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시민교육 2008-11-28   7635

투쟁으로 바로 세운 미국 헌법의 역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는 국민주권이 광장의 시민에게 있음을 알리는 거대한 울림이었습니다. 이러한 울림을 이어받아 참여사회연구소는 11월 6일부터 27일까지 총 4회에 걸쳐 ‘헌법, 광장에 서다’ 강좌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번 강좌는 그동안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헌법을 시민의 눈으로 읽어보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많은 관심 감사드립니다.

[참여사회연구소 기획강좌]
헌법, 광장에 서다





제4강 민주주의와 인권을 바로 세운 해외의 판결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노예제 존치와 폐지를 둘러싼 남북전쟁, 민권운동, 적극적평등 조치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은 점차 인종통합을 이루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인종분리에서 인종통합으로 가는 긴긴 과정 속에서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은 투쟁의 과정이었고, 합헌과 위헌이 반복되는 법적 논거 간의 대결의 과정이었다.
인종문제 뿐만이 아니라 양심, 종교, 표현, 신체(낙태 등)의 자유 등 대부분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사안들에 대한 헌법적 판결이 때로는 인권을 신장시키고, 또한 때로는 인권을 거꾸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인권과 기본권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이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투쟁의 요구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겠다.

1. 미국식 사법적 입헌주의의 확립

보통 미국 사법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것이 바로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 Mabury v. Madison, 1803)이다(*표시를 클릭하시면 관련 글을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연방의회가 만든 법률을 포함한 어떤 법률도 상위법인 연방헌법에 위배되면 무효라고 하였다. 연방대법원이 위헌법률심사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회는 이 판결이 내려진 후 임명된 권력에 불과한 대법원이 위헌선언을 했기 때문에 분노했다. 그러나 삼권분립의 구조 속에서 사법심사제도(Judicial Review)가 인정되고, 고차법(higher law), 근본법(fundamental law)로서 헌법의 존재가 승인되었다.

다트마우스 대학 대 우드워드 사건(Trustees of Dartmouth College v. Woodward, 1818)은
미국 독립 전후 발생한 재산권 분쟁이었다. 뉴햄프셔주는 미국 독립 이후 사립대학인 다트마우스 대학을 공립대학으로 전환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연방법원은 계약이 이행되고 존속되는 근거는 기본권이기 때문에 의회에서 함부로 박탈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계약에 관련해서는 정치적인 다수파가 함부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차법을 알고 있는 법원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국법(law of the land)에 의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않으며, 이 국법은 의회가 제정한 법이 아니라 보통법을 의미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 이후로 미국식 사법심사제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합헌 vs 위헌 판결의 역사: 양심의 자유, 인종문제, 신체의 자유

1) 양심(종교)의 자유

마이너스빌 학교 교육위원회 사건(Minerseville School District v. Gobitis, 1940)은 공립학교의 모든 재학생에게 국기배례 행사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는 데에서 발생했다. 당시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던 학생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였고 학교는 이들을 퇴학조치를 하면서 종교의 자유와 국기에 대한 경례 문제는 사회적 화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시민은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만을 이유로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책무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하였다. 즉 국기 배례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며 합헌이라고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뒤 서버지니아주 교육위원회 사건(West Virginia State Board of Education v. Barnette, 1943)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국기배례와 충성서약은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국기는 국가에 대한 상징이며 그것을 법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그 다수의 합의를 소수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그 상징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도출하는 가는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었다. 한교수는 이 사건은 “기본권문제는 국가적 통합문제 이전에 다수자로터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 다를 수 있는 권리는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권리의 요체는 현존하는 질서의 핵심에 관련된 것에 대하여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였다.




2) 인종문제

드레드 스콧 대 샌포드 사건(Dred Scott v. Sanford, 1857)은 노예제 존지/폐지를 둘러싼 남북 대결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남북은 북위 36도를 기준으로 노예해방 여부를 합의하였는데, 드레드 스콧은 주인을 따라 미주리-일리노이-위스콘신-미주리로 이동을 하였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변호사들은 드레드 스콧이 노예제가 금지된 일리노이와 노예제도가 불법인 위스콘신주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자유신분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연방대법원은 흑인은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미국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에 제소할 권리가 없으며, 노예는 재산이기 때문에 주법으로 인한 재산의 침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 판결을 계기로 남북 간의 정치적 대결은 극에 달했고, 남북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5년간의 남북전쟁 이후, 1868년 평등조항이 포함된 수정헌법 14조가 통과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남부의 여러 주의회는 공공 운송수단에서 ‘유색인'(有色人)으로부터 백인을 분리시키는 법률들을 통과시켰다. 백인과 흑인이 동등한 존재로서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러한 인종차별원칙은 학교·공원·공동묘지·극장·식당으로 확산되었다. 1890년 루이지애나주 주법으로 백인/흑인을 구분하는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 열차시설을 규정하였다.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 Plessy v. Ferguson, 1896)은 7/8의 백인피와 1/8의 흑인피가 섞여 있는 혼혈인 플래시가 백인 열차칸에 있다가 유색인종 열차칸으로 옮겨가라는 차장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건이다. 1심에서 유죄판결이 나왔다. 그는 열차칸의 인종분리는 수정헌법 13조와 14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항소했다. 이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분리하되 평등한’ 시설이라면 인종을 분리해도 평등조항에 위배되지 않으며, 열차칸을 구분하고 있던 루이지애나 주법을 합헌이라고 판시하였다.

앞선 플래시 판결로 인해 미국사회는 58년간 ‘분리하되 평등한’이라는 원칙 하에 인종차별이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브라운 사건(* Brown v. Board of Education of the City of Topeka, 1954)에서 판결은 뒤집혔다. 이 사건은 초중등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을 이유로 한 흑백분리교육이 평등권을 침해했다고 소송이 제기된 사건이었다. 1953년 당시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던 마샬 변호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관련된 문제의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130명의 헌법 전문가와 사회과학자들을 소집하여, “유색인종 아동들에게 인종분리를 강요하는 것이 그들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인종에만 근거한 공립학교의 분리교육이 유형적 요소에서 평등하다 하더라도 무형적 요소에서 수정헌법 14조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판시하였다. 그간 ‘분리하되 평등한’이라는 법리에서 ‘분리하면 무조건 불평등’이른 법리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 판결에 의거하여 공원·공동묘지·극장·식당에서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해서도 무효선언이 확산되었다.

3) 신체의 자유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들었던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라는 미란다(* Miranda v. Arizona, 1966)원칙은 Miranda라는 사람이 강도강간죄로 체포되어 경찰의 취조에서 스스로 자백하였으나, 수정헌법 5조의 자기부죄금지, 6조의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였다고 판단되어 풀려난 사건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신체의 자유와 관련하여 로 대 웨이드 사건(Roe v. Wade, 1973)이 있다. 이 사건의  판결에 따르면, 낙태를 처벌하는 대부분의 법률들은 미국 수정헌법 14조의 적법절차조항에 의한 사생활의 헌법적 권리에 대한 침해로 위헌이다. 이로 인해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미국의 모든 주와 연방의 법률들이 폐지되었다. 이 사건의 판례는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 중 역사상 가장 논쟁이 되었고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판례중 하나가 되었다.
 
 3.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앞선 강의들에서도 이야기되었듯이, 헌법은 애초부터 정치적이며, 헌법판단은 더욱 더 정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과거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 사실이 다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법적) 원칙이 될 수도 있었고, 또한 그 반대로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하려는 판결에 의해서 과거의 인종차별을 정당화해주던 원칙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도록, 더 이상 그것이 사회적 사실이 아니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헌법의 역사는 단지 연방대법원의 판례에 의해서만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고, 보다 올바른 원칙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 세워졌다. 미국의 많은 아동들이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도록 마샬 변호사는 전국을 돌아다녔고, 사람들을 모아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 원칙이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많은 생각과 질문들이 떠올랐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대한국민에게 헌법이란 무엇인가? 국가는 헌법에 의해 우리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는가?  국익, 국가안보의 명목 하에 우리가 모른체 하고 있는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는 없는가? 누군가와 다르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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