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15272

[003]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2000년 11월 3대 개혁입법의 연내 처리 촉구 시민행동 농성텐트 - 명동성당 앞

2000년 11월 부패방지법 제정 등 개혁입법의 연내 처리를 촉구하는 시민행동 농성텐트가 명동성당 앞에 차려졌다.

┃ 배경과 문제의식 ┃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발생했다. 두 대통령이 주요 재벌기업으로부터 합계 1조 원 이상의 비자금을 수수한 초대형 부패사건이었다. 한편, 같은 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도 일어났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참사에 이은 대형참사로서 시민안전을 도외시 한 부실시공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들 일련의 사건은 우리사회의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더이상 좌시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참여연대는 공직사회 내부의 조직적 부패를 고발한 공익제보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내부비리고발자지원센터를 두고 있었는데, 보다 적극적인 반부패 국가개혁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만연한 부정부패는 땀흘려 일한 사람들이 공정한 보상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부정부패로 인한 뇌물수수, 급행료, 줄대기 같은 사회적 비용이 이미 직접적인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참여연대는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이 계속되는 한 경제성장의 신화도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져내릴 것을 경고하고 부패방지법 제정을 위한 맑은사회만들기 운동에 착수했다. 부패로 인한 비용이 너무 커서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합리적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 주요 활동 경과 ┃

참여연대는 1996년 1월 맑은사회만들기본부를 발족시켰다. 맑은사회만들기 캠페인의 가장 중심적인 목표는 종합적인 부패방지법을 제정하는 것이었고 그 밖에 반부패 공익제보에 대한 접수와 지원, 해외 부정재산 환수 등을 활동도 병행하였다. 내부에는 정책사업단과 공익제보지원단을 두었다. 정책사업단은 부패방지법안 마련을 비롯한 각종 반부패 정책을 입안, 제안하는 활동을, 공익제보지원단은 공익제보자 지원과 관련 정책의 입안을 담당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맑은사회만들기본부는 3월부터 연말까지 한겨레신문과 공동으로 부정부패추방 맑은사회만들기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1주일에 평균 1개면 이상을 기획해 각 영역별 부패실태를 조명하고 국제적인 반부패 논의를 소개하고, 부패방지법을 비롯한 개선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참여연대 맑은사회만들기본부가 제안한 최초의 부패방지법안은 “유명무실화된 공직자윤리법의 한계를 보완하고, 고위직 비리 적발·처벌의 실효성을 제고하며, 내부고발자 보호 제도를 새롭게 도입한 반부패 종합법안”이었다. 법안은 대폭 개정되고 강화된 공직자윤리법과 공무원범죄수익몰수특례법을 종합법안 속에 포함하고, 여기에 일종의 특별검사부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내부고발자 보호, 돈세탁 방지 장치에 관한 규정 등을 망라하는 150조 이상의 방대한 법안이었다. 

(※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가 발의한 부패방지법은 기존의 공직자윤리법을 세세히 보강하고, 공무원범죄몰수특례법을 통합하며 내부고발자보호제, 예산부정신고보상제, 돈세탁방지제, 특별검사제도(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등을 신설한 종합적인 부패방지 제도개선책으로 제시되었다. 야당은 또 부패방지법과는 별도로 특별검사제도를 발의하였는데 이는 사정기구의 중립성 보장과 견제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은 15대 국회(1996~2000)에서 이루어졌던 1기, 15대 국회에서 부패방지법이 처리되지 않아 자동 폐기된 후 16대 국회에서 진행되었던 2기로 구분된다.

<1기> 15대 국회에서의 입법운동

참여연대는 1996년 1월 부패방지법 제정 공청회를 개최하여 참여연대 부패방지법안을 발표한 후 같은 해 4월 15대 총선에서 전국의 국회의원 후보 1500여 명에게 당선될 경우 부패방지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하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16대 총선에서 이들 중 50여 명이 당선되었다. 여당과 제1야당이 부패방지법 제정을 총선공약으로 내걸었고, 총선 이후 여야영수회담에서도 부패방지법 제정에 합의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이어 참여연대는 당선자들을 상대로 부패방지법 제정 약속 서명운동을 다시 시작하여 11월 7일 국회재적 과반수인 국회의원 151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입법청원하였다. 이 입법운동은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삼풍 사건에 이어 1996년 말 안경사 협회 비리 사건 등이 다시 터져나오는 과정에서 부정부패 문제 해결에 관심이 높아졌던 여론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이같은 여론을 의식하여 12월 3일 당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가 참여연대의 부패방지법안의 골자를 그대로 계승한 종합적 법안을 국회에 발의함으로써 국회에서의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야당은 부패방지법 상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와는 별도로 특별검사임명에 관한 법도 별도로 발의했다. 12월 6일, 참여연대는 반부패 종합대책마련을 위한 103인 사회원로 공동성명을 조직하여 시민사회의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1996년 3월 부패방지법 제정과 전 대통령 부정재산 추징보전명령 촉구 서명 운동

1996년 3월 부패방지법 제정 서명과 전 대통령 부정재산 추징보전명령 촉구 서명을 받고 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1997년에 부패방지법 제정 논의는 답보했다.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까지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그 위기의 원인으로서 정경유착이 지목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참여연대는 1997년 대선을 통해 각 당 대선후보의 서명을 받아 부패방지법 제정을 주요 공약으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멈추지 않고 국회의원 서명압력을 계속하여 1998년까지 15대 국회의원 299명 중 253명의 서명을 확보했다.

 

그러나 1998년 이후 부패방지법에 대한 국회논의과정은 부패방지법안의 후퇴의 과정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지 1년이 채 안된 1998년 12월 국민회의가 다시 발의한 부패방지법안에서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에 대한 부분이 제외되었다. 이후 1999년 6월 정부의 반부패종합대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부패방지법의 명칭이 반부패기본법으로 개칭되었고 1999년 말 국회에 2차로 수정발의된 여당의 ‘반부패기본법’안에는 특별검사부(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는 물론 공직자윤리법 수정사항, 돈세탁방지 조항도 배제되어 있었다.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통령 직속의 부패방지위원회 설치, 부패행위신고자 보호 포상, 국민감사청구제 도입, 부패공직자 취업제한 규정 등이었다.

 

부패방지종합법이 반부패기본법이 되는 과정은 단순한 입법기술적 고려가 아니라 법안이 의도했던 핵심개혁과제를 회피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특히 부패방지위원회는 여당이 특별검사제, 특별검사부(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등을 모두 부정한 토대 위에서 설계되었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독립적인 고위직비리수사기구 신설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부패방지위원회’를 내세웠다고도 할 수 있다. 주된 논리는 적발과 처벌보다 예방과 교육, 제도개선 등을 담당할 종합적 반부패기구를 두는 것이 훨씬 낫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부패방지위원회는 정작 부패행위를 조사할 조사권한이나 검찰 감사원 등 권력화된 사정기구를 견제할 수단은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부패방지위원회안을 성안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참고했다는 홍콩의 염정공서나 싱가포르의 부패방지위원회는 하나같이 고위직에 대한 독립적 수사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된다. 이들 나라에서 운용되는 제도의 핵심은 거세한 채 화려하고 번잡한 외형만을 취한 것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부패방지법이 공직자윤리법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강화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부패방지법에 포함시키지 않고 별도 입법으로도 개정하지 않은 것도 반부패기본법과 반부패종합대책의 한계였다. 한편, 국민감사청구제 같은 제도들은 어설프게 반부패기본법에 끼워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식 주민소송제도나 미국의 부정주장법(국민소송법이라고 번역되기도 함 False Claims Act)처럼 별도의 법으로 집대성 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러한 후퇴는 김대중 정부 집권 이래 터져나온 대전 법조비리, 고관집 거액현금 도난, 경기은행 퇴출 로비, 고급 옷 로비사건, 파업유도사건 등 일련의 부패사건, 이들 사건에 대해 특별검사제등을 도입하거나 성역없이 수사하거나 부패방지법을 제정하여 검찰과 감사원 등의 권한을 제약하는 것에 대한 정권과 관련 국가기관들의 거부감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1999년 6월, 전국 200여개 단체가 ‘특별검사제 도입과 부패방지법 제정촉구 국민행동’을 발족, 100시간 연속 캠페인과 농성을 진행하며 부패방지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와 15대 국회는 끝내 부패방지법 제정하라는 요구를 외면하였다. 2000년 15대 국회의 종료와 함께 정부의 반부패기본법안, 참여연대 등의 부패방지법안 모두 자동으로 폐기되었다.

<2기> 16대 국회에서의 입법운동

1997년 IMF 경제 위기가 있었고, 그 사이 집권여당이 된 민주당은 특별검사제와 공직자윤리규정 등 부패방지법의 주요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 수많은 정경유착사건에 연루되었던 한나라당 역시 부패방지법 제정에 소극적이었다. 참여연대는 2000년 1월 2000총선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부패한 정치인을 퇴출시키기 위한 활동에 집중하였다. 총선시민연대의 첫 번째 공천반대 및 낙선 기준은 부패행위였다. 낙선운동에 대한 압도적 지지는 외환위기 이후에도 고질적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 소극적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부패행위에 대한 수사를 회피하기 위해 불체포특권을 이용하여 방탄국회를 일삼았던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채찍질이었다.

 

16대 총선과 낙선운동을 계기로 부패방지법 제정은 국회가 처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입법과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 하지만 15대 국회에서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입법운동은 보다 범시민사회적인 운동이어야만 했다.

 

2000년 5월 참여연대는 경실련과 한국YMCA전국연맹 등과 함께 시민단체 공동안을 마련하여 공동으로 제정운동을 추진할 것을 합의하였고, 7월에는 참여연대를 비롯 38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를 구성하여 부패방지법 제정을 위한 마지막 입법캠페인에 착수했다. 7월 20일에는 ‘부패방지 제도입법,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공청회를 열었다. 시민연대의 패키지 법안은 15대에 제출된 참여연대의 안과는 일부 변화된 것이었다. 돈세탁방지제도는 별도의 입법안으로 분리시켰고,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대신 부패방지위원회를 조사권을 가진 독립적국가기구로 설치하되 별도로 특별검사제를 제도로서 도입하도록 하였다. 시민단체안의 핵심 문제의식을 살리되, 15대 국회에 제출된 정부여당안과의 최소한의 조화를 꾀한 것이었다.

 

시민연대는 패키지 부패방지법안의 연내 제정에 동의하는 국회의원 208명의 서명을 받아 2000년 9월 부패방지법안과 자금세탁방지법안을 국회에 입법청원했다. 시민연대는 2000년 10월, ‘자금세탁 방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공청회를 개최하고, 10월 16일부터 29일까지 부패방지법 제정촉구 전국 자전거 대행진을 진행했다. 11월부터는 부패방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국회 입법로비를 나섰다. 집회와 토론회, 면담요청, 기자회견, 의견서 제출, 서한 등 다양한 방식이 총동원되었고, 국회 법사위 소위를 모니터하여 모니터 보고서도 발표했다. 그러나 결국 2000년 연내 입법은 좌절되었다.

 

2001년 2월 3대 개혁입법 촉구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3대 개혁입법 쟁취를 위한 시민서명운동을 진행하고, 2월 21일에는 개혁쟁취를 위한 1만인 시국선언을 이끌어 냈다. 이후 반부패입법 뉴스레터를 창간한 뒤 지속적으로 뉴스레터를 발간했다.

 

3월에는 제대로 된 돈세탁방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항의집회를 개최하는 등 돈세탁방지법 제정에 집중했다. 4월에는 돈세탁방지법과 부패방지법에 대한 의견서를 국회에 전달하고 막바지에 이른 부패방지법 제정이 제대로 입법되도록 하는 데 힘을 모았다. 특히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부패방지법안의 역사를 보도자료로 내어 국회에서 논의를 거치며 부패방지법이 어떻게 훼손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고, ‘빈껍데기법 반대 긴급시민행동’으로 48시간 릴레이 1인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의원면담과 수 십 차례의 논평, 보도자료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이 부패방지법에 조금이라도 더 반영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1년 6월 28일 오후 국회는 부패방지법을 통과시켰다. 공직자윤리규정, 특검제 등이 제외되고, 내부제보자에 대한 보호장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법안으로 6년여를 기다려온 국민들의 염원에 턱없이 부족한 함량미달의 법안이었다.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는 마냥 부패방지법의 국회 통과를 환영할 수 없었다.

돈세탁방지법의 국회 논의와 시민단체들의 대응

돈세탁방지제도에 대해 정부는 2000년 12월 「범죄수익은닉의규제및처벌등에관한 법률안」(일명 범죄수익규제법)과 「특정금융거래정보의보고및이용등에관한법률안」(일명 FIU법안) 등 2개의 패캐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범죄수익규제법은 돈세탁 처벌대상이 되는 중대범죄 유형과 처벌의 수준을 정한 법이고 FIU법은 돈세탁 혐의거래를 추적할 FIU(금융정보분석원)의 역할과 권한을 정한 법이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38개 단체들은 부패방지법과 함께 입법청원한 돈세탁방지법안을 통해 미국이나 호주가 채택하고 있는 고액현금보고제도를 채택하자고 주장하고 2000만 원 이상의 현금거래에 대해서는 금융기관이 국세청에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자는 안을 제시하였으나 정부와 여야당은 하나같이 이를 반대하고 혐의거래보고제를 통한 돈세탁 규제방식을 선택하였다.

 

시민사회단체들이 혐의거래보고방식을 반대한 주된 이유는 한국에서 돈세탁은 주로 금융기관과의 공모 하에 이루어져 왔으므로 금융기관에게 혐의거래를 보고토록 하는 것이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여야당이 한 목소리로 혐의거래보고제를 옹호함에 따라 돈세탁방지제도를 둘러싼 쟁점은 ①돈세탁 규제대상 범죄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②FIU의 혐의거래 추적권한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로 형성되게 되었다.

 

문제는 재경부가 제출한 법안에는 불법정치자금의 세탁행위와 탈세행위가 규제대상범죄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한국사회에서 돈세탁 행위는 주로 불법정치자금 조성이나 탈세와 관련된 것이므로 참여연대 등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후 여야당 법사위원회 의원, 여야당 정책위의장, 원내총무 등과의 연쇄면담을 시도하는 한편, 국회 정문 앞에서 항의 캠페인을 조직하였다.

 

시민단체의 활동이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얻자 여야 정치권은 2월 임시국회에서 정치자금 위반죄와 탈세죄의 일부를 돈세탁규제대상 범죄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막상 정치자금법이 대상 범죄 목록에 포함되게 되자 여야는 갑자기 신중해졌다. 그 전까지는 법안 처리를 서두르던 여야 의원들은 “FIU가 너무 많은 권한을 가졌다, 정치적 악용방지대책이 필요하다”는 둥 갖가지 문제를 제기하며 FIU권한 자체를 축소시키기 시작했다.

 

급기야 4월 23일 여야는 금융거래정보이용권한(계좌추적권)을 없애고, 정치자금법 위반죄에 한해 사전통보를 한다는 기형적인 법안마련에 합의했다. 사전통보제란 “정치자금법 위반죄, 특가법상 뇌물죄의 범죄로 (금융종사자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하는 경우에는 보고한 날부터 10일 이내에 보고한 거래정보 등의 주요내용, 사용목적, 보고받은 자 및 보고일자 등을 거래상대방에게 서면으로 통보”하고, 또한 “금융정보분석원은 통보받은 자에게 그 보고내용에 관하여 소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 경우 정치자금법 위반에 관한 한 불필요한 정치쟁점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 명확했다. 여야 정치인들이 이 점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이 황당한 합의에 여론이 다시 격앙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여당은 재협상을 시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민주당은 사전통보제는 폐지하는 대신 계좌추적권은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대신 검사를 통해 영장을 청구하여 추적하게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공정거래위, 금융감독위, 국세청 등이 이미 계좌추적권한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오직 금융정보분석원에 대해서만 ‘영장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불법 정치자금의 흐름을 추적당할 것을 우려하는 정치권의 속사정이 있는 숨어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는 비판적인 논평을 발표했다.

 

그 이후에도 시민연대는 각 당 원내총무 면담, 국회 상임위 본회의 모니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돈세탁방지법은 4월 28일 국회를 통과했다. 정치인에게만 특혜를 주는 사전통보제는 그대로 포함되었다.

┃ 성과와 의미 ┃

참여연대를 비롯한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의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은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참여연대로서도 대대적인 캠페인을 진행하며 입법청원을 준비했지만, 우리나라 입법 역사에서도 시민사회가 주도해서 법안을 제안하고 입법에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부패방지법을 처음 제안하고 만들어 낸 것도, 국회를 압박하고 움직여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힘이었다.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은 그 뒤에 이어진 다양한 시민입법운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비록 2001년 통과된 부패방지법과 돈세탁방지법은 함량미달이었지만 이후 지속적인 개정운동으로 수차례 개정되었다. 2011년에는 공직자 외에 공공기관 이외의 부정부패와 범법행위에 대한 신고를 보호 포상하는 공익신고자보호법도 별도로 제정되었다. 특별검사부인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를 별도로 입법화하자는 논의가 2001년 이후 지속되어 왔지만, 결국 2014년 상설특검제라는 이름의 사실상은 특별검사 임명 절차의 상설화에 관한 법안이 제정되는데 그쳤다. 돈세탁방지법에는 고액현금거래보고제도가 포함되었고,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되어 퇴직 후 취업제한 규정 등이 강화되었고, 이른바 유병언법이라는 이름으로 돈세탁방지법인 특정범죄수익은닉규제법 등이 일부 개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패방지제도는 미비한 점이 너무 많다. 부패방지위원회가 국가청렴위원회로 바뀌고 또다시 국민권익위원회로 바뀌면서 독립적부패방지기구의 위상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다. 위원회는 아직 직권조사권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부패방지법 제정을 추진한 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와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동안 국회에서 외면받고 있다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제정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부정청탁금지법(소위 김영란법) 역시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마련했던 부패방지법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제대로 된 부패방지법을 제정하여 총체적 부패공화국인 대한민국을 변화시키고, 부정부패한 사회를 맑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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