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585] 납작해진 불평등 담론을 입체화하기 위하여

납작해진 불평등 담론을 입체화하기 위하여

‘분배정치 시즌 2’를 향하여

 

김공회 경상국립대 교수

 

불평등은 이제 우리 시대의 중심 화두로 자리를 잡았다. 대중적인 담론계에서나 학계에서나, 이젠 불평등을 말한다는 것만으로는 그 화자가 ‘진보’임을 드러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만큼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되었다는 뜻이겠다.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해도 이것은 상전벽해 같은 변화다. 경제의 성장과 개인의 발전을 위해 불평등은 필요불가결하다는 주장이 횡행했었으니 말이다.

 

불평등의 부상과 함께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정권 탄생의 산파가 되었던 만큼,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은 문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대단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문 정부는 이 과제를 충실히 수행했는가? 과연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은 줄어들고 있는가?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불공정에 대한 성토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면 문재인 정부는 실패한 것인가?

 

이런 평가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평등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어려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요즘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이것이 필요하다’라고 명확히 말하는 사람을 보기가 어렵다. 불평등을 문제 삼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불평등의 실체도 모호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인 경험이기는 하지만, 그간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구해온 학자들 몇몇으로부터 ‘불평등, 몰라요’라는 토로를 최근 들어 수차례 들었다.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많아지고 있는데, 우리는 왜 더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일까?

 

어찌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는 느낌,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평등에 관한 한, 그것이 점점 더 애매모호해지는 데는 매우 명확하고 강력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환원주의다―요즘엔 이걸 ‘납작하게 만들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득)불평등’이 내포하는 환원주의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불평등은 거의 모두(!) 소득불평등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불평등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소득뿐 아니라 자산, 성, 인종, 세대, 직업, 고용형태, 출신지역, 학력 등―이러한 요인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상이한 불평등들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서로 섞이기 어려운 특수한 면모도 제각기 가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이런 불평등들이 소득의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고, 그 정도도 점차 심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모름지기 ‘자산’이라는 거창한 이름은 시야가 탁 트인 1만 평 정도의 땅 같은 것에 붙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요즘은 저 시골 어귀의 1만 평보다 서울 강남의 1평이 더 좋은 대접을 받는다. 왜 그럴까? 자산 규모를 재는 단위는 토지의 면적 따위가 아니라 자산의 화폐가치이기 때문이고, 아무리 작아도 강남의 땅은 그 소유자에게 상당한 소득을 안겨주지만 시골의 야산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화폐가치가 낮고 소득을 안겨주지 않는 자산은 자산으로 취급받지도 못한다. 그러니 빈털터리인 당신이 고향집 뒷산을 통째로 사들인다고 해도 우리나라 자산불평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불평등들도 마찬가지다. 과거엔 남성과 여성 간의 차별이니 불평등이니 하면, ‘왜 여성에게만 커피를 타게 하는가?’ 따위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곤 했다. 요즘은 어떤가? 온통 성별 임금격차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젠더불평등=성별 임금격차’라는 등식이 당연시되고 있다. 똑같은 얘기를 비정규직 차별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어떤 차별이 있더라도 돈만 많이 받으면 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돈만 똑같이 받으면 차별이 없다고 해도 좋은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돈을 똑같이 받더라도, 소득으로 직접 환산되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이 어떤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금전적으로 받고자 한다. 이를테면 남성은 군복무, 여성은 출산이나 가사노동, 비정규직은 해고의 용이성에 대해 추가적인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식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환원주의의 한 면모다. 상이한 질을 갖는 다양한 불평등들을 소득불평등으로 환원하니, 각각의 불평등의 해결도 ‘돈’에서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식의 환원이 얼마나 가능할까? 군복무제도가 문제라면 그것을 그 자체로서 다루면 안 될까? 여성이나 비정규직에게 가해지는 온갖 억압들도 제각각 그 자체로서 다루는 게 낫지 않을까? 억압이 사라지면 소득격차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축소되어 그것을 애써 사회적으로 문제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순 없어요.’ 일찍이 비틀즈는 노래했다(‘Can’t Buy Me Love’).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억압과 차별이 돈으로 만회되겠는가.

 

분배정치의 본격화와 그 귀결

 

잠시 돌이켜보자. 왜 애초에 소득불평등이 그렇게 빠르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인가? 단순히 소득격차가 심각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각각의 사회문제들을 그 자체로서 제기할 수 있는 대중과 시민사회의 역량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돈만 좀 쥐어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최근 보이지만, 그것으로 재벌문제 같은 우리 경제의 고질병을 어떻게 치유한단 말인가. 상이한 문제는 상이한 방식으로 접근함이 바람직하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경우엔 결과적으로 모든 역량을 ‘소득불평등’에 집중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렇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불평등 해소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적극 받아 안고자 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문 정부가 경제정책 영역에서 불평등 문제의식을 수용한 방식이었다. (재)분배를 통한 불평등 해결이라는 인기 없는 화두를 ‘성장’이라는 정부 경제정책의 최고목표와 연동시킨 것이다. 지지율이 높았던 초기엔 최저임금 인상 등 과감한 정책들이 나오기도 했으나, 얼마 뒤 강력한 역풍을 맞고 개혁 기조 자체가 휘청이기도 했다. 어쨌든 이렇게 문 정부는 높은 지지율 속에서 한국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분배정치―그러니까 ‘선성장 후분배’의 그 ‘분배’―의 시동을 걸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사회의 모든 역량을 ‘소득불평등’에 집약함으로써 일정한 개혁의 조건은 만들 수 있었으나, 막상 소득불평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해보자고 ‘판’이 깔리자마자 거기 뭉뚱그려져 있던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각각의 고유성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실제로 처음에는 주로 기득권층으로부터 불어왔던 역풍의 양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복잡해졌다. 정책의 수혜층으로부터도 다양한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점차, 불평등―즉 ‘소득불평등’―의 양극단 간의 갈등뿐 아니라 상대적 저소득층 내의 다양한 집단들 간에도 다양한 갈등들이 하나의 난맥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났다. 최근 ‘공정성’이라는 표제 아래 뭉뚱그려지고 있는 논의들은 대개 그런 갈등들에 대한 것이다.

 

납작해진 불평등을 입체화하기―분배정치 ‘시즌 2’를 향하여

 

지금까지 문 정부가 이런 갈등들을 만족스럽게 조율해왔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상세한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평가가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기 위한 것이라면, 그간 ‘소득불평등’이라는 문제의식에 불가피하게 집약되었던 다양한 갈등들의 고삐가 문 정부 기간에 풀렸다는 사실만큼은 무겁게 인지되어야 한다. 주어진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내적 복합성을 드러내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우리 앞의 갈림길은 다음 두 가지다. 지금 이 사회 곳곳에서 분출하는 저 성난 갈등들을 적당히 봉합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거기 맞설 것인가. 방향은 명확하지 않은가?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불평등, 그러니까 ‘소득불평등’ 문제의식만으로는 진전이 어렵다. 그러니 소득불평등에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이상 그 다양함을 ‘소득’으로 찌부러뜨려서도 안 된다. 이제 그것들을―그것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에 주목하면서도―각각 고유한 것으로써 다루어야 한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다채로운 사회적 담론들을 생산해야 하고, 사회적 의식을 배양해야 하며, 그 결과 무너진 우리의 ‘사회’를, 그리고 다양한 부문의 사회운동을 재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문 정부 기간에 첨예화된 다양한 사회갈등들은 적어도 이 정도의 조건은 갖춰져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문 정부가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분배정치’가 ‘시즌 2’로 돌입할 수 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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