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 불가피한 변화, 미완의 개혁

지난 10년간 보건의료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완결되지 않았고 아직 뚜렷한 성과도 없는 '미완의 개혁'이다.

물론 1990년대 한국 보건의료가 직면한 변화의 압력은 정부수립 이후 40년 이상 누적된 보건의료체계의 불완전성과 모순에서 유래한다. 1990년대 보건의료가 물려받은 전(前)시기의 유산은 형평과 효율, 그리고 보편성이 모두 결여된 민간부문 위주의 기형적인 보건의료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기형적이고 예외적인 보건의료의 틀은 그동안 정부와 우리 사회가 가졌던 건강과 보건의료의 패러다임으로 볼 때 사실 예정된 것이었다. 즉, 경제성장 최우선의 사회발전모형에서 건강은 제위치를 찾기 어려웠고, 국가와 공공부문의 역할은 극히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그 틈의 대부분을 민간부문이 차지한 것은 물론이다.

민간부문이 정부의 무관심 속에 인력, 시설, 물자 등 기초적인 자원을 신속하게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자체모순의 축적과 함께, 1990년대 들어 변화하기 시작한 보건의료 환경에 직면하면서 그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양적인 서비스는 확대되었으나 지역·계층간 격차는 크게 줄지 않았다. 또 영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민간기관의 '무정부적' 팽창으로 말미암아 비용은 급증하는 반면 질적 수준과 편의는 제자리걸음을 함으로써 국민들의 보건의료에 대한 불만이 크게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치료위주의 장비·시설의존적인 의료서비스가 굳어짐에 따라, 통합적이고 인간적인 보건의료에 대한 욕구가 크게 늘어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공공부문의 역할과 공공의료

이러한 상황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공공부문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보건소가 논의의 핵심을 차지했다. 보건소를 지역보건의료의 중심으로 삼자는 논의가 크게 활성화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보건사업(건강증진, 정신보건, 방문보건 등)의 개발과 실천, 지역의료계획의 수립과 시행 등이 보건소의 중요한 기능으로 거론되었다. 새로운 기능들은 1995년 말 보건소법이 지역보건법으로 전면개정됨으로써 정부의 공식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보건소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건강문제의 변화(급성·전염성질환 → 만성질환)에 따른 변화의 압력, 그리고 보건소의 비효율성 시비에 대한 대응 등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공공부문의 역할을 다시 설정하자는 보건의료 내부의 논의에서 힘입은 바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공공부문의 적극적인 역할설정은 전면적인 것은 아니다. 보건소 자체만 하더라도 종전의 업무범위가 축소되고 효율성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으면서 조직축소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 국립병원, 지방공사 의료원 등 공공병원들은 민간병원에 비교하여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민영화, 민간위탁 등 '구조조정'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보건의료 개혁의 시도와 실패

형평과 효율, 질 등 보건의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보건의료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정부가 주도한 1994년의 의료보장개혁위원회와 1996∼1997년의 의료개혁위원회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1990년대 들어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진행된 보건의료개혁에 영향을 받은 점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한국의 보건의료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위원회에서 다룬 문제는 보건의료의 구조적인 문제부터 국민의 편의와 같은 미시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범위를 망라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의 성과이다. 1990년대의 보건의료 문제를 드러내고 사회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올렸다는 측면에서, 이들 위원회의 성립과 논의의 가치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적인 변화를 기준으로 볼 때 활동의 성과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논의는 무성하나 이루어진 것이 별반 없다는 평가는 거의 전적으로 정부의 역량부족에 말미암은 것이다. 민간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하부구조를 그대로 두고 마땅한 정책수단이 없는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정부의 일관된 의지와 정책개발이 뒷받침되지 않음으로써 대부분의 대안들이 결국 논의에만 머문 공허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사실이다.

풀리지 않은 보건의료 과제

결국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기되었던 보건의료문제의 대부분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태이다. 우여곡절 끝에 의약분업의 시행이 내년 7월 시행으로 굳어진 것을 제외하면, 보건의료의 형평성, 효율성, 질을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10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체화되지 않고 대부분 논의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 이 기간 동안 논의와 정책적 검토를 통하여 문제의 대강이 열거되고 과제가 정리되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계속 논의되었고 지금도 과제로 남아 있는 문제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보건의료의 형평성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경제적 약자에게 충분한 보건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의료보험의 급여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혀야 한다는 논의가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의료보험 참조). 또 지역적 불균형과 계층간의 불형평을 개선하기 위하여 어떤 형태로든 공공의료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물론 공공의료의 경우 현재 나타나고 있는 비효율성 등의 문제점 때문에 민간부문으로 대부분의 기능을 이전하여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어서 결론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형평성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보건의료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우선 1990년대 후반 들어 보건의료부문 예산의 획기적 증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의료보험 재정운영에서도 국고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편 포괄적인 수준에서 국가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은 올해 안에 제정될 보건의료기본법에 반영되었다.

1990년대에도 보건의료의 비효율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고, 개선되기보다는 악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보건의료인력 양성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인력과다, 부적절한 인력의 과다배출, 직종간의 갈등 등의 현상이 나타났고, 병원시설과 고가장비의 과다한 공급도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소규모 신설 의과대학의 난립, 단과 전문의의 과잉, 중소병원의 몰락과 대형병원의 과다, 1993년의 한약분쟁, 최근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와 약사의 갈등 등이 모두 이와 관련된 문제들이다.

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한 논의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보건의료에서 효율성 과제는 전반적인 비용절약의 문제라기보다는 주로 체계화, 질서 등의 목표와 연관된 것이다. 시행이 예정된 의약분업이 그러하고, 그 밖에도 의료제공체계를 좀더 합리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주치의 등록제, 의료기관 단계별 수가차등제 등의 정책대안이 제안되었고 시행여부가 검토되고 있다.

보건의료 환경의 변화와 새로운 프로그램

보건의료체계의 누적된 문제점이 1990년대 보건의료의 변화를 요구한 중요한 요소라면,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건강문제 자체의 변화이다. 여기에서 건강문제란 사망과 질병의 양상을 뜻하는 것으로, 198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의 건강문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즉, 과거 사망과 질병의 주원인이었던 전염성질환과 급성질환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만성질환과 생활습관과 관련된 질환이 중요한 건강문제의 원인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보건의료의 과제 역시 이러한 건강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움직임이 '건강증진사업'의 활성화이다. 1995년 국민건강증진법 제정을 계기로 건강증진사업이 건강문제에 관한 한 정부의 핵심사업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고, 보건소를 비롯한 정부기관은 물론, 민간기관과 조직도 건강증진사업을 가장 중요한 활동의 방법이자 사업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새로운 건강문제로 정신보건, 노인의 건강문제, 직업성 질환 등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정책이나 활동이 새롭게 이루어진 것도 이 기간 동안 나타난 중요한 변화로 꼽을 만하다. 특히 정신보건의 경우, 1995년 정신보건법에 제정되어 만성 정신질환자의 인권보호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고, 느린 속도이지만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어 종래의 정신질환자 대책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비정부부문의 성장

1990년대의 보건의료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현상은 비정부부문의 활동이다. 비록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활성화되긴 하였지만 전반적인 비정부부문의 활동이 보건의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1990년대 전체를 통하여 비정부부문의 활동은 시민사회의 영역보다는 전문인의 영역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1980년대 말 결성된 진보적 보건의료단체들은 이 기간 동안 보건의료인의 사회적 책임, 소외집단에 대한 관심, 보건의료 정책의 개혁 등을 주요과제로 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새로운 보건의료 정책을 제시하고 건강문제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한편, 기존의 직종별 조직을 견제함으로써 보건의료정책의 결정과 사회적 합의과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비자단체가 소비자운동의 차원에서 보건의료 문제를 다룬 것은 오래 전부터이나, 일반 시민운동이 보건의료 정책 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부터이다. 무산되기 직전이었던 의약분업의 시행에 시민운동 단체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최근에는 보건의료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새로운 시민운동이 시작되고 있어 양적·질적인 면에서 차원이 다른 활동이 전개될 전망이다.

이 분야에서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1990년대적 현상이다. 특히 병원노동자들이 조직되어 직업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보건의료정책이나 보건의료 서비스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보건의료와 관련된 사회적 논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한국노총을 비롯한 다른 노동자 조직도 의료보험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보건의료 과제에 대한 논의와 실천에 참여 수준을 높이고 있다.

김창엽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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