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생활보장위원에게 보내는 공개편지②] 중생보위, 거수기로 전락말아야

 



[최저생계비 결정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에게 보내는 공개편지②]


곧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내년도 최저생계비를 결정합니다. 참여연대는 지난 2004년에 이어 두 번째로 올해 7월 한 달동안 성북구 장수마을에서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캠페인을 진행하였습니다. 정부에서 정한 최저생계비가 과연 적정한지 실제 체험을 통해서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체험결과를 바탕으로 체험에 참여한 체험단과 전문가들이 중앙생활보장위원들에게 최저생계비의 현실화와 계측방식의 변경을 요구하는 릴레이 공개편지를 보냅니다.



최저생계비 문제로 이런 공개편지를 쓰려고 하니 옛 생각이 납니다. 80년대 후반 아직 우리나라 사회복지가 제대로 발전을 시작하기도 전,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복지국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때 말입니다. 나라 사정이 쥐뿔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서구 복지국가들의 각종 제도들은 물론이고, 그 한계와 위기까지 우리 일처럼 입에 거품물고 토론하면서, 우리도 곧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흥분을 느끼곤 했던 기억들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에게 이런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금제도의 도입초기 고령세대에게 무갹출 연금을 제공하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보인 영국의 경우를 보면서, 자손들을 위해 평생 고생하던 노령세대를 팽개치는 연금제도를 강행한 우리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고, 외국인 임산부에게까지 각종 모자보건서비스를 아끼지 않는 나라들, 한 아이의 탄생을 국가 전체가 환영하는 복지국가에서의 인간존중을 감동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셋째 아이에게는 아예 의료보험혜택도 주지 않고, ‘왜 태어났니?’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지의 결과가 오늘날 어떤 사회적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복지수준 열악했던 옛날이 지금보다는 덜 부끄러워

이런 말씀을 꺼내는 이유는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연구자로서 역설적으로 그 때가 차라리 행복했었다는 감상 때문입니다. 비록 많이들 가난했지만, 나라형편이 조금만 피면 우리도 남부럽지 않은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꿈과 열정을 모두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비록 복지수준이 열악해서 안타깝기는 해도 그리 부끄럽지는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자랑하면서도 수많은 빈곤자들이 방치되어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빈곤과 부유함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것에도 무감각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아니, 그러한 격차를 좁히려는 노력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노골적이고 완고한 저항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있는 현실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사회복지, 사회정책 학도들의 정의감이 예전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전임 중앙생활보장위원으로서 책임 다하지 못해 부끄러움

짐작하셨겠지만,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위원님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작년까지 위원을 역임했던 사람으로서 제대로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이런 당부를 드리게 된 것이 한편으로 자괴스럽기 그지없는 일이긴 합니다.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최저생계비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을 갖는 정부내 몇 안되는 권위있는 위원회라고 소개하곤 했는데, 그러한 권위를 부여받고도 실질적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던 현실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너무나 많은 빈곤자들이 방치되어 있고, 생활보장을 받는 사람들도 점점 더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너무나 잘 아시는 위원님들께 새삼 수치를 들이대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요보호 빈민만도 410만 명이 넘는데, 그 중 160만 명 정도만 기초보장수급자로 보호받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문제임이 사실입니다. 부양의무자라는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있는 사람 등 비수급 빈곤층의 문제는 하루빨리 해결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차상위계층이라고 하는 준빈곤층의 경우도 수급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데 이들을 근로의욕상실이라는 빈곤함정으로 내몰지 말고 주거, 교육, 의료서비스 등 적절한 지원을 통해 실질적인 자립, 자활의 길로 나서게 하는 것이 국가적으로도 큰 이익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이번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상대적 빈곤선 도입해야

이번 여름에 참여연대가 성북구 장수마을에서 진행한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이 경험하고 관찰한 얘기를 들어보시면 가난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서구의 복지국가가 가장 강조한 것이, 최소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인데, 우리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이러한 배려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최저생계비의 가치하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1999년 최저생계비가 처음 계측될 때 그 수준은 4인 가구 기준 901,357원으로 당시 도시근로자 중위소득의 45.5%였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2008년에는 그 수준이 34.8%까지 하락하였습니다. 복지국가들이 나라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상대적 빈곤선으로 중위소득의 40-60%를 상정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중위소득의 40%에 훨씬 못미치는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는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3-4년 전에 중앙생활보장위원회에서 상대적 빈곤선을 도입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결의가 되었고, 제가 위원이었던 2008년도에 이를 확인한 바 있으며, 이에 관한 연구작업도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연유인지 아직까지 제대로 작업이 추진되지 않은 채, 저는 작년 말 중앙생활보장위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론보도로는 금년도 최저생계비 결정시 부분적으로나마 상대적 빈곤개념을 도입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위원님들께서 이 문제의 중요성을 새삼 자각하셔서 제대로 된 상대적 빈곤선 도입의 중요한 계기로 삼아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최저생계비의 의미를 다시 살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울러, 상대적 빈곤선의 경우에도 중위소득의 일정수준을 소극적으로 유지하는 방식을 넘어, 우리의 경제수준과 국민적 생활수준에 걸맞게 중위소득과의 격차를 점차 축소하여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힘써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복지국가를 만드는 길은 다양하고, 우리는 우리 나름의 복지국가를 만들어야겠지만,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노력은 모든 복지국가의 공통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균형을 무너뜨린 중앙생활보장위원회 구성은 재고해야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것입니다. 애당초 저는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의 추천으로 위원이 된 경우인데,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출범당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에 공헌이 컸던 참여연대와 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에게 위원추천권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민단체라는 배경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 대변하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년을 끝으로 양 단체 모두 위원추천에서 배제되고 말았음은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참여연대와 여성단체연합만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기초보장제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오랜 기간 활동을 통해 역량을 보여준 단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타당할 것인데, 현재의 구성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하는 기구이지만, 이를 다수결로 해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걸리더라도 논쟁과 타협을 통해 결정을 해온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의 중심에는 국가의 재정과 예산을 걱정하는 경제관료들과, 시민의 복지를 강조하는 보건복지부 그리고 가난한 민중을 대변하는 시민단체를 3각 축으로 하면서 관련 전문가들이 보완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논쟁과 타협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러한 균형을 무너뜨린 다음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과연 무엇을 추구하는 기구가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중앙생활보장위원회, 거수기로 전락말아야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운영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법률상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최저생계비 결정 뿐만 아니라 기초보장제도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에도 참여하게 되어 있지만, 이러한 참여가 원활히 이루어져 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최저생계비 결정 등 불가피한 부분을 넘어선 참여는 잘 되지 않았고, 복지부 관료들의 주도하에 수동적으로 운영되었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최저생계비 결정도 심도있게 논의되기 보다는 시한에 쫒기는 논의가 되는 경향이었습니다. 이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가 자칫 거수기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중앙생활보장위원회가 우리나라 복지제도에서 모범이 되는 중요한 기구가 될 수 있을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여름이 우리나라 기초생활보장제도와 최저생계비 결정의 역사에 있어서 길이 기억될 중요한 전기가 될 수 있도록 위원 여러분들의 헌신과 수고를 기대하며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이영환(성공회대 교수/전 중앙생활보장위원)

공개편지는 오마이뉴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바로가기)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