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건강권 확보 가능한가
공공보건의료 관련 예산 전년 대비 19.3% 삭감
작년과 올해, 우리 사회는 보건의료 문제가 상당 기간 동안 대중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태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상 유래 없는 사태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그런 경험에서 교훈을 얻은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상황을 빚은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겠으나 역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보건의료에 투자되는 재원의 크기와 그 우선순위에 관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보건의료 재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부 예산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 사회, 특히 정부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다.
유엔 사회권위원회, 보건분야예산 전체정부예산 중 1%에 대한 우려
현재 정부가 국회에 제출해 놓은 보건복지부소관 세입세출예산안을 살펴보면, 내년도 보건복지부 예산안 규모는 7조 7,101억 원으로 올해 예산에 비해 3.4% 증액된 수준이다. 예산이 확정된 것이 아니므로 다소의 변동이 있겠지만, 이 3.4%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의 증액율이다. 사실 일반회계 기준으로 할 때 복지부 예산은 1999년 33.7%, 2000년 27.6%, 2001년 40.5% 등 1998년 이후 지난 3년간 매년 두 자리 수 예산 증액율을 보였었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사회복지와 의료보장 부문에 투입되었다. 1998년 사회복지 부문 예산 증액율이 57.4%, 2000년·2001년 건강보험 예산 증액율이 각각 40.0%, 60.8%였던 데 반해, 보건의료 부문 예산이 복지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 규모 면에서는 늘어났으나 1999년 5.6%, 2000년 4.4%로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를 보여왔다.
이 점에 관해 국제기구도 우려감을 표명했다. 지난 5월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이하 사회권위원회)는 사회권조약 이행 여부에 관한 한국 정부의 2차 보고서 심의 후, 최종 견해를 발표하면서 "위원회는 보건 분야 예산의 비율이 (전체 정부 예산 중) 1% 이하이며 더 떨어지는 추세에 있다는 점을 불안하게 느낀다"고 논평한 바 있다. 예산 기능이 주권 국가 정부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회권위원회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공보건의료 기반확충 취지 무색
보건의료 예산 요구안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공공보건의료 기반 확충'이라고 되어 있는 공공보건의료 관련 예산이 전년 대비 19.3% 삭감되어 약 112억 원 수준에 머물렀다. 그나마 내용을 뜯어보면 노인치매전문요양병원 건립에 소요되는 예산이 약 94억 원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사업성 예산은 7억원에 불과하다. 절대 규모 면에서나 상대적 비중 면에서나 공공보건의료는 여전히 찬밥 신세다. 작년에「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의사파업 사태로 정부와 정치권 언저리에서 공공의료 강화에 관한 얘기들이 오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책 논의와 예산 편성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지역사회 접근이 강조되고 있는 정신보건 분야에서 예산만큼은 여전히 수용시설 개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지역사회 정신보건 사업 예산이 전혀 편성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다.
물론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주무부서는 새로 설치해 놓고 예산이 편성되지 않았던 구강보건 분야에 일정 수준의 예산이 편성되었다. 전체 규모야 기껏해야 약 51억 원 수준이라지만 전년도 예산 규모에 비추어보면 3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수돗물불소화 예산이 편성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치아홈메우기 사업, 구강보건실 운영, 노인의치보철 사업 등 예산 내역도 그간 전문가와 사회단체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 것이어서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재정위기에 대한 안이한 정부인식 반영
건강보험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오히려 약 842억 원이 줄어든 2조 7,363억 원 규모로 국회에 제출되어 있는 상태로, 지역건강보험에 대한 국고부담과 공교건강보험에 대한 정부 보험료 모두 감소하였다. 지역건강보험 국고부담금은 복지부가 약 3조 3,423억 원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내 조정에서 무려 23.0%나 삭감되었고, 공교건강보험 보험료는 1,798억 원을 요구하였으나 10.2%가 삭감되었다.
건강보험 재정위기가 본격화되고 수많은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주무부처와 예산당국의 이러한 인식 상의 괴리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복지부가 처음 요구하였던 지역건강보험 국고부담금 예산 규모는 전년 대비 26.8% 증액된 것인 데 비해, 최종 적으로 정부가 제출한 예산 규모는 오히려 2.3%가 줄었다. 약 616억 원에 이르는 요구안과 조정안 예산 규모의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과잉 요구하고 과잉 삭감하는 예산 편성 관행이 건강보험 예산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날 만큼 건강보험 재정문제에 관한 정부 전체의 인식이 안이하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내년에도 건강보험 재정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증폭될 수밖에 없고, 올해 건강보험 재정안정화 대책들에서 나타난 것처럼 정부는 공보험을 위축시키고 사보험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식의 예산 편성이 사보험 도입을 위해 준비된 수순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일각에서는 작년 '의료대란'을 두고 언젠가는 치러야 했을 학습 비용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최근 정부의 민간보험 도입, 건강보험 급여기간 축소, 내년도 보건의료 예산 등을 찬찬히 들여보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가, 적어도 우리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의료인의 고통을 담보로 했던 작년 사태에서 과연 무엇을 배웠는지를 자문(自問)하게 된다. 작년과 올해 그러하였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 나서 싸우지 않으면 이 정부는 결코 국민의 건강을 건사해 주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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