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기도 전에 시들고 있는 시민참여 제도

위도 방폐장 백지화,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부안사태’가 산자부 장관의 백지화 및 사과발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갑작스런 소식이었다. 이렇게 사과하고 백지화할 것을 왜 그렇게 밀어붙이기만 했던지. 부안군민, 그리고 전경들이 흘렸던 피와 눈물는 누가 책임질 것인지. 이 소식을 들으면서 다시 시민참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한국사회에서 시민의 직접 참여를 위해 도입되고 있는 제도적 장치들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시민단체 대표 몇몇이 참여하는 자문위원회나 각종 정책결정시에 요식행위로 치러지고 있는 공청회만 가지고 시민참여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정부의 각종 자문위원회는 정부가 처리하기 곤란한 사안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하는 거수기 혹은 샌드백으로 전락하곤 한다. 그래서 오히려 반(反)시민참여적이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보다 진전된 형태의 시민참여 제도들이 제안되고 시도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새로운 시민참여 제도들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더럽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국가 정책현안에서 그나마 제안된 몇 가지 새로운 시민참여의 시도들이 기형적인 형태로 도입되고 이 때문에 다름아닌 이해당사자나 지역 주민들에 의해 거부되고 있는 것이다. 부안사태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주민투표’, 북한산 관통도로를 둘러싼 논란에서 제시된 ‘공론조사’,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평가하기 위한 기술영향평가 시범사업 등이 그런 예들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주민투표: 부안사태의 후퇴를 위한 명분용?

‘부안사태’는 일차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무시로 발단이 된 것이다. 부안 주민들은 군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핵폐기장 유치신청 자체가 원천무효라고 선언하고, 부지선정의 무조건 백지화를 주장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런 저항에 직면하자 부안군수가 주민 찬반투표 방안을 제시했고 행자부 장관이 이를 거들었다. 그러나 당시 부안군민대책위는 절차를 무시한 유치신청은 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이에 반대했다. 게다가 산자부 장관도 주민투표의 법률적 근거 미비 등을 이유로 수용불가 입장을 밝혔다. 정부 내에서도 엇박자가 났던 것이다. 수면 아래에 잠복했던 주민투표가 다시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부상한 것은, 시민사회단체가 ‘연내 주민투표 실시’를 중재안으로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이 안에 대해 대책위는 핵폐기장 백지화라는 기존의 입장을 양보하면서 주민투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부가 연내실시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또다른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주민투표를 둘러싼 이러한 일련의 공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약 우리가 주민투표라는 제도적 틀을 부안 핵폐기장 논란으로부터 떼내어 본다면, 이는 지역주민 모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두말할 나위없이 바람직하며 시급히 도입되어야 할 제도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부안 핵폐기장 논란에서 주민투표제는 문제 해결에 별반 도움이 못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이는 주민투표가 제안된 시점이 적절치 못했으며 제안 주체인 정부가 이미 신뢰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주민투표는 사회적 갈등 요소가 극한적 상황에 도달하기 전에 이를 조정하고 토론을 거쳐 최종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한 제도로서 기능해야 한다. 즉, 핵폐기장 유치신청 이전에 거쳐야 할 절차상의 한 과정으로 의당 고려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서가 뒤바뀌었다. 또한 제안 주체가 이미 주민들의 신뢰를 잃은 부안군수와 행자부 장관이었기 때문에, 그 배후에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한 의심을 자아내었다. 게다가 주민투표를 둘러싼 청와대, 행자부, 산자부, 한수원간의 엇박자와 말바꾸기 역시 주민들이 품은 회의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번 주민투표의 한계는 또 있다. 부안군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민투표를 통해 ‘부안사태’는 정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것은 여전히 미봉책일 뿐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어딘가에 결국 핵폐기장이 건설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정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보다 거시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국 에너지정책의 미래, 그리고 그에 따른 핵폐기물 처리 방식과 핵폐기장 입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는 것이 급선무이다. 만약에 사회적 합의를 얻어내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가 계획되지 못한다면, 안면도-굴업도-위도로 이어지는 격렬한 저항의 역사에 새로운 지역이 추가될 것이 분명하다.

공론조사: 이해당사자가 외면하는 시민참여 모델?

올해 제기되었던 또다른 시민참여 방식인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역시 한국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공론조사는 북한산 관통도로 논쟁에서 정부가 제기한 것이다. 지난 2001년 논쟁이 본격화된 이후 환경단체와 불교계는 사찰 수행환경 저해, 국립공원 생태계 파괴를 이유로 의정부를 우회하는 대안노선을 주장한 반면 한국도로공사측은 공사비의 증가, 추가 환경파괴를 근거로 기존노선을 고수하면서 팽팽하게 맞서 왔다. 갈등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서, 올 4월에는 건교부와 불교계가 공사를 잠정 중단하고 관련 전문가들로 노선재검토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그러나 결국 노선재검토위원회는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애초부터 위원들의 찬반 입장이 분명한 위원회가 결론을 얻기는 어려웠다는 평가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자 9월에 정부가 ‘공론조사’라는 새로운 시민참여 모델을 들고 나온 것이다. 공론조사는 통상적인 무작위 여론조사와 소규모 그룹토론을 병행함으로써 ‘토론과 대표성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평가받는 시민참여 방법론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교계와 환경단체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기존노선에 대한 반대가 우세했던 노선재검토위원회의 결과를 무시한 처사이며, 공론조사는 기존노선 강행에 앞선 요식절차에 불과하다는 입장이었다.

앞선 주민투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 역시 공론조사라는 방법론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또다시 누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를 담아 이러한 제도적 장치의 도입을 주장했는가에 있다. 우선 정부는 기존노선이 경제적·환경적으로 우수하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면서 공론조사의 도입을 발표했다. 이는 그간 격렬한 공방을 벌여 온 쟁점에 관한 사회 일반의 토론을 제안하는 첫마디치고는 신뢰를 얻기 어려웠다. 여기에 정부는 북한산 관통도로에 대한 결정 유보를 경부고속전철 천성산·금정산 노선 강행 결정과 나란히 발표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합리적 근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기까지 했다.

또한 정부는 ‘공론조사’라는,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생소한 방법론을 갈등해결 수단으로 도입하는 문제를 불교계나 환경단체 등의 이해당사자와 한마디 협의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는 쟁점일수록 그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절차와 과정에서부터 합의를 이루어야 하는 법인데, 정부는 이런 기본 원칙을 저버렸고 이로써 관련 이해당사자의 신뢰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공론조사 발표 후 정부의 행보 역시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이유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건교부는 공론조사 결과에 미리부터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공론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안노선에 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 각각의 노선들의 장단점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불교계를 설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술영향평가: 시민참여와는 무관해진 ‘앙꼬없는 찐빵’?

마지막으로 과학기술기본법에 규정되어 올해 시범사업이 수행된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 TA) 제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TA는 그 자체가 시민참여의 한 방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서유럽에서 발전한 TA 제도는 시민참여적 요소를 대폭 반영하고 있다. 시민참여를 통해서 새로운 기술 분야가 시민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안은 무엇인지를 보다 적절하게 평가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른 기술영향평가제도가 ‘시범사업’의 성격을 가지고 시행되었다. 결과는 아직 발표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이 이해당사자와 일반시민의 광범한 참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우선 주제 선정에서부터 시민사회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했다. 올해 대상기술로 선정된 것은 ‘NBIT 융합기술'(나노기술+생명공학+정보통신기술)로서 일반인에게는 대단히 생소한 분야였다. 평가주체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스스로도 NBIT 융합기술의 모호한 개념으로 인해서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무슨 기술인지조차도 모호한 상태에서 그 영향을 평가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TA를 필요로 했던 더 시급한 당면 현안은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TA(특히 시민참여적 TA)가 이루어졌더라면 좋았을 현안은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국가교육정보시스템(NEIS)을 둘러싼 논쟁이다. 이러한 갈등은 NEIS 구축을 위한 업무처리재설계(BPR) 시에 교사, 학부모 등 관련 당사자가 참여해 논의가 이루어졌더라면 사전에 예방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TA 시범사업은 주제 선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대단히 취약하다는 우려를 현실로 드러냈다고 하겠다.

TA 연구가 실제 수행되는 과정에서도 기술영향평가위원회와 분과위원회에 시민단체 대표를 참여시켰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시민참여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TA 시범사업에 대해 일반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언론 지상에 이번의 기술영향평가가 소개된 횟수가 단 1차례에 불과할 정도이며, 결과를 공개하는 절차도 공청회가 아닌 전문가간담회로 결정된 것이 이를 잘 보여 준다.

말의 홍수 속에 사장되는 ‘시민참여’ 제도

‘참여정부’ 원년의 끝에 받아든 과학기술·환경정책에서의 시민참여 성적표는 거의 참담한 수준이다. 부안 핵폐기장과 북한산 관통도로 논쟁에서 정부는 주민투표와 공론조사라는 새로운 시민참여 방안을 해법으로 꺼내들었으나 이는 모두 초기에 지역 주민 혹은 이해당사자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정부는 이와 같은 시민참여의 수단을 사전 의견수렴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대신 일단 내려진 결정에 대한 주민반발을 무마하거나 이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내놓았고, 이는 지역 주민과 이해당사자의 신뢰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또한 올해 시범사업이 실시된 기술영향평가는 그 각 단계에서 시민참여의 요소를 체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시민의 뜻이 반영되지 못하는 관료적 장치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참여를 위한 시도를 최대한 해당 사업이나 프로젝트 초기에 진행해야 한다. 둘째로 많은 개발사업에서 중립적 행위자가 아닌 사실상의 이해당사자 노릇을 하고 있는 정부를 대신해, 중립적 시민단체 등에서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쟁점에 개입해 시민참여 제도의 시행을 제안하고 진행과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제안 주체가 이미 신뢰를 잃어버려 시민참여 제도 자체가 불신을 받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29.3매).

한재각(참여연대 시민권리팀장)/김명진(시민과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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