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학술행사 2009-06-22   6318

[토론문] 다시 6월의 광장에서 : 대한민국 정치 새판짜기의 몇가지 과제

                  다시 6월의 광장에서 :  대한민국 정치 새판짜기의 몇가지 과제
             
               

1. ‘다이나믹 코리아’ 민주주의의 열린 변증법과 오늘의 6월

누가 한국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했던가. 시성(詩聖)으로 불리기도 했던 사람이었으니, 그가 그 때 그 시절 결코 헛 것을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성에 대해서는 신성모독이 될지 모르지만 대단히 왜곡된 눈임에 틀림이 없다. 더군다나 우리 시대 대한민국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와는 판이하게 다른 형국이다. 손에 손잡고 거대한 봉우리로 솟아 올랐던 87년 그날의 6월 항쟁이후 이제 22 돌을 맞는 오늘의 새로운 6월에, 대한민국 정치의 새 판짜기를 놓고,  ‘소통·광장’의 ‘우리들의 대한민국‘이냐, ’불통 · 산성‘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냐를 둘러싸고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는 이 흥미로운 나라는 들끊는 정오의 태양 같은 나라,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나라라고 해야 어울린다. ‘다이나믹 코리아‘가 여기에 딱 들어 맞는 말이다. 다이나믹 코리아, 이는 코리아의 정치,경제, 문화적 삶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당면 주제는 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다이나믹 코리아 민주주의‘의 모순적 동학, 그 열린 정치 변증법과 오늘의 과제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주로 거꾸로 가는 이명박 정부 시기의 상황과 그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향에 대한 것이다.

1년 전 우리 국민들은 ‘국민을 섬기고’ ,‘경제를 살리고’, ‘선진화’를 이루겠다고 장담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민국호의 키를 잡는 기회를 쥐어 주었다. 한 때 진보 개혁 진영 일각에서는 보수의 장기 집권을 우려하는 사람 조차 있었다. 그러나 그 누가 미리 알았겠는가, 이 정부의 배반을. 이명박 정부의 대책없는 폭정( 暴政)이 오늘날과 같이 민생, 민주주의 그리고 남북 평화 협력에서 삼중 위기를 초래하여 대한민국의 시계 바늘을 완전히 거꾸로 돌려 놓을 줄을. 그리고 마침내 이 폭민정부의 난정(亂政)이 극에 달해 그 비열한 ‘정치 보복’ 행위가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을 가져 올줄, 그리고 그 죽음이 다시 보수와 진보 개혁의 새로운 역전의 디딤돌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한민국사에서 보수와 진보 개혁 사이, 역진과 전진의 다이나믹한 정치 변증법은 오묘하기만 하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22년 전 그날의 6월과 오늘의 6월의 양상은 퍽 닮았다. 결코 양보하지 않으려 하는 두 개의 힘, 역진(逆進)의 힘과 전진(前進)의 힘이 다시 부닫치고 있다. ‘불통 정글 코리아’로 역주행하는 바리케이드의 저쪽은 꽉 막힌 산성, 차벽 뒤에 숨어 서서히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중이다. 이 쪽은 다시 손에 손을 잡고 더불어 사는 광장의 대한민국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는 똑 같은 일조차도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나. 하물며 ‘다이나믹 코리아’ 민주주의의 변증법이 단순 반복 운동으로 그칠 수가 있겠는가. 그 어떤 연대의 힘과 지혜가 불투명으로 가득찬 오늘 새 6월의 안개를 훤히 걷어 내게 할 수 있을까.

2. 이명박 정부의 적대적 분열주의와 불통 정글 대한민국

지난날 총칼로 무장하고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인 학살, 고문과 치사, 의문사를 자행하고 온갖 감시와 처벌망을 동원하여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을 억압하고 국민의 눈과 입과 귀를 틀어 막으려 했던 군부 독재 정권도, 상당한 경제적 실적에도 불구하고, 도도한 민주화의 열망을 막지 못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22년전 전민적 6월 항쟁에 대해 지배 세력은 6.29 선언으로 대처했다. 이명박 정부의 운명은 어떤가.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 통합을 주도하기는 커녕 극단적으로 두 국민 분열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를 소수 강/부자 집단과 중앙, 수출 대재벌, 부동산 투기꾼은 살판나지만, 대다수 서민· 중산층, 비정규직, 자영업자, 중소기업, 지역은 죽어 나가는 ‘정글 자본주의’로 개악하고 있다. 노동을 위기로 몰아 넣으면서 동시에 낙후된 사회 복지조차 후퇴를 서슴치 않고 있다. 오늘날 미국발 ‘정글 자본주의 위기’의 세계화 시대가 주는 교훈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합리적 규제마저 마구 풀어 제치고 있다. 이 나라는 국민들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글 대한민국’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삶의 전반적 불안감과 위기감이 대한민국을 엄습하고 있다.

이 정권은  ‘정글 대한민국’에서 ‘더불어 사는 대한민국’으로 전환을 요구하는 다수 국민을 마치 잠재적 폭도처럼 간주하는 발상과 대응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찰, 검찰을 앞세워 광장을 틀어 막고 집회, 결사, 표현의 기본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그리고 6.15 남북 정상 회담을 분수령으로 평화 공존과 화해 협력 시대로 전진하고 있던 남북관계를 냉전반공주의 시대와 다름없는, 시대 뒤떨어진 대결과 적대 관계로 되돌려 놓고 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 모두에서, 겨우 아물기 시작한 오랜 분열과 대립의 상처를 다시 갈기 갈기 찢어 놓고 난도질하는 이 극단적 분열주의 정권, 천민적 패거리 정권에 의한, 민생 · 민주 · 평화를 거스르는 퇴행적 역주행은 지속가능할 것인가. 이명박 정부는 이미 작년 2008년 촛불 항쟁과 대면하여 자기 학습과 혁신을 위한 귀중한 기회를 잃어 버리고 지속 불가능한 보수의 길로 빠져 들었다.

공존(共存), 공생(共生) 그리고 공감(共感)의 가치를 알기에는 불행히도 너무 눈이 작고 눈이 멀은 이 정부의 적대적 분열주의는 마침내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라는 대한민국사상 유례없는 비극적 사건을 초래했고, 감당하기 어려운 업보를 받았다. 이에 따라 이 나라의 보수가 보수 (補修)해야 할 숙제가 참으로 무겁다. 그렇지만 바보 노무현의 비극적이며 운명적인 죽음으로 숙제를 받은 것은 단지 이 나라 보수만은 아니다. 진보  개혁 쪽도 비판적 성찰을 통해 거듭나 새롭게 진보( 進步)해야 할 큰 숙제를 안게 되었다.

3. 보수, 주류의 과제

대한민국 정치 새 판짜기에서 무엇보다 우선돼야 할 큰 숙제는 보수가 거듭나는 일이다. 대한민국 정치의 재창조는 이명박 정부와 주류 보수의 결자해지 ( 結者解之 )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할 일이 매우 많다. 그는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책임있는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또 이 사건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검찰, 국세청, 그리고 언론의 행태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를 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당연히 책임있는 인물들의 퇴진을 포함한 인적 쇄신과 제도 개혁이 있어야 하며, 국정 기조에서 발본적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수사에 성역은 없다고 해 놓고, 표적 수사, 편파수사, 범법적인 공표 수사를 감행함으로써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정치검찰‘의 책임과 개혁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검찰이 흘리는 수사 내용을 받아 쓰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악의적인 보도를 일삼아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의 공모자가 된 보수 언론의 일대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번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극적 서거는 보수 세력이 비주류 전직 대통령을, 나아가 비주류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한국정치에서 오랜 뿌리를 갖고 있는 적과 나의 흑백 이분법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피의 보복과 국가 폭력으로 얼룩진 이 야만적 광기는 냉전 반공주의 한국현대사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참여정부 시기 잠시 치유됐던 그 광기를 이명박 정부가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들끓고 있는 다수 국민과 시민사회의 국정 쇄신 및 “소통” 요구에 대해 “쇄신은 없다”라며 다시 한번 ‘불통’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는 통(通)자, 공(共)자와는 도통 인연이 없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이런 ‘지속불가능한 불통 보수’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단지 이 정부의 불행만이 아니다. 보수 전반의 불행이다. 그리고 나의 생각으로는 이는 대한민국 전체의 선진적 정치 발전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수더러 진보가 되라고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보수로부터 시민=서민적 진보의 발상, 즉 민(民)이 나라의 주(主)인이 되어 평등한 참여의 권리와 공정한 분배 권리를 가지며 온/ 오프에서 자유로운 소통의 광장이 열릴 때, 더불어 사는 그 역동적 활력의 시너지 효과로부터 비로소 선진 민주-공화국,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의 길이 열린다는 생각까지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수는 보수( 補修)를 해도 여전히 보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는 정치적 상대를 인정하고, 패배자도 정치 공간에서 살아 남을 수 있도록 넉넉히 용인하는 기본 합리성과 관용, 다시 말해 공존의 윤리를 갖고 있으면서 유능한 보수, 즉 ‘선진 보수‘로 발전해야 한다. 부자 증세를 주장하는 보수 정도는 돼야 한다. 그래야 진보 개혁에도 자극을 주어 서로 생산적으로 경쟁하며 시너지를 내는 정치 체제, 다시 말해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공존, 경쟁하며 활력을 주는 대한민국 정치의 선진적 신질서가 만들어 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비극은  ‘적대에서 공존으로’ 대한민국 정치 윤리의 재생, 보수와 진보 공존의 정치 윤리를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 전반의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도대체 합리적 보수는 있는가.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 가치’는 과연 어떤 것인가. 대한민국의 합리적 보수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책임과 새로운 혁신을 요구받고 있다.

4. 진보 개혁의 과제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 이후 진보 개혁이 갖게 된 과제가 실로 막중하다. 나는 짧은 시간, 바보 노무현이 몸을 던져 이명박 정부의 대책없는 폭민정치와 역주행에 대해 방패 막이 역할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이나믹 코리아’의 정치 변증법대로 노무현의 죽음과 부활이후 정치 판도는 상상 이상으로 급반전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율은 20% 초반대로 떨어 졌고, 놀랍게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역전되었다. 이같은 민주당의 ‘기사 회생’은 열린 우리당 시절이던 지난 2004년 이후 약 5년 만의 일이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현상은 민주당의 기사 회생적 역전과 더불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율도 ‘동반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지만, 위기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 민주 진보의 나무는 바보 노무현이 흘린 피로 다시 기사 회생한 꼴이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갑작스런 외부 수혈이라는 것, 자력 회생이 아니라 타력 회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 개혁의 새로운 성찰의 노력없이는 ‘노무현 효과’는 단기 거품처럼 쉽게 꺼지고 다시 민심은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 이 뜻밖의 역전과 동반 상승을 일시적인 정치 거품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튼튼한 자력 성장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 중차대한 과제다.

불안한 지점들은 매우 많다. 추모기간중 직접 조문한 사람만 해도 500만에 달하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의 이런 추모 행렬이 곧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지지와는 무관하게, 아니 심지어 정치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추모한 사람들도 매우 많다. 정치경제적 사안으로 들어가면 죽은 노무현으로 모여 들었던 그 추모 행렬은 뿔뿔히 흩어진다. 이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 반MB연합, 이명박 정부 저항연합을 같이 하자고 해보라. 잘 안될 것이다.

보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다이나믹 코리아‘ 정치는 그 성질상 매우 이중적이다. 좋은 의미로는 정체돼 있지 않고 활력이 넘치고 역동적(dynamic)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달리는 냄비끓듯이 변덕스럽다(volatile)는 측면,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이는 제도와 주체 모두에서 민주적 정치 자산의 축적이 안정적으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만큼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레이코프가 말한 ’프레임의 정치‘가 잘 먹히는 데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유동적인 주체 조건상 유럽식 사민주의 정치가 정착하기가 참 어려운 곳이 한국이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때 유럽식 사민주의는 노동쪽의 정치적 역량이 높고, 사회적 신뢰자본의 수준도 높은 조건위에서 발전해 왔는데, 한국은 이 둘 모두가 결여되어 있다.

다이나믹 코리아 정치의 변덕스러움은 시장의 시대에 와서 민주 진보에 특별한 난점을 가져다 주었다. 즉 “강남 사람들은 철저하게 계급의식을 갖고 있는데 반해 강북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특권 기득권 집단은 냉전 반공시대이래 민주화와 시장화 시대에 와서도, 아니 더욱 더 공고하게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참으로 충실하다. 그러나 대다수를 이루는 80은 원자적으로 흩어져 승자독식 시장의 바다에서 약육강식 경쟁에 몰입함으로써, 자신들의 중장기적 이해와 더 좋은 삶에 대한 욕구를 저버리고 쉽게 눈앞의 ’욕망의 정치‘와 근시안적 투기 경제의 포로가 된다. 따라서 민주 진보가 80의 서민 대중에 더불어 사는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비전과 머리와 몸 전체를 아울러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프레임의 정치, 그리고 대안적 정책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역전의 ‘노무현 효과‘는 일시적 거품으로 꺼지고 보수의 역주행 시대가 지속되고 말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가 곧 보수의 전반적 실패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어떻게 이 땅의 진보 개혁 세력은 바보의 피로 얻은 기회를 유실하지 않고  소통, 서민성 그리고 진정성의 새 정치를 펼쳐, 서민 대중이 이성과 감성 모두를 아울러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 진보’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민주 · 민생 · 평화의 세 바퀴 진보로 가는 길을 선도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바보 노무현이 피로 물려준 자산을 ‘사익화’해서는 안된다. 노무현 효과를 전국민적 정치자산으로 확장하는 창조적 연대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나는 이것이 특히 노무현 효과를 자기 것으로 가두어 가져 가려 할 공산이 높은, ‘친노‘ 세력과 민주당이 경계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진보 개혁 세력이 거듭나려면 노무현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노무현이 죽음으로써 그의 실패도 죽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노무현의 부활은 결코 노무현의 실패의 부활까지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의 6월이 22년전의 6월과 같을 수는 없다. 단순히 ’제 2의 노무현‘이라면 그의 실패도 반복할 것이며, 그 실패는 제 2의 이명박의 등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민주당은 반성적으로 거듭나야 하며 어설픈 ’뉴민주당‘ 플랜이 길은 아니다.

셋째, 그러나 한국의 진보 개혁 세력은 바보 노무현이 이성적 소통과 감성적 서민성의 양면에서 보여 준, 그 복합적 공감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으로 지키고자 한 진정성의 윤리에서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그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진보 개혁 진영전체, 특히 노무현 효과의 반사 이익을 같이 얻은 ‘진보 좌파‘가 숙고해야 할 지점이 될 것이다.  ’진보 좌파‘는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은 구별해야 한다는 식의 손쉬운 논의에 안주해 있을 것이 아니다. 매우 안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전에 민노당이 권영길과 심상정 경선으로 보여준, ’영리‘하지만 낡은 모습과 ’바보‘ 노무현의 죽음을 잘 한번 비교해 보라. 이념과 정책의 차이를 떠나서 우리 국민이 누구를, 어떤 리더십을 더 신뢰하고 지지하겠는가.

노무현 현상과 효과에는 어떤 리더십이 유난히 변덕스럽고 정치적 충성심도 약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민주공화국의 새 리더십인가 하는 문제가 걸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내가 줄 곧 지적해 왔지만, 진보 좌파는 왜 노무현 효과가 민주당과 두 진보 정당의 ’동반 상승’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500만을 움직이고 정당지지도까지 뒤집어 놓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는가. 노무현 전대통령에게는 있었으나 현재 진보진영에게는 없는 것은 무엇인가. 진보진영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자성이 요구된다.

5. ‘새 6월의 정신’으로 : 87년 체제는 죽었다, 그러나 또한 살아 있다.

만약 대한민국 정치 새판짜기를 선도할 새로운 진보가 탄생한다면, 이는 아마도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교훈, 즉 노무현과 함께 노무현을 넘어서야 한다는 교훈을 자기 것으로 하는 쪽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민생 민주 평화의 세 바퀴로 가면서 소통 · 서민성 · 진정성의 윤리로 무장한 새 진보의 길은 반MB의 광범한, 창조적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 연대는 그 주도권을 둘러싼 헤게모니 경쟁을 동반한다. 또한 그 새로움의 진보는 제도 정치와 광장정치의 ‘ 이중 민주주의’의 사고와 그 두 바퀴를 미묘하게 연결하는 새로운 지혜도 요구한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87년의 특정한 민주화 체제는 죽었다. 이른바 87년 체제는 그 자체 구체제와 타협으로 성립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주화에 반(反)하는 ‘국가 후퇴’ 및 자유화의 인자도 내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97년을 새 전환점으로 하는 전면적인 경제적 자유화 체제에 의해 형식화되고, 공동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원리 및 제도를 통한 사회발전의 방식, 주체 ·삶의 영역·제도 그 모든 면에서 인권 신장, 참여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확대 심화, 그 질(質)의 고도화로 나아가는 민주 발전의 기본양식은 87년을 분수령으로 회귀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렇게 ‘87년 체제’를 한편으로 특정 시기 한정적 내용을 갖는 불안정한하고 과도적인 민주화 체제 , 다른 한편으로 민주 발전 원리 및 그 잠재력의 장착이라는 두 수준이 중첩된 ‘헤게모니 체제’로 파악할 때 87년 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말이 가능해 진다. 그리고 97년 이후 10년 시기를 시장 자유화 일색으로만 보지 않고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도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민주화와 자유화의 모순적 동학, 그리고 적대적 분단과 평화 통일간의 쟁투에 의해 규정되는 ‘87년 체제’의 현단계에서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과 마주하며 ‘불통 정글 코리아’를 넘어서기 위해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천 |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6월 9일에 개최한 ‘6월항쟁 22주년 기념 학술대토론회: 한국민주주의와 87년 체제’에 제출된 토론문입니다.

토론문_이병천 참여사회연구소 소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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