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권두언_불통 권력의 불안정, 진보 희망의 좁지만 넓은 문

불통 권력의 불안정, 진보 희망의 좁지만 넓은 문
: 차이와 성찰위에서 상생의 연대로

이병천•홍윤기 (공동편집인)


불통즉통(不通則痛)의 대한민국

또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 왔다. 현정부 집권 이후 우리는 두 차례 뜨거운 여름 그리고 또 겨울에도 한차례 뜨거운 시간을 보낸 바 있다. 여름철에는 6.10 항쟁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촛불항쟁이 노도와 같이 솟아 올랐다. 이어서는 97년이후 민주 정부 10년을 대표하는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긴 애도의 행렬을 잇게 했고, 대한민국을 슬픔과 분노의 도가니로 들끓게 했다. 그 와중에 보수 세력은 헌법재판소에서 ‘절차는 위법이었지만 효력은 합법이다’라는 해괴한 판결이 내려진 미디어 악법을 불법적으로 통과시켰다. 또 겨울철에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 등 6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용산 참사 사건이 우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사법부는 수사 기록 3천 쪽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용산참사 피고인들 전원에 대해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다시 한번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보여 주었다.

이번 겨울에는 또 어떤 소식이 전해 올지 자못 궁금하고 불안하던 차였다. 드디어 이 삽질⦁ 불통 정부가 낙동강 영산강으로부터 이 나라 생명의 큰 물줄기인 4대 강 ‘죽이기’사업의 파괴적 삽질을 개시했다. 게다가 공공기관 ‘선진화’라는 이름 아래 철도 노조를 위시한 공공 부문 노조에 대해 헌법에 보장된 단체 행동권까지 부정하며 불법과 부당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철도노조 파업은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 절차와 조합원 찬반 투표를 거쳐 분명히 합법 요건을 갖추었다. 그런데도 취임 전부터 노조와 파업을 불온시하고, 스스로 불온한 생각을 가졌던 현대 건설 최고경영자 출신의 대통령은, 취임때는 국민 섬기기, 국민 통합 운운하더니, 파업진압 사령관이 되어 철도노조가 파업을 시작하기 전 부터 미국 ‘레이건 모델’을 전범으로 들며 강경 대응의 결의를 다졌다. 철도공사 파업, 한국노동연구원 직장 폐쇄, 공무원노조 설립 신고, 노동관계법 협상, 이 모든 문제 들에서 노동세력은 밀리고 있고, 정부와 여권, 재계, 보수 언론은 아주 기세가 등등하다. 어디 그뿐인가. 노무현 전대통령이 돌아간지 불과 몇 달도 되지 않는데, 이 불통 공안 정권은 또 다시 한명숙 전총리에 대해 아직 피가 묻어 있는 칼을 빼어 들었다. 이번에도 벌써 뜨거운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군대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잘 안다. 군대 안에서 시간은 앞뒤로 꽉 막혀 있다. 왠 시간이 그리도 느리게 가는지. 그렇지만 단지 군대만이 군대는 아니다. 혹시 대한민국 전체가 다시 거대한 병영으로 역주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군대 바깥에 있는데도 웬 시간이 이다지도 느리게 가는가. 꼭 창살이 있어야만 감옥인 것은 아니다. ‘창살없는 감옥’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부는 가운데, 촛불은 흔들리고, 흩어지고, 마구 잡이로 붙들려 가고 있다. 곳곳에서 소중한 시민적⦁민중적 진지, 노동의 진지, 학술의 진지들이 거칠게, 야만적으로 불통 보수의 진지들로 재편되고,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불통(不通), 불안, 불만, 불신, 불임(不姙)이라는, 즉 ‘5 불통(不痛)’ 을 겪고 있다.  나라의 다수 구성원들은 단지 ‘창살있는 감옥’만이 아니라 ‘창살없는 감옥’살이를 할 지경이 되었다. 제 눈을 뜨고 깨어 있는 시민들은 어떻게 이 꽉 막힌 불통⦁삽질 보수의 대한민국에 새로운 진보 희망의 시간을 열 수 있을지 잠을 설치면서 답답해하고 난감해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혈이 꽉 막혀 아픈 ‘불통즉통’(不通則痛)의 상황을 기혈이 확 뚫려 아프지 않은 ‘통즉불통‘(通則不痛)의 상황으로 반전시켜 낼 수 있을까.

롤러코스트 정치와 불통권력의 불안정  

그러나 신권위주의, 시장전제주의, 토건개발주의, 투기적 한탕주의 등으로 뒤범벅이 된 포스트민주화시대 보수 우위 대한민국의 시간은 그저 막혀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MB 시대의 막힌 시간도 대한민국에 특유한 롤러코스트 정치의 동학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믿지 못할 구석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여론 조사로 본 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에서도 한국적 롤러코스트 정치의 동학은 잘 나타난다. 대통령 취임 시점에서 현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40% 대였다. 그러던 것이 촛불 정국에서는 10% 선까지 추락했다. 이후 지지율은 대략 20%~ 30% 사이를 유지했다가, 다시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정국에서는 20% 초반대까지 떨어 졌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친서민 중도 실용’을 내세우고, 경기도 회복세로 돌아 서면서 다시 지지율은 50%를 육박하는 수준까지 상승했다. 그렇지만 손석희와 김제동 등 두 정상급 방송인의 치졸한 배제 사건이 있은 이후에는 30% 대로 하락했다. 이 지지율은 취임 때만 못한 것이다. 10.28 보궐 선거에서는 크게 잘 한 일도 없는 민주당이 세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새로 꺼내든 정운찬 새 총리 카드도 기대한 것에 비해서는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바닥에는 이 정부로부터 민심이 이반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우리는 막힌 시간과 동시에 롤러코스트 시간을 살고 있다. 한국의 롤러코스트 정치는 매우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르게는 정체돼 있지 않고 역동적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이런 정치는 종잡기 어렵고 위태롭기까지 하다. 이 조건 속에서는 진보 정치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이에 비한다면 보수는 강고한 ‘집토끼’에 그 이해 기반을 갖고 있다. 게다가 막강한 보수 언론 권력이 불통 삽질 정권을 엄호하고 있다. 그렇지만 보수 또한 안심할 수는 없다. 보수도 방심은 금물이다. 그런 면에서 MB 시대의 시간은 막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또 그 시간은 여전히 보수와 진보의 경쟁에 열려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특유의 롤러코스트 정치가 단지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역동성을 갖고 있고 그래서 꽉 막힌 시간이 아니라 우리 숨통을 트이게 하는 시간, 보수와 진보에 모두 열려 있는 시간이 되게 한다면, 그렇게 하는 동인은 어디서 나오는가? 위에서 본대로 현 정부의 지지율을 오르락내리락 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그 힘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래로부터 시민사회 운동과 이명박 정권간의 시소게임이다. 지난 10년 시기를 좌파 정책 때문에 ‘잃어버린 10년’이 되었다고 평가한 연후에 이 정부가 세운 ‘선진화’ 정책의 기본 골격이란 규제완화, 부자감세, 민영화 등으로 강자와 부자를 더욱 강하고 부하고 살찌게 하면서 다수 국민은 그 떡고물을 얻어먹고 살게 하는 것, 이것으로는 잘 안풀리는 부분은 토건(4대강 사업)과 투기 거품(부동산 규제완화)으로 만회하는 것, 그리고 이런 두 국민 분열주의 전략에 대해 항의하는 ‘불온’ 세력은 폭압적으로 배제, 격리, 또는 박멸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국민 대중을 길들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분열주의, 일방주의, 불통주의로는 안정적 국정 운영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하라고 국민들이 이 정권에 기회를 준 것도 아니었다. 민심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불통 보수의 실패로부터 이른바 ‘친서민 중도 실용’정책이 가미되는 일정한 정책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미소 금융, 보금자리 주택, 등록금 후불제, 기타 임시변통적인 지원책 등을 포함하는 이명박 정부의 ‘중도 실용’을 전적으로 정치적 수사라거나 상징 조작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중도 실용’ 정책의 가미는 뜨거운 여름과 겨울 동안 발생한 대형 사건들, 즉 촛불 항쟁과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민심 이반에 대해 나름대로 불통 보수권력의 위로부터  대응 전략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에 중첩된 나라경제 위기의 심화도 중도적 정책 요소를 미약하나마 첨가하게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공안 통치, 시장전제주의, 토건개발주의, 투기적 한탕주의의 기본 기조 위에 덧붙혀진 ‘중도 실용’이, 단순히 빈말은 아니라 해도, 과연 어느 정도 실질적인 내용과 위상을 가진 정책 변화인지 , 또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중도 실용의 ‘사탕’이 불통 공안 보수의 ‘째찍’과 칼날을 얼마나 부드럽게 다듬어 줄 수 있을까. 이 정권은 앞으로 채찍과 사탕을 양 손에 쥐고 국민을 길들이며, ‘대중적 보수’ 정권으로서 안착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벌써 중도 실용의 ‘실종’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불통 삽질 공안 보수의 정당성 기반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많은 국민들이 11월 27일 밤에 방영된 ‘대통령과의 대화’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오랜만에 국민 앞에 나타난 대통령의 이 ‘대화 아닌 대화’를 보고 다시 한번, 이 정권이 국민 대중의 마음을 얻는 지속가능한 보수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몇 가지 점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먼저, 이 나라의 대통령은 대화와 소통을 한다고 해 놓고서도 국가 백년대계, 역사적 소명을 들먹이며 실질적으로 대화와 소통을 거부하는, 여전히 변함없이 불통 정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잘 보여 주었다. 둘째, 흥미롭게도 여론 조사에서 가장 나쁜 평가를 받았던 ‘부자 감세’부분을 이명박씨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부 관료들의 엉터리 홍보와는 달리, 현 정부의 감세 정책의 실체가 다름 아니라, 부자, 강자를 더욱 부하고 강하게, 살찌게 해서 국민 대중은 떡고물을 얻어먹게 하는 정책임을 스스로 자인했다.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한 부분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그 덕분에 국민들은 이 정부가 과연 무엇을 하려는 정부인지 확실히 잘 알 수 있게 됐다.

 셋째, 4대강 사업의 효과를 왜곡하는 부분은 제쳐 두면 아마 가장 압권은 이 대통령이 높이 쳐들고 흔들어 보인 문건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그는 이전 김대중 정권은 43조원, 노무현 정권은 87조원씩이나 되는 수해방지 대책을 세웠지만, 자신은 22조원 밖에 안되는 적은 돈으로 4 대강을 살리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김대중 정부의 수해방지대책은 하천뿐 아니라 하천 유역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치수계획이었다. 그리고 노무현정부가 세운 ‘신국가 방재시스템 구축방안’은 건교부를 비롯한 9개 부처가 국가방재의 틀을 예방위주로 짜기 위해 마련한 로드맵이다. 홍수 피해가 많은 지방 2급 하천과 소하천 정비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4대강 관련사업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홍수의 대부분은 4대강 본류가 아니라 지천에서 일어나는데, 4대강 사업만 하면 우리나라 모든 풍수해가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황당하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국민을 상대로 일대 사기극을 연출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차이와 연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불통, 불신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통(不通), 불안, 불만, 불신, 불임의 ‘5 불통’(不痛)은 보수의 것만이 아니라 진보의 것이기도 하다. 보수만이 아니라 진보도 대한민국이 불통즉통, 불통즉불임의 시대로 표류하고 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진보 개혁 세력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민주 진보세력이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가 낳은 절호의 반전 기회와 효과를 지속가능한 정치 자산으로 축적하지 못한 것은 정말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민주 진보 세력이 ‘바보 노무현’의 죽음 이후 주요 전략으로 내건 ‘반MB 전략’이라는 부정적 프레임은 반대하고 저항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안적 정치 세력으로 거듭나 국민 대중과 소통, 공감하고 그 지지기반을 확실히 넓히는 데는 실패했다. 반면 지금까지 실컷 험담을 많이 했지만, 불통 보수는 자신들이 범한 과오와 정세 변화를 통해 학습하고 제법 성장했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중도 실용’으로 선회하고 공안 정치의 완급을 조절하는 식으로 대응했고, 그리하여 민주 진보 세력을 곤경에 빠트렸다. 불통 정권이 중간으로 옮겨 올수록 민주 진보 진영은 오히려 더 무력하고 무능해지는 난처한 현상이 빚어졌다. 대중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대안적인 조직 재편도, 연대와 연합정치도, 비전도, 풀뿌리 기반도 희망의 출구는 희미하다.

 어떻게 해야 지금 맞고 있는 ‘5 불통’의 난국을 깨트리고 진보 재구성의 좁은 문, 희망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이대로는 안된다. 그렇다고 우리라고 해서 무슨 뾰족한 묘수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두서없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 민주 진보 진영 내부의 차이, 또는 다양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담론 수준에서 보면, 민주 진보 진영 내부에는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이중 과제라는 데는 일단 공통의 인식을 보이면서도, 성장 친화적 진보론, 진보 보수 개혁 병진론, 전통 사민주의, 제 3의 길(사민주의의 낮은 길), 사민주의의 공화적⦁생태적 진화(사민주의의 높은 길), 다양한 색조의 사회주의 등 여러 갈래들로 나누어져 있다. 이들은 진보대안 가치에 대한 생각, 진보 가치의 현실적 실현가능성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한국사회에 특유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바라보는 생각 등에서 상당히 다르다. 이처럼 보수에 비해 민주 진보쪽이 훨씬 더 분화되어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보수에 비한 이런 차이 또는 분화의 심화는 어떤 면에서 진보의 약점이다. 특히 정치가 아방과 타방의 두 진영으로 선명히 갈리는 국면에서는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차이를 무시하면서 하나로 똘똘 뭉치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동단결은 곤란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 차이에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가치나 욕구, 또는 삶의 양식의 차이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는 너무 한쪽으로 쏠림 현상이 심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구성원들의 가치나 욕구가 대단히 분화되어 있고, 전통⦁근대⦁탈근대의 문제 및 가치들의 중첩도가 높다. 따라서 성원들의 가치나 욕구의 차이는 통합되기 보다는 그 중요 부분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민주 진보의 다양한 가치 또는 욕구들을 어떻게 상호 조율 하고 연계지울 것인가 하는 헤게모니 연합 형성의 과제가 제기된다. 다양한 가치들이 꼭 동등한 가치, 즉 등가(等價)를 가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가치들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것들의 열린 ‘민주적 연쇄’(democratic chains)를 구성하는 것이 새 진보 희망의 필수 관문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그만큼 민주 진보 내부의 열린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헤게모니 구성에는 단지 소통만이 아니라 경쟁과 쟁투가 필수적이다. 이때 ‘민생 민주주의’ 아니 그보다 ‘생활 정치 민주주의’가 한국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상황에 부응하면서 민주 진보 가치의 연쇄를 구성하는 유력한 대항 헤게모니 담론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생활정치 민주는 민생민주를 필수적으로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더 넓은 정치적, 문화적, 생태적 진보의 지평을 여는 담론으로 여겨진다.

 차이를 인정하는 위에서 연대 또는 연합으로 가자, 그것이 불통 보수를 넘어 모두가 사는 길, 상생의 길이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차이를 더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로 보면 연대를 더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대 또는 협력의 이득 때문이다. 협력으로부터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셋, 나아가 열, 백도 만들어 질 수 있다. 알고 보면 이전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보수 우위 시대에는 더더욱 분명하게 민주 진보의 그 어떤 세력도 결코 단독으로는 보수 세력을 이길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됐다. 뿐만 아니라 민주 진보 세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의 벽이 너무 높다. 불행하게도 1997- 2007년간 민주정부 10년의 집권 이후 민주 진보 세력에게는 ‘무능’이라는 딱지가 달라붙었다. 이 무능의 딱지를 떼어내고 불신의 벽을 깨트려 민주 진보가 상생하기 위해서는 연대 또는 연합은 거의 절대 절명의 과제라는 생각마저 든다.

 자기를 여는 성찰적 진보가 희망의 문을 연다

연대의 길로 갈 수 있다면 진보 희망의 문은 넓게 열릴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넓은 문이 열리지 않게 가로 막고 있는가. 진보 희망의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데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 연대의 정치, 더구나 상생을 위한 연대 또는 연합의 정치란 차이의 단순한 산술적 합은 아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셋 나아가 열이 되려면 각 세력은 자신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협력 가치가 생산되고 상생이 되고 국민 대중의 신뢰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 진보 각 세력에 대해 아픈 비판적 성찰의 과제를 요구한다. 성찰적 진보가 진보 희망의 넓은 문을 열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민주 진보의 그 어떤 세력도 이 비판적 자기 성찰의 과제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는 특별히 민주당 그리고  ‘친노’세력에 대해서도, 이들이 ‘바보 노무현’의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을 하고 싶다. 바보 노무현은 자기를 버림으로써 사는 길을 선택했다. 그 필사적 몸짓에서 대한민국인들은 그의 도덕적, 정치적 진정성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죽어도 죽지 않게 된 것이다(死而不死). 그러나 민주당은 기득권을 버릴 줄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너무 자기 밥그룻 챙기는 데만 골몰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민주당과 노무현의 후예들은 바보 노무현만큼 바보스럽지 못하고 그래서 지난 시기에 대해 반성할 줄도 모르는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고집 <진보의 미래>에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반성적 회고를 남기고 있다. 그는 “노동의 유연화, 그것도 우린 할 수 있어”라고 놔버린 게 진보주의의 제일 아픈 대목이라고 고백한다. 또 “분배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분배정부라고 몰매만 맞았던 불행한 대통령이다”라고 하면서,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 내년까지 40% 올려, 그냥 색연필 들고 쫙 그어버렸어야 하는데”라며 지난 날 자신의 모자란 부분에 대해 토로한다. 바보 노무현의 이런 가감 없는, 바보다운 진솔한 고백이야말로 쉽게 등잔불을 건네 받으려하는 민주당과 친노 세력에 대해 등잔불을 꺼버리는 격의 진정한 유지가 아닐까. 죽어서 다시 살게 된 바보 노무현의 바보 정신에서 배워, 기득권을 버리고 성찰적으로 자기를 열어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면 국민 대중의 신뢰를 얻기 어렵고, 상생의 연합 정치도 어려울 것이다.

진보 좌파 정당 쪽은 사실 워낙 고생이 많다. 그들이 가시밭, 형극의 길을 걸어 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수구 진보’라든가, ‘좌익 소아병’이라든가 하는 이야기 정도는 듣지 않도록 좀 더 열린 진보 쪽으로 유연해졌으면 하고 바래 본다. 그래야만 불필요한 고생도 덜고, 국민 대중속으로 더 다가가고, 연대해서 상생하는 수도 나올 것이다. 그리고 시민 사회운동은 자기 분야에서 전문적인, 정교한 개별 정책들을 만드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대담하게 그야말로 ‘새로운 전망을 만드는 큰 그림’을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정치판 새로 짜기에 자기 몫을 다해야 하지 않나 싶다. 지금 시민사회운동은 타성에 젖은 기성 정당들의 협소함을 깨트리는 대중적 토대와 역량을 구축해야 할 무거운 과제를 요구받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안의 타성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촛불 항쟁으로 모습을 드러낸 다중 시민과의 소통과 그 자발적 참여에 기반한 광범한 시민 네트워크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두말할 것도 없이 선거가 대단히 중요하다. 다가올 지방 선거에 대비하여 진보 개혁 세력간 선거 연대를 위한 노력을 잘 기울여야 하겠다. 그러나 그것도 더 멀리 내다보는 미래 비전을 잘 세우며, 서민 대중 및 지역 대중과 잘 소통, 공감하고 튼튼한 풀뿌리 진지를 구축하는 ‘하방’(下方)전략을 실천함이 없이는 불통 정글 보수가 아무리 불안정하다 해도, 보수 우위 대한민국 시대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선거정치 없는 정치는 없다. 또 정당정치없는 정치는 없다. 좋은 정당을 만드는 일은 좋은 정치의 필수 관문이다. 그러나 선거정치만 정치는 아니다. 그리고 선거정치, 정당정치를 위해서라도 운동 정치의 중요성은 충분히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곳곳에서 운동이 죽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시민과 세계>의 혁신

분수에 넘치는 바깥 이야기를 많이 했다. 비판적 성찰의 과제란 현실 진보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 잡지가 안아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2002년 창간된 본 잡지는 시민적 진보 또는 시민 민주주의라는 깃발을 부여 잡고 대한민국에 열린 진보의 길을 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우리는 민족, 민중 담론으로 대표되는 전통 진보의 역부족을 넘어서기 위한 본 잡지의 그간의 시도가 새로운 진보 논의를 활성화하고 진보의 새 길을 여는데 나름대로 한 몫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여러 어려운 여건들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살아남고, 이 만큼 성장한 것만 해도 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특히 시민 대중, 풀뿌리 대중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점은 분명한 사실이며, 크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래서 편집회의에서 대중성의 부족을 비롯하여 본 잡지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수차례에 걸친 자체 진단이 있었고, 대안도 모색했다.

<시민과 세계> 혁신의 방향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 몸집을 줄여 가볍게 한다. 한 호에 너무 부담스럽게 많은 논의를 담지 않도록 한다. 둘째, 시민 담론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작업은 이 잡지의 중핵 부분으로 유지하되, 대중성과 현장성을 대폭 강화한다. 셋째, 독자 대중과 소통 공간을 마련한다. 특히 가까이 있는 참여 연대 회원들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넓히도록 노력한다. 이번 16호는 이런 새 편집 방침하에 새 단장을 한, 말하자면 <시민과 세계>의 ‘혁신 준비호’에 해당한다. 주제 기획과 특집을 하나로 통합해서 몸집을 줄인 것, 현장 부분이 강화된 것, 시민 문화란을 신설한 것, 논쟁란을 강화한 것, 저자와의 대화를 만든 것, 독자 목소리를 담은 것 등에서 독자들은 새 혁신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제 면으로 보면, 시민정치, 민주공화국, 더불어 사는 공동체 그리고 새로운 성찰적 진보가 이번 호를 관통하는 기본 화두로 되어 있다. 이 화두는 참여사회연구소 시민정치센터의 창립 심포지엄 글을 다듬어 수록한 ‘시민정치와 새로운 진보’ 라는 주제의 특집, 한겨레 신문 지상논쟁을 본격적 논쟁의 무대 위에 끌어 올린  ‘민주적 애국주의‘ 논쟁, 그리고 최근 <공동체론- 화해와 통합의 사회 정치적 기초>라는 제목의 방대한 저서를 내놓은 저자 박호성과의 대화 등에 걸쳐 있다. 다른 글들도 이 화두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16호의 혁신은 아직은 잠정적이다. 우리는 이 잠정 혁신호를 가지고 다시 ‘독자 모니터링’을 받을 예정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시민과 세계>가 시민 대중에 읽히는, 열린 진보 잡지로 거듭날 것을 다짐한다. 독자들의 아낌없는 질책과 지원을 바란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남겨 놓은 다음의 잠언을 들려 드리고 싶다. 이 구절은 불통 정글의 겨울 공화국을 사는 우리의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더불어 사는 시민공동체를 열어야 할, 위대한 선지자에 기댈 수 없는, 우리들 모두의 공동의 책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알며 순간 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세계는 환상적이고 유동적이고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이다.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 줄 수는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하다.”

 선지자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 암호는 모호하다. 진보 희망의 넓은 문에 새겨진 암호를 풀어 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함께 꾸는 시민의 꿈,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야 말로 위대하다. 불통 정글의 겨울 공화국을 사는 우리의 아픔을 서로 위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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