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에게 보내는 공개편지⑤]사회안전망이 아닌 사회배제망, 이젠 거둬 냅시다.


[최저생계비 결정하는 중앙생활보장위원회 위원에게 보내는 공개편지⑤]


곧 중앙생활보장위원회는 내년도 최저생계비를 결정합니다. 참여연대는 지난 2004년에 이어 두 번째로 올해 7월 한 달동안 성북구 장수마을에서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캠페인을 진행하였습니다. 정부에서 정한 최저생계비가 과연 적정한지 실제 체험을 통해서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체험결과를 바탕으로 체험에 참여한 체험단과 전문가들이 중앙생활보장위원들에게 최저생계비의 현실화와 계측방식의 변경을 요구하는 릴레이 공개편지를 보냅니다.



간밤에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려 전국이 밤을 설치며 뒤척였어야 했습니다.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이하 중생보위) 위원분들도 잠을 설치셨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무더위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19일 어제 열렸던 중생보위가 최저생계비에 대한 결심을 하지 못하고 다시 24일 재개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느 수준이 우리나라 국민들의 ‘인간다운’ 최소한인지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라 추측해봅니다.


(사진설명 : 참여연대를 비롯한 노동,시민 사회단체 회원들은 중앙생활보장위원회 회의가 열린 19일 오전에 복지부 앞에서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고 상대빈곤선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빈곤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


사실 빈곤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일종의 ‘주홍글씨’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물질적인 한계 때문에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있는 이 비극은 인류가 생성된 이후 오늘날까지 뚜렷이 극복하지 못한 결함의 하나이지요. 예전에 사회전체의 생산성이 그 구성원들의 기본생활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의 총량을 따라잡기 어려운 때는 그렇다 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부터 자리잡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대량생산체제의 발동에 힘입어 사회 전체의 생산물의 합이 사회전체의 생활필수품의 합보다 더 커진 상황이고 따라서 원론적으로는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의 문제는 더 심각하게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여전히 존재하는, 아니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을 위안하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관습적 사고가 형성, 유포되고 있으니, “빈곤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인류의 주홍글씨에 해당하는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20세기 복지국가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짐짓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절대적 빈곤만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까지도 계측하여 인간다운 최소한의 생활이란 것이 단지 극한적인 생존상태만을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그 사회의 발전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위해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치밀하게 얽어 놓은 것이 바로 동시대 선진복지국가의 모습임을 중생보위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자 일로 벌어먹어라?’


또 다른 관습적 사고도 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일을 통해 벌어먹게 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고통스런 일거리라 해도 스스로가 근로의지를 작동시켜 일할 수 있도록 복지제도는 최소한의 기반만 형성해 주도록 ‘인내(?)’를 해야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는 하나의 고통이고 결국 소득을 벌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강제력에 이끌려 행하는 단순한 ‘일’로 전락한 지 오래여서, 일하지 않고 여가라는 이름하에 놀고 쉬는 것을 더 동경하고 찬양하는 모양새를 만든 지 오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을 통해 호구지책을 마련하라는 근엄한 경고는 새로운 바도 아니며 그렇게 유효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근로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짖이겨진 그들의 이력을 살펴보고 일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와 동기유발을 끌어내지 않는 상태에서 이들 스스로의 자립이란 유일한 출구만을 강요하는 것은 백이면 백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많은 예들은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도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일자리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며 창업에 따른 자본금의 수준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가 팔짱을 낀 채 “일할 수 있는 자 일로 벌어 먹어라”는 준엄한 구호만을 되뇌인다는 것은 결국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력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러한 관습적 사고에는 “빈곤은 그 스스로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는 오랜 전통의 철학이 깔린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중생보위에 여러분들도 조용히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스스로도 이런 철학과 믿음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혹여 그렇다면, 다른 수많은 사상서를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이 1879년 세상에 나온 헨리 죠지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를 꺼내들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헨리 죠지가 비주류경제학자이고 돈키호테적인 이상론자에 그친 자이기에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읽어 보신다면, 인류의 빈곤이란 것이 결국 발전의 산물이며, 개인의 나태나 게으름이 아니고 사회의 구조적 산물이란 점을 감동적이고 강력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헨리 죠지의 필체어 어쩌면 새로운 경지를 만나실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서류’가 아니라 ‘현장’, ‘논리’가 아니라 ‘실제’에서 출발해야


사실 이번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한 참여연대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저는 중생보위 여러분들에게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인터넷과 언론 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이 프로그램을 모르지는 않으실터인데도, 중생보위 여러분들의 관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딱 한분, 전문가로서 참여하시는 교수님이 잠시 들러 말씀을 나누고 가셨을 뿐이고 그 외의 어느 누구도 일일체험은 고사하고 현장을 들러 빈곤한 분들의 어려움을 확인해 보려는 분이 없으셨던 것이지요. 물론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의 당시 전재희 장관은 물론이고 손건익 사회복지정책실장, 권병기 기초생활보장과장조차도 얼굴을 내밀지 않으셨으니 중생보위 여러분들에게만 기대한다는 것도 무리겠지요.


굳이 좋게 해석해보자면, 중생보위 여러분들과 주무 관료들은 이미 빈곤층의 삶과 생활의 실상에 대해서는 너무도 절절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혹, 자신들의 냉정하게 집행되어야 하는 책무가 빈곤체험을 통해 감성적이고 주관에 흔들림을 우려하여 그 냉정함을 지키시려는 충정의 발로이셨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수백만의 운명을 결정짓는 책무를 행하실수록 결국 전범으로 삼아야 할 것은 서류가 아니라 ‘현장’이며, 논리가 아니라 ‘실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빈곤층의 실질적 삶에서부터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최저생계비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현실을 옥죄는, 현실과 심각히 괴리된 결과만이 도출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진설명 : 2004년 당시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이 하월곡동에서 진행된 최저생계비 한달나기 캠페인 현장을 방문하여 체험단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2004년 당시 최저생계비 인상율은 8.9%였으며 이는 현재까지 최저생계비가 정해진 10여년간 가장높은 인상율이다. )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사회안전망’ 아닌 ‘사회배제망’


저는 여러분들이 지난 한달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면, 현재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더 이상 우리나라의 ‘사회안전망’제도가 아니고 역설적이게도 ‘사회배제망’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으실 수 있었으리라 감히 추측합니다. 빈곤정책에 대해 전문가라고 칭할 수 있는 저의 경우에도 이번 프로그램이 예전보다 각별했던 이유가 바로 ‘사회배제망’이란 점을 또렷이 저의 의식에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선동 장수마을이나 서울역앞 동자동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사회적 관계에서부터 배제된 수많은 분들이 존재하고 계심은 우리 사회에 사회안전망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이 분들을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기제만이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시간은 머지 않아 중생보위 여러분들의 결단을 요구하게 됩니다. 과연 중생보위의 위원분들이 이미 정부의 행정적, 재정적 고려점들을 반영한 가이드라인을 뛰어넘어 지금 빈곤한 분들을 옥죄는 이 사회배제망을 허무는 일을 행하시는 일에 동참하실 수 있는지요? 물론 수많은 이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0년부터 운영되어온 중생보위의 결정과정이 결코 전향적인 결론을 내기에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금번에 새로이 구성된 중생보위의 구조는 더욱더 열악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역사적 책임과 국민의 엄중한 경고 뒤따를 것


따라서 우리는 중생보위 여러분들에게 전향적인 결정을 구걸하거나 읍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역사의 당위와 사회의 정의에 대해 분명히 선언하는 것뿐이고, 이를 외면하는 것에 대한 역사적 부담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믿을 것은 인류의 역사가 그래도 이 주홍글씨인 빈곤에 대해 부분적으로 서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우리나라도 이러한 서광의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깨어있는 시민’들이 더욱 더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중생보위 여러분들에게 외친 이 함성이 여러분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없이 공허한 메아리로만 화답되겠지만, ‘깨어있는 시민’들이 언젠가 거대한 메아리로 우리 사회에 대반전의 시기를 앞당길 것임을 믿습니다.


24일. 중앙생활보장위원 여러분들의 고뇌어린 결정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모두 건승하시길.


이태수(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현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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