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빈곤구조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빈곤

정부가 외환위기를 벗어났다고 발표한 시점에 빈곤문제가 한국사회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고실업이 장기화되고, 장기실업자가 빈곤계층으로 전락하고, 노숙자가 증가하고, 생계형 범죄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 해법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최근의 빈곤율 증가는 우리 사회 내부의 구조적 모순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미국이나 IMF 같은 국제금융기구가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고금리정책, 긴축정책, 노동시장 유연화, 민영화와 같은 것들에서 그 직접적인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이러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처방을 회피한 채, 국지적인 처방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빈곤을 퇴치하는 정책적·정치적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처럼 고도성장을 통해 저임금의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고, 계속되는 고통과 사회적 저항을 감수하며 신자유주의적 성장모델을 고수할 수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빈곤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법을 모색해야 할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 다양한 해법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빈곤문제에 대한 각국 정부 및 시민사회의 대응방식을 통해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말 빈곤의 생산과 재생산구조

20세기 말 빈곤문제는 해당 국가가 세계적 분업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국가내부의 소유 및 분배구조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생산 및 재생산된다. 이는 크게 서구형, 저발전국가형, 개발도상국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서구형의 경우 세계체제내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과 내부 민주화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기본적인 복지체계가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이 주를 이룬다. 이와 달리 저발전국가형의 경우는 세계체제내에서 종속적 위치에 있으며, 내부적으로 부패와 독재로 인해 소유 및 분배구조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고 복지안전망도 부재하며, 상시적으로 절대적 빈곤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끝으로 한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형의 경우, 세계체제내에서 자율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내부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으나 이것이 소유 및 분배구조의 왜곡을 바로잡고 복지체계를 강화하는 데 이르지 못하였으며,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 혼재하는 상태이다.

세계의 빈곤문제

서구의 빈곤문제

서유럽의 경우 내부적으로 편차가 있지만 복지예산이 18∼30%에 이르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사회복지정책 또한 유럽연합차원에서 일정한 수준과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서구에서 빈곤문제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98년 OECD에서 출간된 J.-M. Burniaux의 보고서는 "197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소득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같은 수의 국가에서 빈곤율 또한 증가하였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경향만을 살펴보면 빈곤율은 미국과 일부 유럽대륙국가에서는 감소,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에서는 증가추세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빈곤율이 감소한 국가의 경우 초기 빈곤율 자체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높았다. 미국은 빈곤율이 1.2% 감소하였지만 최종빈곤율은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은 17.1%이며, 반면 네덜란드는 빈곤율이 3%나 증가하였지만 최종빈곤율은 6.1%에 불과하다.

서구의 빈곤문제는 새로운 특징을 보인다. 첫째 실업자가구의 소득감소뿐 아니라 가족 중 1∼2명이 일자리를 갖고 있음에도 소득감소를 겪고 있는 가구수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사회 전체수준에서 실업률이 낮고 빈곤인구도 소폭이나마 감소하지만, 고용과 실업의 경계가 불분명한 불완전고용의 수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저임금으로 인해 '일하는 빈민'(working poors)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 둘째 전체 빈곤인구에서 고령가구가 다수를 차지하던 양상이 젊은 가구가 다수를 점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가구주의 연령이 젊은 가구의 경우 거의 모든 국가에서 두드러진 소득감소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 이는 현재 서구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청년실업의 급속한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저발전국의 빈곤문제

저발전국의 빈곤문제는 지역 및 국가에 따라 농촌빈곤과 도시빈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 저성장의 빈곤과 고성장의 빈곤 등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띤다. 이 점은 최근 수십 년간의 빈곤율 추이 및 빈곤구조를 살펴볼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1987∼1993년 사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빈곤인구와 빈곤율이 모두 감소하였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빈곤인구가 소폭 증가하고 빈곤율은 감소하였으며, 남아시아 지역과 중앙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빈곤인구와 빈곤율이 모두 증가하였다. 특히 남아시아와 중앙 아프리카의 경우 빈곤율이 39∼43%에 이르러 문제의 심각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극심한 편차가 나타나는가? 저발전국가들의 빈곤문제는 성장의 조건과 사회적 분배구조의 결합방식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조건에서 추진된 국제금융기구들의 구조조정이 빈곤율을 증가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세계은행과 IMF가 권유했던 구조조정은 거시경제적 안정이나 공공부문개혁, 무역자유화와 같은 부문에만 집중되고 빈곤퇴치에는 소홀한 것이었다.

각국의 빈곤퇴치전략

1990년대 말 서구의 빈곤퇴치전략은 크게 일자리 창출을 통한 빈곤집단 해소와 복지정책재편을 통한 빈곤인구 흡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격상 영미식과 프랑스 혹은 유럽대륙식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미국과 영국의 경우, 빈곤심화를 막기 위해 저임금의 일자리를 창출하여 실업률을 낮추고 복지수혜자들로 하여금 저임금의 일자리를 수용하게 함으로써 복지예산을 줄이고 실업률을 낮추는 시장중심의 빈곤퇴치정책이 주를 이루며, 이것이 바로 일하는 복지(welfare to work 혹은 workare) 정책이다. 반대로 프랑스는 기존의 비효율적 복지체계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에서 노동시간감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로 빈곤인구를 흡수하고, 기존의 복지예산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복지체계의 근대화를 시도하는 국가중심적 빈곤퇴치정책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 모두는 강력한 기초복지체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일자리 창출을 통한 빈곤퇴치를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이들 국가들이 최근 들어 제3섹터 개발을 통해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서비스 제공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빈곤문제

외환위기 이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량실업사태, 빈곤율 증가, 이에 따른 가족의 해체 등을 체험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위기를 경험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빈곤증가율이 높다. 세계은행의 1999년 6월 자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빈곤율이 1997년 11.0%에서 1998년 19.9%로 증가하고, 태국이 11.4%에서 12.9%로 증가한 반면, 한국의 빈곤율은 8.6%에서 19.2%로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떤 집단의 빈곤율이 가장 크게 증가하였는가? 외환위기 이후 상위 20%를 제외한 나머지 80%의 가구가 소득감소를 경험하였다. 이를 통해 중간계급 중 일부가 빈곤계층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빈곤문제를 경험한 계층은 기존의 도시빈민, 건설일용직 노동자, 장애인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들이다. 이들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빈곤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보인다. 첫번째는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일감이 급격하게 감소하여 기존의 빈곤계층인 임시직 및 일용직 노동자들이 사실상의 실업자로 전락한 경우이며, 두번째는 고금리하의 중소기업 연쇄부도로 저소득계층의 주를 이루는 단순기능직 노동자들이 실업자로 전락한 경우이다. 이는 외환위기의 빈곤율 증가가 일차적으로 대량실업에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 하나 주목할 현상은 서구와 유사한 일하는 빈민이 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9년 상반기 고용동향에 나타난 취업자들의 고용상태를 살펴보면 불완전고용의 증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같은해 3월을 기점으로 임시직 및 일용직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5%로 상용직 노동자수를 넘어섰던 것이다. 이를 1998년의 수치와 비교해보면 실업률 감소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1999년 6월 현재 전년 동월대비 상용직 노동자의 비중은 7.1% 감소했음에 비해, 임시직 노동자 및 일용직 노동자의 비중은 각각 10.2%와 32.8%로 대폭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 불완전고용의 증가는 급격한 소득감소 현상을 수반한다. 정규직에서 정리해고된 이후 임시직으로 복직된 노동자들의 경우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한국사회는 실업의 빈곤 외에도 노동의 빈곤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떠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맺으며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남미나 아프리카 국가들과 다른 발전노선을 걸어왔다. 미국이나 IMF가 원하는 노선은 아니었을지라도, '자기방식대로'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빈곤율을 점진적으로 감소할 수 있었다. 이는 국제금융기구의 감독 아래 구조조정을 추진하던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에서의 저성장과 빈곤율 증가, 소득불평등 확대 등의 현상과 잘 대비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저발전국에 적용했던 구조조정정책을 한국과 같은 국가에 적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처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심각한 빈곤문제에 직면해 이를 해결할 체계적인 정책이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은 한국 복지정책사에 획을 긋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득의 일부를 보전해주는 정책으로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빈곤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적극적인 고용정책이 보완되어야 한다. 대다수 빈곤계층은 빈곤탈출을 위해 안정된 일자리를 원하지만, 저학력-비숙련 노동자로 향후 노동시장 진입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적극적 자활정책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제3섹터 개발을 통한 일자리 창출' 전략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재의 복지재정 절감과 사회적 자원을 통한 서비스부문에서의 일자리 창출전략이라는 점에서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도 대단히 큰 시사점을 갖는다.

노대명 / 인하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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