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3 2003-07-06   1077

이 땅의 어린 드레퓌스들

최근 살인사건이나 방화사건에서 뒤늦게 진범 시비가 벌어지고 있다. 1999년 전북 삼례 슈퍼마켓 노인 살해사건, 2000년 전북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 2002년 전주 파출소 경찰관 살해사건, 2002년 서울 구로구 연쇄 방화선 등으로 현재 형을 살고 있거나 혐의자로 구속된 사람들이 진범이 아니거나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새로운 변수들이 등장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범인으로 인정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10대 청소년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모두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두 불우한 처지의 청소년들이라는 점이다. 익산사건의 범인으로 현재 옥살이를 하고 있는 C모 군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해체된 가정의 청소년으로 15살 나이에 다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삼례사건의 세 청소년들은 장애인부모를 두었거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었다. 경관 살해사건 용의자들도 소위 동네 불량 청소년들이었고, 방화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청소년은 시설에서 보호되고 있던 청소년이었다. 어린 드레퓌스들이 속출하고 있다.

어쩌면 돈 없고 힘없는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범죄에 노출되기 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무고한 범인으로 둔갑될 가능성도 높다. 어른들이 설정한 이상적인 청소년은 공부 잘 하는 소위 범생이다. 따라서 학교도 안 다니고 심지어 가정도 없는 청소년들은 어른 들 눈에는 제거되어야 할 시한폭탄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대충 꿰어 맞추면 사람들은 대개 그러려니 한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또는 경찰이나 언론이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가정 사정이나 행실을 보아 “그러니 그렇지…”, 이런 반응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문제, 여성문제, 장애인문제라고 하면 대개 피해자를 일컫는 말들이다. 예를 들어, 소외된 노인, 매맞는 여성, 차별 받는 장애인 등의 문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청소년문제라고 할 때, 이것은 대개 가해자 또는 문제를 야기하는 자로서 청소년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왕따, 학교폭력, 체벌 등의 피해자로서 청소년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폭력의 가해자, 일탈의 당사자, 간 큰 청소년 등을 두고 청소년문제를 말한다. 종종 무서운 10대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엽기적인 사건의 범인이 주로 청소년이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청소년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논지를 정당화해주고 있다. 학교는 갈수록 공포의 수용시설이 되어 간다. 보충학습이니 야간자율학습이니 해서 밤늦게까지 감금하는 것도 모자라 0교시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새벽부터 소집시켜 감금한다. 이렇게 되면 교사는 간수가 되는 것이다. 돈 있는 애들은 풀어주어 과외공부를 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애들은 탈옥의 꿈을 안고 응어리를 키우며 살아간다. 실제 탈옥한 아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다방이나 유흥업소 같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실제 티켓 영업을 하다 적발된 업주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기들이 아니면 그런 청소년들이 갈 곳이 어디냐고 항변하지 않는가?

언론은 법을 집행하는 경찰 및 사법 당국의 무리한 수사 또는 짜 맞추기 수사로 인권이 침해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물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대개 불우한 조건을 가진 청소년들이 당국에 의해 무책임하게 쉽게 범인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본인들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로 가정과 학교에서 탈락한 청소년들이 심지어 사회로부터 격리 또는 제거되는 것이다. 아동 및 청소년의 복지와 가족복지 문제는 외면한 채 형사법규의 집행과정만 문제삼는 것은 지극히 표피적인 접근으로 보인다.

아동이나 청소년들의 일탈과 범죄는 모두 성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부모나 교사, 동네 어른들, 사회의 어른들이 그들에 대한 보호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 하여 그들을 일탈과 범죄로 내 모는 것이며, 그것도 모자라 하지도 않은 범죄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 손쉽게 자신들을 면책하려는 짓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진리이다. 책임은 윗물에 있는 것이지 아랫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윗물 썩은 것을 가리고 아랫물 썩은 것을 탓하거나 심지어 아직 썩지 않은 아랫물을 썩었다고 벌주는 것은 참으로 비겁한 짓이다.

몇 년 전, 오랫동안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신창원을 기억하는가? 해체된 빈농의 가정에서 자라 가족과 학교로부터 축출되고 범죄자가 되어 교정복지는커녕 교도소 내에서 가혹행위를 당하고 탈옥하여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러나 오히려 국민적 동정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영웅시되었던 그를 보면서 우리는 곳곳에 결핍되어 있는 복지시스템을 만들어 냈어야 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 가 공권력에 의해 범죄자로 둔갑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참으로 더딘 복지의 발전을 책망하게 된다.

사회적 희생자를 가해자로 처벌하는 나라는 복지국가는커녕 경찰국가도 되지 못 한다. 생산적인 복지는 무엇이며 참여복지는 무엇이냐? 부디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정부의 복지계획이 제대로 수립되기 바란다.

윤찬영 / 전주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사회복지학, pjyoonc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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