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감시센터 칼럼(aw) 2024-03-04   1745

[중꺾정 17화] 한국에서 민주정치가 어려운 이유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칼럼을 통해 유권자들의 시각에서 오늘의 정치를 비평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이니까요.

※ 이 칼럼은 오마이뉴스와 슬로우뉴스에 중복 게재됩니다.

한국에서 민주정치가 어려운 이유

조영호(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쟁투가 지배하는 정치를 보여주는 민주당 공천

곧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온다. 정부여당인 국민의힘의 공천은 다소 조용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일부 현역들이 스스로 물러나고 야심을 드러낸 후보들도 교통 정리에 순응하는 분위기이다. 반면 야당인 민주당은 공천으로 내홍을 넘어 역대급 분열과 역사적 위기를 겪고 있다. 민주당은 원래 1950년대 이승만 독재에 대항한 지주층과 교육받은 지사들의 정당이었으나 1999년 김대중의 ‘젊은 피 수혈론’에 따라 86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진출하여 주도해 온 정당이다. 2000년대 초반 86학생운동 출신들이 민주당의 권력을 잡게 되었던 변화도 순탄치 않았지만, 지금 이재명 대표에 의한 민주당의 변화는 그 진통이 매우 커 보인다. 말 그대로 ‘민주당의 이재명’에서 ‘이재명의 민주당’으로의 변화의 중심에 공천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이재명 대표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표층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의 이면에는 뭔가 거대한 원인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 원인들은 행위자들의 놀라운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필자는 이재명 대표의 행동에는 자기보존을 향한 욕구가 최우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재명 대표는 영장실질심사를 받았으나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충분치 않고 ‘법정에서 다툴’ 여지가 있어 풀려났던 만큼 감옥의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처지에 있다. 민주당의 전통이나 민주정치의 원칙들도 중요하고, 다수당이 되어 그것을 지키는 것이 본인의 앞날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이나 훈수는 이미 ‘일일 구속’을 경험했던 이재명 대표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구속을 당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구속 당해 본 사람 혹은 구속의 위기에 처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에는 과거 젊은 시절 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감옥에 다녀온 사람들이 꽤 많이 있지만, 그것은 젊은 시절 패기와 대의에 무조건적으로 돌진하던 시기에 있었던 일이었고, 당시 그들에게는 미래가 있었다. 현재 60세가 넘은 야당 대표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쳐 대권에 거의 다가갔다가, 얼마가 될지도 모를 옥살이 혹은 방면할 재판을 한 달에 몇 번씩, 그것도 여러 건으로 동시에 받고 있다는 실존적 처지를 다른 정치인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이재명 대표의 재판들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실존적 고통과 고뇌를 이재명 대표가 겪고 있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결정과 행위를 하는 것도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현실 정치판을 잘 알지 못한 채, 일반적인 민주적 원칙과 규범을 고민하는 학자로서는 동의하기가 무척 어렵다. 일반적인 유권자들도 그럴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결연히 내려놓고 감옥에 다녀오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이재명 대표는 그러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현재의 정치적 교착과 갈등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민생, 경제, 저출산, 복지 등 일반 국민들의 관심사는 대표자들인 정치인들과 정당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죽이려는 자와 살려는 자 간 쟁투가 정치를 당분간 지배할 것이다.

생존을 위한 결투의 장이 된 한국 정치

정치가 어쩌다가 생존을 건 결투의 장이 된 것인가? 정치는 교과서에서 이해관계자들 간 대화와 설득을 통해 숙의와 갈등을 하고 최종적으로는 다수결에 따라 결정하는 일련의 의사결정과정을 뜻한다. 민주정치가 과정에서 숙의를, 결정에서 다수결을 따른다는 점은 민주주의가 강압적 수단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비폭력적인 수단에 의한 ‘정치’를 전제하기에 정치적 수단과 강압적 수단을 전술적으로 활용하는 ‘통치’와는 다른 양상과 속성을 가진다.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민주주의 문명사회에서 숙의와 다수결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방식이 있겠는가?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은 정기적으로 언론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민들과의 대화는 물론 야당 국회의원들과도 소통을 지속적으로 가짐으로써 숙의와 의사결정을 주도한다.

일부 독자들은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 정치가 이렇게 잔인해진 원인은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정치 이외의 수단을 통치의 목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민주화된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뉘앙스를 지난 통치라니? 일부는 한국이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강압과 통치는 어울리지 않는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합법적이지 않는가?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권위주의 잔재와 민주적 요소들은 혼재해 있다. 특히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에서 권위주의적 관행과 습속은 민주적 정치과정이라는 형식적 허울을 채우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늘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현실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서 혼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한국의 정치과정에는 필자가 말하는 숙의와 다수결의 원칙과 더불어 강압∙통치적 요소들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강압∙통치적 요소가 핵심이고, 정치는 피상이 되어 버렸다.

합법의 형식을 유지하려는 상태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의 심장부에 칼을 심어 두는 것이 집권자의 관점에서는 매우 편리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반대 세력을 도덕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정치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지지자들을 열광시켜 속시원하게 결집시킬 수 있다. 이를 방어할 반대 세력은 대체로 집단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고, 정치인들은 개인에게 다가오는 수사와 보복에 속수무책이며, 경쟁적 세력들은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며 분열을 촉발시켜 자중지란을 일어난다. 정부의 강압 기관들이 개인에게 가하는 정치보복을 개인이 방어할 방법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개인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버티고 싸울 것인가의 고뇌에 빠지기 마련이다. 합리적 집권자는 반대 세력의 자중지란과 분열을 관찰하면서 늘 가장 효과적인 대상을 타깃으로 삼고, 반응을 보면서 순차적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한다는 점에서 지금 이재명 대표는 덫에 걸려든 것으로 보이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여기서 약간 벗어나 있어 보인다. 물론 시간을 두고 볼 일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민주정치가 어려운 이유가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정치를 멀리하고, 통치의 관점에서 정치적 수단과 강압적 수단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후자가 중심이고, 전자는 주변화되어 있다. 정치적 수단과 강압적 수단은 개념적으로 반대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집권자에게 두 개의 카드가 있다는 점은 매우 유리하고 강압적 수단이 합법성으로 정당화될 경우 요술봉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야당에게 재앙과 같은 것이고, 당사자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 애를 쓰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에 집중시킨다.

강압적 수단이 민주정치를 압도하게 된 과정

일반적으로 서구의 오래된 자유민주주의에서 지도자는 강압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 오래전 그런 관행이 절대왕정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기에 그 향기와 유혹을 현재 느끼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미국의 대통령은 정기적으로 기자회견을 가지고, 영국의 총리는 매주 수요일 정오에 의회에 나가 국정을 보고하고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한다.

그러나 비서구권에서는 권위주의 국가건설 과정에서 강압적 수단을 고도로 발달시킨 다음 민주화를 겪었기에 지도자들에게 대화와 설득을 위한 노력은 늘 힘들고, 강압적 수단과 관행은 가까이 있기에, 이를 사용할 유인을 갖게 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억압과 회유의 제도적 및 조직적 수단을 고도로 발전시켰고, 과거 권위주의 국가는 반공의 관점에서 북한과 경쟁하듯이 이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나아가 민주화는 지도자를 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시민들이 자유를 확대하는 수준에 머물렀지, 집권자들의 행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는 점에서 합법을 위장한 강압 수단의 사용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정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고도로 발달한 강권기구들의 조직과 능력은 민주화 이후 한동안 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기대가 억지역할(deterrence)을 하였고 김영삼과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세월 정치를 해 왔기에 여당에 대한 지배력이 높았으며 정치 탄압의 피해를 몸소 겪었기에 강압적 수단을 자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이 폭로한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문제를 김영삼 대통령이 중단시킨 일과 김대중 대통령이 진실과 화해의 방식으로 과거사를 접근했던 일은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불법이 있으면 수사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얼마나 잔인하고, 정치를 위기에 빠뜨리며, 집권자에게는 단기적 이익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수법인가를 보여준다. 물론 필자가 불법이나 이재명 대표를 옹호할 의사는 전혀 없다. 다만 한국과 같이 정치 관련 법률체계는 매우 포괄적이고 애매모호한 나라에서 수사권자가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자명하고, 수사권자의 결정에는 대통령의 의중이 반드시 있다. 즉 정치의 장에서 수사라는 호명이 불법을 만들어 가고, 그것이 계속되어 정치를 집어삼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강압적 수단을 정치에 활용할 대상과 유인이 작았고, 본인 스스로도 이를 자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강압적 수단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등장한 계기는 이명박 정부 초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초기 미국 쇠고기 수입 파동으로 촛불시위에 직면하였고, 지지율이 21%로 곤두박질치면서 강압적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성화하였다. 강권기구의 수장들과 기술전문가들은 오랜만에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때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국정원과 기무사는 노무현,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은 물론 민간인들을 사찰하기 시작하였고, 검찰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전면적 수사를 개시하였다. 문화계가 좌파 세력에게 장악되었다는 인식 아래,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을 추진한 것도 당시였다. 2012년 대선에서 국정원이 대북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을 한다고 하면서 여론조작을 한 것도 당시였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와 같은 활동이 지속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이 정치를 압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강압적 수단과 활동이 정치를 주변화시킨 결정적 계기는 2016~2017 촛불 이후 적폐 청산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당시 촛불시위의 염원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관점에서 오랜 적폐를 청산하고자 하였고, 윤석열 사단과 검사들은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특히, 적폐 수사가 전직 박근혜 대통령을 넘어 이명박 대통령과 세력들은 물론 당시 야당 의원들에게 확대되면서 적폐 청산의 범위와 시기가 어디까지 언제까지 갈 것인가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그 이유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이것은 정치보복이 아니라 법적인 수사와 절차의 문제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정치적 자제를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수사가 정치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당시 야당의 일부 인사들은 지금 이재명 대표가 경험하는 전율과 위기감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사와 방어만이 남은 정치

지금까지 필자는 강압적 수단이 민주정치를 압도하게 된 과정을 개괄하였는데, 유심히 돌이켜 보면 합법을 가장한 수사와 보복이 정치의 중심을 차지하고 정치가 극렬하게 대치하게 되는 양상은 크게 세 가지 조건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전 정부 세력의 저항이 상당하고, 둘째 대통령의 정통성과 정치적 기반이 허약하며, 마지막으로 대통령 자신이 이를 자제할 의사가 없을 때이다. 법을 어겼다고 의심되는 전직 정부와 야당은 어떻게 보자면 한국에서 있어 왔던 상수에 가깝고, 실제 변수는 강압적 수단을 써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사용한다면 어디까지 사용하고 언제 자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정권교체 이후 정치적 수단과 기반이 허약하다는 점에서 강압적 수단을 활용하였다. 정치적 수단과 기반이 약하다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다는 점과 여당 내 자기 기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다는 점은 장기적으로 정치적 의지와 기반이 강하다면 돌파해 나갈 수 있다. 문제는 대통령의 정당 내 기반이 허약하여 장기적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을 만회하고, 정부의 성공을 도모하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강압적 수단의 사용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당시 한나라당의 핵심에 박근혜 의원이 있었고,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 여당 내 믿을 만한 윤핵관 의원은 소수에 불과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사례가 약간 다르지만, 한국에서 민주화 세력이 늘 소수자라는 피해자 인식과 적폐 청산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그럴 만했다는 정당성 부여는 수사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의 사기와 욕망에 드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자제해야 한다는 시그널을 주지 않는 이상 일선의 칼잡이들은 목숨을 걸고 돌격하지 않을 수 없고, 누구는 죽어야 했고, 정치는 사라진다. 원한과 증오, 보복에 보복이 정치를 지배하는 것이다.

현재 적폐 청산에서 최고의 능력을 보였고, 최선봉에 섰던 윤석열 검사는 검찰총장이 되었고, 정권교체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굳이 새로운 보강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대통령 본인이 잘 알기에, 정치보복은 타깃을 정하고 실행하면 되는 문제가 되었다. 결국 효과적인 타깃이 누구인가가 문제이고, 전방위적 시도 후에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응하여 이재명 대표는 자신을 위해 가장 잘 싸울 후보자, 자신을 방어해 줄 이들을 위주로 민주당 공천의 라인업을 완성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정치가 실종되었고, 수사와 방어가 정치를 압도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정치를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문제와 멀리하게 만들 것이고,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사활을 건 결투가 바로 정치가 될 것이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또한 제한된 임기라는 시간의 힘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등장하고, 한국 정치의 핵심이 되어 버린 데에는 과거 대통령들의 자의적 판단이 있었겠지만 그 본질에는 민주화 이후 대의정치, 정당정치가 서서히 약화된 데에서 비롯된다. 민주사회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은 정당이라는 조직과 정당이 여러 분야의 관료 및 전문가들의 자원과 관심이 모아서 움직여 나가는 일종의 거대한 기계와 같다. 그 거대한 정치라는 기계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정당이 인적, 조직적, 및 재원적 측면에서 충분히 능력이 있고, 강력해져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이 강압적 수단이 아닌 정치를 가까이하고, 본인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당 중심의 대의정치를 주변화시키고, 경시해 온 풍조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 세력 모두에서 발견된다. 가령 이명박과 박근혜와 같은 보수 대통령들은 정치가 비생산적이고 쓸데없이 싸우는 것이라고 치부하며 유체이탈식으로 거리를 두었다. 노무현과 문재인 같은 진보 대통령들은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를 새로운 시대와 맞지 않는 과거의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참여 및 직접 민주주의를 추구함으로써 정당과 대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한국의 정치 현실을 도외시하였다. 결국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정당은 인기 있는 인물에 의해 휘둘리고, 그렇게 대통령이 된 이들은 정당을 믿지 못하여 강압적 수단에 의존하고, 이는 정치를 결투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당은 본연의 역할을 되돌아봐야

대화와 설득의 숙의를 통해 다수를 만들어 결정으로 향하는 노력은 거의 없다.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기자회담은 물론 야당 대표와의 대화를 격이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꺼려 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아예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민주정치란 말인가? 국민과의 민생토론회는 눈속임에 불과하다. 비유하자면, 기자나 정치인이라는 선수(?)들을 상대로 하는 대화와 국민과의 대화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어느 한 쪽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한쪽은 있고 다른 쪽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운동선수는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아야지, 관중들 앞에서 시범을 보여 주고 인정받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으르렁대다가 싸우고 나중에 공통 이익이 걸리면 나눠 먹는 식이다. 강압적 수단에 의한 정치가 가져온 우울한 현실이다.

지금 양당의 공천을 보면 지역구와는 관계없이 이곳저곳에 후보들을 배치하고, 영입 인사를 앞세우고 있다. 한때 김기현 전 대표는 ‘천하의 인재를 모으겠습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의 정당은 내부적으로 인물을 키워낼 기반과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우려스러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결국 민주정치의 기반이 허약한 현실에서 권위주의 통치의 잔재는 지속하고 독버섯처럼 자라는 법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 민주화와 선거를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는데, 이제 그 환상은 가고 현실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이다. 정치인과 지도자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유권자는 유권자대로의 역할이 있다. 정치인들은 다시 정당을 세워 통제 불능의 사인적 권력을 제어하여 법치의 기반을 마련하고 정치의 길을 열어야 한다. 시민들은 선거를 통해 민주적 책임성과 견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것인가 하는 점은 불확실성 시대에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길이 있지도 않다는 점에서 다시 이성을 찾고 본연의 역할을 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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