이다. 늘 그렇듯 새로운 것은 얼마간 낯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새로운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되, 이 경우에 ‘낯선 그 무엇’은 적어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다. ‘이거 아니면 저거’만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은 그 특유의 단순함으로 지루하기도 하지만, 너무 숨막히지 않은가.

송두율 교수의 처신은 분단 전후 해방정국에서 중도노선을 취한 인물들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지금은 요령부득이지만, 이 의문이 어떤 길을 내는지 좀더 밀고 가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점이지대가 없다면, 세상은 그만큼 덜 다채롭고, 거대한 두 세력이 화해와 공존하기보단 갈등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 나는 소설가 황석영의, 정말 그다운, 애절한 호소를 떠올린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시대의 국가주의를 위한 박제와 같은 ‘전향과 비전향’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제 더는 비전향 장기수를 미화하지 말라. 전향 작업을 사상적 승리라고 자만하지 말라. 어떤 제도가 인간의 꿈과 사랑과 소망과 행복들을 저버리고라도 지켜낼 가치가 있다고 자신한단 말인가. 또는 어떤 제도적 가치를 옹호하려고 인간이 자주적으로 변하기 전에 강제로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분단시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쪽 아니면 저쪽을 분명히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이제 분단체제가 또 사람 하나를 잡는다. 북쪽이 모질면 남쪽이라도 너그러워야 하지 않나…”(2003년 10월8일치 <한겨레> 6면 기고문 중에서)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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