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96] 한국 자동차와 반도체, K-pop을 보는 서구인들의 시선은…

[시민정치시평 96]

한국 자동차와 반도체, K-pop을 보는 서구인들의 시선은…
: 백인을 보면 불편해지는 이유

이항우 충북대 교수

미국 중학교의 국어 수업은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여러 편의 시를 쓰게 한다. 물론 몇 가지 중요한 작시 원칙들을 학생들에게 제시해준다. 각 연과 행은 특정한 시상을 담아야 하며, 두운과 각운의 운율을 지켜야 한다. 의태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고, 비유와 직유가 적절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be’ 동사를 포함한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용어들의 사용은 금지되며, 모든 명사는 한두 개 형용사의 수식을 받아야만 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학생들은 일정 기간 1주일에 한 편씩의 시를 쓴다. 그리고 교사의 평가를 받는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작시의 답은 있으되 정답은 없다. 지식의 단순 암기에는 익숙하지만 상상력은 그만큼 풍부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작시는 고역이 될 수 있다. 이런 시스템 아래에서는 아무리 암기 능력이 탁월한 아이라도 수려한 시구를 창작해내는 아이에게 주눅 들기 쉬우며, 적어도 그런 아이보다 특별히 더 뛰어난 아이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낮다. 학교는 체화된 교양이 다른 무엇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우월한 문화자본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문화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어스는 근대 서구의 문화 혹은 문명 관념의 형성을 고찰하면서, ‘프랑스인과 영국인은 서구와 인류의 진보에 자국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한 자부심’을 문화 관념에 투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엘리어스의 이 말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선진국이고 수많은 식민지를 착취했던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관념으로는 온전히 다 담아지지 않는 당혹스러운 어떤 특별한 구석이 있다. ‘인류 진보’와 ‘자부심’이라는 말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인류 진보에 어떤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적 지배는 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인류의 진보에 기여한 자국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까지 비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쨌든 예컨대 비행기를 고안하고 인터넷을 만들고 민주주의를 창안하고 심지어 사회주의도 디자인했다. 그러니 그러한 자부심은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서구와 백인이 가진 우월감의 밑바탕에는 단순히 자신들이 더 잘 살고 더 힘이 세다는 즉자적 인식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간다는 명확한 자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불편할 수는 있어도 비난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들의 우월감은 민족, 인종, 계급, 성 등과 관련한 사회불평등에 가장 비판적인 백인들도 널리 공유할 정도로 그들의 보편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좌/우를 떠나 적지 않은 한국 학자들이 시민들의 세금으로 항공료와 체제비를 제공하면서까지 이런저런 백인 학자들을 한국의 학술행사에 모셔오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초청자들을 내심 얼마나 훌륭한 학자들로 인정하고, 또 얼마나 많은 한국 학자들이 똑같은 조건으로 백인 학자들의 초청을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한국 학자들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 백인 학자들의 충실한 제자들일 뿐이다. <오리엔털리즘>의 저자 사이드는 맑스조차도 서구 우월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고 지적했거니와, 사실 어찌 보면 맑스주의가 비서구 식민지에 끼친 폐해는 그것이 식민지 해방운동에 기여한 것 못지않게 크다. 서구 합리주의의 가장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사상 체계라 할 수 있는 맑스주의는 비서구 식민지의 가장 진보적인 운동가들조차도 불교나 유교 등과 같은 자국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와 자산을 스스로 부정하고 폄훼하도록 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동양의 인격 수양 윤리가 맑스주의 사고체계로 인해 척결되어야 할 봉건적 통치 이데올로기로 오랫동안 낙인찍힌 것은 이를 방증한다. 중국 공산당이 지난 2000년간 동양 문화의 근간이 되었던 공자를 만악의 근원으로 단정하고 그의 사상을 불살라 버린 것은 그 결정적 증거이다. 서구의 지배에 동양이, 맑스가 되었든 푸코가 되었든 네그리가 되었든 혹은 버틀러가 되었든, 서구의 언어와 서구의 사상으로 맞서는 상황, 서구인이 비서구인에게 병도 주고 약도 주는 근대의 역사, 이것은 반드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는 또 각기 다른 인종, 성, 계급, 민족, 국가의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의 진정한 통합은 서로 다른 인간들의 진실로 동등한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엘리어스가 말했듯이, 근대 서구와 백인이 자신들의 이전 사회와 동시대의 원시적인 사회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자부하는 밑바탕에는 그들의 기술, 예의범절의 성격, 과학지식의 발전, 세계관이 더 낫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한마디로, 문화적 우월감이 그러한 자부심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동양이 서구를 물질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쫓아가려 해서는 결코 그들을 넘어서는 인류 진보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이유이다. 한국 자동차가 세계 시장의 주요 브랜드 중의 하나가 된지는 오래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현재 세계 최강 그룹에 속해 있다. 한류는 최근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물론, 이는 노동자들을 포함한 해당 산업 종사자들이 거둔 대단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동차와 반도체와 근대 팝(pop)에 관한 게임과 그 규칙을 처음으로 고안한 서구와 백인들에게, 그러한 활약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주관하는 게임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현실은 기존 질서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는 바뀌지 않는 법이다. 기존의 판을 흔들고 새로운 판을 만들어 그것을 낡고 진부한 것으로 만들 때에만 현실은 바뀔 수 있다. 그 새 판은 불교나 유교와 같은 우리 혹은 동양의 문화와 가치와 자산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에서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서구 문화는 서구인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고, 동양 문화는 동양인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다. 서구는 17세기를 전후로 부르주아 계급이 식탁 예절, 생리 작용에 관한 태도, 코 풀기와 침 뱉기에 관한 에티켓, 침실 매너, 공격성에 관한 태도 등을 학생과 성인에게 교육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들을 문명화된 종족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한·중·일의 동아시아는 오랜 기간 ‘인(仁’)과 ‘예(禮)’의 군자 교육, 즉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주지 않는’ 인을 지향하고, 그를 위해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움직이지 않는’ 것에 정진하여, 도덕적 인격과 인문적 교양과 정치적 자질을 지닌 군자를 길러내는 교육을 지향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의 삶이 근대 서구의 그것보다 야만적인 것 혹은 덜 문명화된 것 이라고 말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서구가 근대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봉건 질서를 무너뜨리면서도 왕과 귀족의 상층 취향을 시민들의 일상적 매너와 에티켓으로 대중화시켰지만, 서구 민주주의를 수입한 동아시아는 유교 문화를 봉건적 지배 체제의 근간으로 규정하고 일소하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풍부한 문화 자산도 함께 소실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에게 선비 정신과 양반 문화는 대체로 일부의 관심사일 뿐, 대다수 사람들은 이에 무관심하거나 조롱을 보낼 뿐이다. 그러면서 학문과 문화 (재)생산의 서구 의존성, 특히 미국 의존성은 갈수록 심화되어왔다. 그러나 군자로서의 인격을 수양하고 군자들의 사회관계를 만드는 것을 지선의 가치로 삼은 유교나 불교 등 동아시아의 오랜 사상을 현대의 민주적 가치와 충돌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시킬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근대 서구와 백인을 이기는 인류 진보의 전범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가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들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http://www.pressian.com/ ‘시민정치시평’ 검색  

* 본 내용은 참여연대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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