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2-05-08   8963

[기고] 한국자본주의 ‘주요 모순’에 대하여 / 이병천 ②

한국자본주의 ‘주요 모순’에 대하여
: 제2민주화의 정치경제학…장하준, 정승일 “재벌에 면죄부”

이병천 『시민과 세계』공동편집인, 강원대 교수

 

장하준과 정승일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 『선택』)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매우 넓다. MB정부 시기는 물론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 나아가 근대화 50년 한국자본주의의 굵직한 주제들을 거의 포괄한다. 게다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 현안에 대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나라안팎 경제사정을 아울러 어지간히 큰 지식용량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흉내내기 어려운 종합적 작업을 수행했다. 그것만으로 『선택』은 『쾌도난마』에 이어 또 다시 ‘경제 시민’들에게 큰 선물이 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의외로 모호한 구석이 있는 신자유주의 개념에 대해 장하준, 정승일이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그 개념 위에서 한국경제의 주요 문제 또는 ‘주요 모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떤 강점과 약점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선택』과 『쾌도난마』 전체를 관통하는 그들의 핵심 논지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그 기본 논지는 『쾌도난마』 이래  『선택』에서도 별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장하준, 정승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세가지 명제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널리 쓰이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각인 각색이고, 그래서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이 말은 간단히 탈규제 자유화, 사유화, 부자 감세, 노동시장 유연화, 개방화 등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의외로 딱 집어 정확히 무엇을 신자유주의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와 합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신자유주의가 단지 정책만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축적체제(regime) 또는 하나의 자본주의 유형인지, 둘 다인지, 그리고 하나의 단일한 신자유주의 형태만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잡종(雜種, hybrid) 신자유주의 형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런 까닭인지 아예 ‘신자유주의 타령’은 그만하고 시장근본주의, 또는 시장만능주의라는 말을 쓰자는 주장까지 있다(김기원). 그러면 장하준, 정승일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1>- “신자유주의는 저성장주의이며 저성장을 위한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금융자본을 위한 자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금융자본이 기업경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스템인 것입니다”(<쾌도난마>, p.17).

즉 그들의 경우, 신자유주의란 곧 금융자본주의, 또는 주주자본주의다. 금융이 몸통이고 실물이 꼬리로 거꾸로 선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인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신자유주의는 좌파와 우파의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2>- “좌파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는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이나 영국노동당의 블레어는… 금융자본주의 노선을 밀어붙이고 노동시장에 최소한의 보호장치는 존속시키지만 기본적으로 유연화를 지지하고 노동조합이 자본에 밀려 약체가 되는 것을 방관하고 공공 부문 민영화를 지지한 것도 그래서이죠. 그러면서 공정한 시장을 주장하니까 독점은 규제하고요.

 

그에 비해 이명박 정부같은 원조 신자유주의는 노동시장의 완전한 유연화를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최저임금제에도 반대해요. 또 독점대기업도 용인합니다… 그러니까 이명박 정권은 레이건과 대처정권에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클린턴과 블레어 정권에 비교할 수 있어요(<선택>, p.22-3).

 

그런데,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금융자본주의, 주주자본주의라 규정한 다음, 그들은 “ 오늘날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주체는 재벌이 아니라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다.”라고 말한다( <쾌도난마>, p.237). 그들의 이런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노동운동의 주적이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라는 대목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제3>- “한국노동운동의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반재벌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함께 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둘 다 ‘노동자의 적’이라고 생각하니까 재벌과 신자유주의를 ‘같은 편’으로 간주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재벌을 타도한다고 노동시장 유연화가 극복되고 신자유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노동시장 유연화는 반재벌투쟁을 통해 극복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죠”( <쾌도난마>, p 174).

 

장하준, 정승일에 대한 공감

 

우리는 장하준, 정승일의 말이 마땅히 진지하게 경청해야 할 대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자본주의 패권국 미국이 금융 주도 신자유주의 길로 돌진해, 그 질병을 세계적 규모로 전염시킨 사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터져 그 위기 또한 세계화되었으며 금융과두제와 양극화에 항의해 ‘월가 점령’운동까지 전개된 경과를 생각할 때,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금융자본의 지배 체제로 파악하고 그 파괴적 효과와 위험에 대해 질타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금융 주도 주주자본주의의 위험은 결코 바다 건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곧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뼈속까지 친미적인’ 이명박 정부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이전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재벌개혁을 비롯한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미국식의 신자유주의, 주주 자본주의 쪽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구개발주의를 결정적으로 해체한 한국경제 ‘97년 체제’의 골격은 김대중 정부 시기 IMF관리체제 아래 만들어졌었다.재벌개혁의 성격은 전면 개방된 금융시장의 힘과 주주 가치로 재벌을 규율하는 기조를 가졌었다. 그 결과 재벌체제 -민영화된 공기업도- 는 현저히 주주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97년 이후 재벌체제는 그 이전과 연속적 측면을 가지면서도, 주주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질적 변화를 겪었다고 봐야 한다. 97년 이전이나 이후나 한국경제는 그저 변함없는 재벌자본주의 또는 총수자본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연속성만 봐서는 97년 이후, 2008년 이후 양극화 축적체제의 전모를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이 대목에서는 장하준,정승일의 한국경제 진단과 같이가며 주류 재벌개혁론자와는 갈라진다. 장하준은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말하고 있다.

 

“한국의 대기업은 지난 수십 년간 국민이 함께 키워온 거예요. 그런 대기업을 재벌개혁이란 명분하에 국내외 자본투자자들이나 재테크 세력에게 내주면 안됩니다. 그런 재벌개혁이라면 과거 재벌 가문사람들 500명 정도만 잘 먹고 잘 살던 걸 기껏 5만이나 50만명의 금융 자산 부자들까지 잘 먹고 잘 살게 만드는 경제민주화로 끝날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러지 말고 5000만 국민 전체가 골고루 잘 먹고 잘 사는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재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선택>, p.266).

 

나는 장하준의 이 견해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나 또한 거의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쓴 바가 있다.

 

“이 자본의 정치적 해방의 시대에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강의 기적과 세계 속의 한국경제를 일구는 데 가장 무거운 부담을 져 온 근로대중은 고용불안과 생존권 위기 상황에 내몰려 있다. 재벌의 부는 국민의 부(common wealth)로,근로 대중의 생활 향상으로 확산 균점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국제금융자본이 뜯어먹고 있다” (이병천, “반공개발독재와 돌진적 산업화”,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한울, 2007, pp.139-140).

주주자본주의적 개혁으로 인해 지난 날 한국경제의 ‘집단적 협력자본주의’- 권위주의적이고 불공정 공유 형태이긴 했지만- 성격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고, 지난 수십 년간 국민 대중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함께 키워온 재벌의 과실은 재테크 세력, 금융투자자들에게 내어주기에 이르렀다. 반면 노동자와 서민, 그리고 여러 중간 집단들조차 패배자의 처지로 떨어졌다.

 

그러므로 더 많은 주주 자본주의를 추동하고 심화시키는 재벌개혁에는 반대하며 주주자본주의를 견제해야 한다고 보는 장하준, 정승일의 주장에 나는 공감한다. 그런 개혁은 재벌과 금융자본과 유착, 공생하는 과두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한층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단지 재벌개혁,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어떤 개혁인가’, ‘어떤 민주화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졸고, 재벌개혁과 한국경제 새판짜기, www.pressian.com, 2012/2/28). 금융 자유화와 주주가치를 더 심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경제민주화여야 한다. 금융 통제와 양극화 해소는 민주적 대안의 길에서 같이 가야 할 두 바퀴 친구가 되어야 한다.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는 금융통제없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재벌에 면죄부를 주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장하준, 정승일과 나는 어디서 갈라지는가? 위에서 인용한 나의 글에는 다음 문장이 이어지고 있다. “삼성과 같은 슈퍼재벌의 무법, 무책임의 횡포가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장하준,정승일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재벌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재벌 개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예각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대안의 길에서 어떤 재벌개혁인가, 어떤 경제민주화인가 하는 게 문제다. 나는 장하준, 정승일의 논리에서 중대한 문제는 앞서 본 <명제 3>에 있다고 생각한다. <명제3>에서 그들은 신자유주의 축적 체제와 축적 기획의 주체가 금융자본, 무엇보다 월가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된 금융자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재벌을 한국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에서 떼어내 버린다. 이제 재벌은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와 기획의 중심 지배세력이기는 커녕 노동자들과 함께 초국적 금융자본의 공격을 받는 대상으로 설정된다.( 쾌도난마, pp.85-6). 그리고 공정시장을 위한 개혁은 결국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하자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선택, pp.188- 194).

 

이런 논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재벌이 신자유주의를 선도한 세력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이렇게 말한다.

 

“재벌들이 바보같은 짓을 한 거예요. 시장주의(자유주의)를 들여오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1990년대 중반 자유기업원 등을 만들어 미국 공화당 극우파들의 극단적 개인주의나 수입하고 주주자본주의 이론 들여오고 그랬거든요.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은 거죠”(<쾌도난마>, p. 83).

 

그동안 ‘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웨이드)의 프로그램과 그 지배 복합체가 해온 짓을 생각한다면, 나는 장하준, 정승일의 주장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지배 복합체와 그 정책 체계로서 ‘워싱턴 컨센서스’가 제시하는 탈규제, 경쟁시장, 사적 소유권정립, 대외개방 등은 결국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도우는 게 아니라 봉쇄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평평하게’ 하는 작업은 약소국을 강대국에 무장해제 시키는 ‘사다리 걷어차기‘전략이 될 수 있다.그리고 우리의 경우에도 그들 지배 복합체는 재벌 해체 등 미국을 위한 극단적 구상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재벌조직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주주자본주의론을 주장하면서 장하준을 비판하고 있는 걸 보노라면( 송원근 , 강성원 지음, <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북오션, 2011 참조), 재벌들이 바보같은 일을 했다는 장하준의 말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다. 재벌 연합체 산하 연구소가 주주자본주의를 주장하면서, 재벌을 옹호해 주는 세계적인 학자 장하준을 비판하다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재벌이 한국 신자유주의 체제의 지배세력이 아니라니. 한국의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에서 가장 큰 과실을 얻고 최대의 승리자가 되었다 할 재벌을 반(反)신자유주의 대열의 주체세력으로 올려 세우다니. 그리고 진보적으로 가져와야 할 공정시장을 위한 개혁을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로 가는 길이라고만 내던지다니.

이 대목에서 나의 생각은 장하준,정승일과 갈라진다. 재벌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바보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재벌산하 연구소가 <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같은 책만 내는 건 아니다. 우리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경제 20년의 재조명> ( 홍순영 장재철외, 2006) 같은 책도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장하준, 정승일과 비슷하게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재벌 조직을 옹호하는 논지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의외로 경제적 자유화를 ‘기초적 자유화’와 ‘선진화된 자유화’로 구분한다. 그러면서 영미형 자본주의는 법의 지배와 선진화된 시장의 조합으로, 유럽형은 사회적 통합과 기본적 자유화의 조합으로 파악한다.

 

뿐만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은 주식시장 규율이 강화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에 따른 많은 부정적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p29, 243)라고 쓰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연구인데도 불구하고 장하준, 정승일같이 극단적 주장을 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 최고의 재벌연구소에서조차 나름대로는 균형잡힌 말을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는 장하준, 정승일의 주장이 그만큼 한국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보기에 장하준, 정승일은 한국자본주의의 ‘주요 모순’을 ‘쾌도난마’한 것 같지 않다. 이는 그들이 한국 경제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조사 연구와 안목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신자유주의를 금융자본의 단일 지배로만 파악한 탓일 수도 있다(명제 1). 신자유주의가 단지 금융자본의 지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보다 포괄적으로 지배적 계급권력의 보수적 복원, 인간과 세계의 재상품화 기획이라고 보지 않고 말이다. 그들이 한국경제를 쾌도난마하는데 빈틈을 갖게 된 것은 아마 둘다 때문일지 모른다.

 

제 2 민주화의 정치경제학 : 장하준‧정승일의 <선택>과 재벌프렌들리 복지국가론 ➀ >>보기 

 

* 이 글은 레디앙(www.redian.org)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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