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 희망의 조건



“전국민의 의료보험화 : 시행 15년 만에 1인당 진료횟수 11배 증가”

“주택보급률 : 초가삼간에서 고층아파트까지, 주택보급률 81%”

“동물성 단백질 섭취량 변천 : 개구리·메뚜기가 공급해준 단백질, 이제는 성인병 주원인”

“가족계획의 대성공 : 평균출산율 1.6명, 2001년부터 마이너스 인구성장예상”

“전화보급확대 : 190개국과 국제자동화, 세계8위의 통신 선진국”

1995년《월간조선》의 부록 ‘한국인의 성적표 : 피·땀·눈물로 쓴 해방 50년 우리시대의 내용증명’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소제목들이다. “분단과 전란 속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한 대야망의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들려주는 20세기의 신화”라는 편집자의 말처럼 통계표로만 보면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삶의 질’도 큰 성취를 이루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 성취는 부실과 허구로 가득 차 있다. 등록하지 않은 수를 포함할 경우 인구의 10%에 가까운 장애인이 있으면서도 장애인복지예산은 선진국의 10분의 1에 머물고, 의료보험에 의해 해결되는 의료서비스의 혜택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주택보급률이 높다하나 공공주택의 비율은 겨우 1%대에 불과하여 나머지는 국민들이 못입고 못먹고 알뜰살뜰 살림살아 겨우 장만한 결과에 다름아니다. 이 땅의 삶의 질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 그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금년 예산만 해도 그렇다. 정부는 사회복지예산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시민단체의 지적에 대해 “지난해 대량실업사태를 해소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시행했던 공공근로사업과 생활보호예산을 축소한 데서 오해가 비롯되었다. 경기회복에 따라 이들 사업비용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한시적 사업을 제외한 복지예산은 내년에 11.9% 늘어났다. 특히 노인과 장애인 등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예산은 37.5%나 늘어났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민·사회단체의 시각은 전혀 딴판이다. “경기가 회복됨에 따라 사회보장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는 시각 자체가 ‘오해’라는 것이 시민단체의 기본입장이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더라도 우리 사회 빈곤율은 1997년 1/4분기 9.1%에서 1998년 1/4분기 16.2%로 급격히 상승되는 등 IMF 관리체제 이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서민생활기반이 붕괴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정부는 “경기가 회복되었다”고 선언하고 생계보호예산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정부 말대로 경기가 회복되고 더이상 사회보장예산을 늘릴 생각이 없다면 뭐하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제정하였단 말인가?

사회복지예산을 다른 국방예산, 재정투융자 등에 비추어보면 아직도 찬밥 신세이다. 국방도 중요하고 기업투자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복지예산이 주변적 예산으로 취급받는 동안 진정한 국방도, 기업생산활동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국방비는 마땅히 긴축되어야 한다. 공적 자금투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과 부실기업의 대주주, 임원, 외부감사인에 대한 책임추궁도 제대로 안된 채 무차별적으로 투입되는 수십조의 금융구조조정자금은 모두 국민의 부담이다. 경제를 망치고 비자금 등 온갖 명목으로 빼돌려 사용한 기업주와 금융책임자들은 국내외를 드나들며 백주대로를 활보하고 있는데 그 구멍을 우리 국민의 혈세로 충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지난 5월 22일에 여성들이 모여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선언”을 했다. 이들의 주장은 사회복지예산의 부족으로 고통받다 못한 여성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서민들을 돕는 길은 종교단체가 신앙으로 그 쓰린 마음을 쓰다듬는 방법도 있다. 민간단체들이 장애인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자원봉사함으로써 돕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기본은 돈이다. 돈이 없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곳이다. 국민 개개인과 기업들로부터의 헌금과 기부로 복지시설을 돕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기본은 정부의 복지예산이다. 옛말에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옛말’일 뿐이다. 가난은 나라가 구해야 한다. 그것이 왕조시대와 오늘의 복지국가가 다른 점이다. 그런 점에서 ‘생산적 복지’라는 정부의 슬로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복지는 어차피 ‘생산적’이지 않고 ‘소비적’인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소외계층을 위해 정부가 일방적으로 배려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복지는 최종적으로 ‘생산적’인 것이 된다. 그냥 낭비해 버리는 것 같은 사회복지예산이 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조조정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격렬히 저항하는 것도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하여 실업이 곧 생존권의 박탈과 가정파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끊임없이 사회복지예산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참여연대의 사회복지예산확보운동을 비롯하여 민주노동당의 사회복지예산 20% 확보운동 등 여성·장애인·인권·노동자단체들의 줄기찬 요구가 바로 사회복지예산확대이다. “고통받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약속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연설도 사회복지예산과 무관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이것은 결코 대통령이나 정부의 시혜가 아니라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이기도 하다. 1999년 9월 장석준 기획예산처 예산실장은 “올해 예산이 경제살리기에 초점을 맞췄다면 내년 예산은 미래에 대한 투자와 적자재정관리에 무게중심을 두었다”고 강조하였다. 사회복지예산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미래에 대한 투자’가 아닐까?

1999년 12월


박원순 /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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