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0 2010-07-10   4416

[심층1] 건강보험통합 쟁취사


1. 역사적 배경

올해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이 단일보험자로 통합을 이룬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일반 국민은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을 시작할 때만해도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수백 개의 조합으로 쪼개져있었다. 그래서 소위 강남구처럼 부자조합은 돈이 남고, 철원군처럼 가난한 조합은 늘 적자에 시달렸다. 조합은 낙하산 인사와 각종 부패의 온상이기도 했다. 이에 모든 조합을 하나로 합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8년 농민들의 보험료 거부운동에서 시작한 의료보험 통합운동은 많은 시민, 노동단체의 연대 활동으로 이어졌으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마침내 2000년 7월1일 통합을 이루어냈다.

[표1]의료보험 조합방식과 통합방식



























 


조합방식


통합방식


조직, 관리운영


지역, 직장별로 조직,


조합별로 관리


전국민 단일 조직,


전국 일원적 관리


보험 급여 적용


법정급여 균등,


부가급여는 조합에 따라 차등


법정급여 균등


보험 재정


조합별 독립재정


-위험분산기능 제한


전국 차원에서 보험재정 통합 운용


– 위험분산기능 확대


특징


선별적 제도


포괄적 제도


출처: 차흥봉 “의료보험의 정책결정과정: 제1차 의료보험 통합 논의과정을 중심으로” 『사회복지정책연구』1996. 3: 180 수정보완



2. 의료보험 통합운동

제1기: 시민사회 의료보험 통합운동 이전기

의료보험이 조합주의 방식으로 출범하였지만 초기부터 조합주의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어 왔다. 특별히 초기에 조합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이유는 졸속으로 만들어진 조합방식이 가지는 제도적 한계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조합의 규모가 작아 위험분산 능력이 작고 지불능력의 차이에 따라 조합간 격차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더욱 현실적으로 적자가 나는 가난한 지역조합의 적자와 이에 따른 재원조달 문제가 현실화되고 아울러 의료보험 적용대상자를 확대해야 하는 정치적 압력이 있는 상황에서 신규 대상 지역이나 직장은 상대적으로 기존의 조합보다 경제수준이 낮아 충분한 재원을 조달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가운데, 통합방식으로의 전환이 시도되기도 하였으나 기존 조합체제의 옹호집단은 폭압적인 수단까지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제2기: 시민, 노동 연대 활동기 1: 시도와 좌절

의료보험 통합운동이 본격으로 시민사회운동과 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부터이다. 1988년 농촌지역의료보험 시행 직후 상대적으로 과다한 보험료 부과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항의가 시작되었고 이는 이후 의료보장운동의 맹아적 출발이 되었다. 농민들의 초기 보험료 거부 움직임은 군단위 의료보험대책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이어 <기독교농민회>,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협회>, <YMCA농촌부> 등의 농민운동단체와 <민주약사동우회(이후 건강사회실현 약사협의회)>, <빈의협>, <농어촌사회연구소(농어연)>, <기청의>, <천주교도시빈민회> 등의 보건의료인 단체 및 도시빈민단체와 연대의 틀을 만들어 의료보험시정운동을 전개하였다.

1988년 6월28일에는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의보대책위)>가 결성되었다. <의보대책위>에는 전국 40여개 군단위 의료보험대책위와 48개 단체가 참가하였다. <의보대책위>는 ‘통합주의 의료보험제도 실시’를 초기 목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법률특위를 구성하고 위의 내용을 담은 의료보장법안을 작성하여 야 3당에 제출, 국회 차원의 입법과정에 반영되도록 건의했다. 이후 ‘통합관리운영’과 ‘소득 재산에 따른 누진적 보험료 부과’를 특징으로 하는 ‘국민의료보험법’이 여야만장일치로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제3기: 시민, 노동 연대 활동기 2: 통합의료보험의 쟁취

1994년 김영삼 정부 수립 후 <의료보장개혁위원회>가 결성되어 의료분야에 대한 개혁 작업을 시작하자 사회운동세력도 이에 대응하여 의료보험 개혁운동을 재개하였다. 1994년 4월 11일 노동, 농민, 시민, 보건의료인 등 총 77개 단체와 6개 지역연대회의를 포괄하는 대규모 연대조직인 <의료보험통합일원화 및 보험적용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이하 <의보연대회의>)>가 결성되었으며, ‘의료보험의 통합일원화’, ‘보험적용확대’, ‘공평한 보험료부담 달성’이라는 목표를 걸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의보연대회의>는 민주노총의 사회개혁투쟁에서 의료보험 통합을 임단투(임금단체협약투쟁)에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이 구체적인 사회보장개혁 투쟁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보험료 납부거부투쟁, 서명운동, 보험료 인상저지 투쟁 등 다양한 투쟁전술을 통해 의료보험 통합과 보험적용 확대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97년 경제위기는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또한 1998년 2월 6일에는 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의료보험통합법의 연내 제정을 합의하였고,  또 국민회의가 구성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의료보험통합을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하였다.

1998년 12월 31일에는 지역조합과 공교의보를 부분 통합하는 <국민의료보험법>이 공포되어 1998년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이 설립되었다. 또 1999년 1월6일 <국민건강보험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1월22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7층에서는 의료보험통합 쟁취 축하의 밤 행사가 열렸다. 1999년 2월 8일에는 2002년까지 의료보험 완전통합 시행을 골자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후 직장의료보험노동조합(이하 직장의보노조)과 한국노총이 주축이 되어 의료보험통합 반대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지만 마침내 2000년 7월 1일자로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139개의 직장의료보험이 통합하여 통합의료보험체계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출범하였고 2003년 7월 1일, 구분운영하던 직장과 지역재정을 통합함으로서 마침내 의료보험의 통합을 완성하였다.

[표2] 건강보험 관련 주요정책 및 사건






































연도


건강보험정책 및 사건과 주요 정치상황


1988


1.1 농촌지역의료보험 시행직후 농민들의 과다보험료에 대한 반발


6.28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의보대책위)>결성


1989


3.9 국민의료보험법 국회통과


3.16 노태우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1994


4.11 정부<의료보장개혁위원회> 결성, 의료분야에 대한 개혁 작업을 시작


5.6 <의료보험통합일원화와 보험적용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의보연대회의)>출범


1995


1월 민주노총(준)대표자회의, 의보통합투쟁을 95년 임단투와 결합하기로 결정


9월 전국농민회총연맹산하 각도연맹, 시군농민회단위별로 의보통합결의대회 개최


1996


11월 국민건강보험법안 야당 공동 발의하였으나 통과 실패


1997


10.30 여당 황성균의원회 30인 <국민의료보험법안>제출


11.18 국민의료보험법안이 국회 본회의 통과


12.31 국민의료보험법 공포 (98년 10월 1일부터 시행)


1998


2.8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의보통합을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선정


4.13 복지부 산하<의료보험 통합추진기획단>발족


10.1 지역의료보험(227개조합)과 공교의료보험 통합,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 출범


12.3 <국민건강보험법>국회 상정(2002년까지 의료보험 완전통합시행)


1999


1.6 <국민건강보험법>국회 본회의 통과


2.8 <국민건강보험법>제정


2000


7.1 <국민의료보험관리공단>과 139개 직장의료보험이 통합, <국민건강보험공단> 출범


2003


7.1 지역, 직장보험재정의 일원화로 의료보험이 완전 통합됨


3. 건강보험통합운동의 평가

기나긴 싸움을 통해 마침내 의료보험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요인이 작용했다. 이 중에서도 특별히 세 가지 요인이 주효했다. 첫째, 의료보험 통합 운동은 1988년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그 발화점이 되었고, 여기에 많은 시민단체들, 진보적 보건의료인 및 국회의원들 모두가 다 건강보험 통합화 개혁을 위한 전례 없는 연대를 만들어 냄으로써 성공을 이루어냈다. 둘째, 통합을 주장하였던 집단은 의료보장의 원칙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도덕적 당위성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위험의 분산을 이루어내고 적자 조합문제를 해결하여 조합간 격차를 줄이고 대상자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통합방식이 불가피한 측면이 강했다. 이는 진보적 이념의 문제를 넘어선 정책설계의 합리성 면에서도 통합방식은 조합방식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셋째, 의료보험 통합이 법제화 될 수 있었던 것은 4.19의거 후 민주당의 집권, 전태일의 분신(1970), 동일방직 노동운동(1976), YH무역 여공 농성사건(1979), 부마항쟁(1979), 5.18 광주민주화 운동(1980), 6.10 민주항쟁(1987)에 이르기 까지 군사 정권하에서 이루어졌던 노동자, 농민의 민주화 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여소야대의 국회상황, 그리고 마침내 상대적으로 친 복지적인 국민의 정부의 출범에 이르기 까지 한국사회의 민주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의료보험의 통합은 제도적으로 (1) 보험료 부담의 공평성 확보, (2) 관리운영의 효율화, (3) 가입자의 편의 증진, (4) 적립금 운용의 공공성 강화, 5) 저급여에서 적정급여로의 전환 가능성을 높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에 더하여 기존의 ‘질병보험’에서 ‘건강보험’으로 개념을 확대하고, 가입자 및 이해 관계자의 참여를 제도화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반면 처음부터 통합방식으로 출발하지 못한 까닭에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통합을 위해 소모해야만 했다. 또한 조합방식으로의 출현은 보장성 강화 등 중요한 개혁의 진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료보험 통합은 제도적으로 보다 정치사적으로 더 큰 의의를 가진다. 첫째, 의료보험통합운동은 경쟁을 중시하고, 국가의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세력(조합주의)에 대해 사회적 연대, 국가의 책임, 평등을 지향하는 세력(통합주의)간의 대결을 보여주는 한국 복지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더욱이 그러한 대결에서 사회적 연대 세력의 승리를 이루어냈다. 둘째, 10년이 넘은 긴 싸움은 의료보장과 보건의료이슈를 가지고 진보적 노동, 농민, 보건의료인, 시민단체가 반민주화 독재세력, 대자본에 맞선 한국 정치사의 큰 사건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통합의료보험의 쟁취사는 근대 한국사회에서 시민사회의 탄생이었으며 더욱이 그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전 세계 사회보장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역사이다. 셋째, 특별히 이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 진보적 보건의료전문가, 시민단체가 보장성의 강화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 견고한 연대의 틀을 구축하여 활동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통합의료보험 추진을 결의하는 경험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넷째, 의료보험통합운동은 ‘민주주의’와 함께 ‘건강권’, ‘사회적 연대’를 사회의 중심 이슈로 만들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섯째, 의료보험통합 운동사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을 일부이자 그 상징적인 예를 제공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의료보장의 확대가 민주주의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역사이다.

하지만 의료보험 통합의 역사는 아직 미완의 역사이다. 2000년을 전후에서 이루어진 통합의 이중 ‘관리 및 재정체계의 통합’만을 이루어냈을 뿐이다. 특별히 통합운동 초기 또 하나의 목표였던 ‘보장성 강화’는 20여년이 넘게 답보상태에 있다.


4. 진정한 통합운동의 완성, “100만 원의 개혁”을 위하여

통합 10주년을 맞이하여 진보적 노동, 시민운동은 의료민영화의 저지에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또한 운동의 방향으로 새로이 설정해야하는 것은 바로 ‘진정한 통합의 완성’이다. 구체적으로 (1) 건강보험과 의료급여제도의 통합, (2) 4대 보험 통합과 조세로의 전환, (3) 모든 진료비를 건강보험으로 통합, (4) 보건의료부문 진보적 시민, 노동운동 목표와 연대의 통합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별히 “100만원의 개혁!”, “100만원의 기적!”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진정한 진보진영의 연대를 이루어내야 한다. 여기서 “100만원의 개혁”이란 실제 진료비가 아무리 많이 나와도 1년에 100만 원 이상은 내지 않아도 되는 정책이다. 이는 ‘무상의료의 실현’이며, 진보진영의 영원한 꿈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꿈에 가장 일치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물론 ‘100만원의 개혁’을 성공하려면 보장성에 대한 책임을 기존의 국민에서 국가와 기업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조세로의 전환, 총액예산제, 주치의등록제 등과 같은 핵심정책이 필요하다. 특별히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적 정당은 <100만원의 개혁, 100만원의 기적>을 2012년 진보적 국회의원 후보와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대선공약으로 채택하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아울러 기존의 진보적 정치운동, 민생운동, 교육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다른 분야의 운동과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을 때 한국 사회는 세계 건강보장쟁취사에 또 하나의 모범적인 성공사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 신영전 (건강연대 정책위원장,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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