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의 추위에서 인권활동가들이 단식농성을 벌여가며 4년을 투쟁해온 결과로 받아들이기에 국가인권위원회법이 너무나 미흡한 점이 많은 건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올해 11월이면 '인권'에 대한 국가 차원의 의무를 위해 새로운 기구가 출범하여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인권·사회단체들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어 왔던 인권위의 위상문제부터 업무, 권한, 구성, 운영방법 등등 인권위의 실효성과 독립성의 보장을 위해 따져보고 요구할 만한 쟁점들은 아직도 많이 있다. 알맹이 빠진 부실한 모법인 줄 알면서도 시행령과 시행세칙의 제정과정에 인권단체들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건 인권위원회가 한국의 인권현실을 개선하는데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진정한 인권위원의 자질, 인권에 대한 관심과 기여의지
장애계에서도 생활시설에서의 인권문제나, 고용과 교육에 있어서 만연된 차별을 조사하고 해결하기 위해 시행령·시행세칙에 반영하려고 하는 여러 요구들이 있지만, 이런 법리적인 차원에서의 요구사항에 버금가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 이 지면을 빌어 얘기하려고 한다. 바로 인권위원들의 사명감과 자세에 관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하면, 인권위원은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자 중에서 국회가 선출하는 4인, 대통령령이 지명하는 4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있다. 지난 10월 9일 대통령은 이미 11명의 인권위원에 대한 임명을 마쳤다. 이들은 앞으로 3년의 임기동안 국가차원에서 한국의 인권현실을 짊어지고 가야 할 사람들이다. 과거의 인권활동 경력이나 정치적 성향과 관련하여 논란의 목소리가 있었던 위원들도 있으나 그런 과거는 접어두고 이제부터 인권위원들은 자신들이 왜 인권위원으로 활동하는지와 인권이 정말 무엇이고 스스로가 이 세상에 대해 어떤 기여를 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인권은 나의 문제
개인적으로 잘 알고 지내는 장애인 선배 활동가가 애용하는 일화를 인권위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멕시코 사파티스타군의 어느 여성 지도자가 국제네트웍을 통해 지원 온 동맹군들에게 한 얘기다. "당신이 여기 온 이유가 나를 도우러 와 준 것이라면 돌아가라. 그러나 당신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와 동일하다고 생각해서 온 것이라면 같이 싸워보자".
상당수의 인권활동가들과 대부분의 국가공무원들이 자신이 처리하는 민원에 대해 전자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지성인의 사명과 정의감으로 불의에 항거하고 사회 부조리를 개선한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가 피해자요 당사자라는(혹은 일수도 있다는) 자각에서 활동하는 인권파수꾼들은 별로 없다. 물론 공무원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그나마 통치하고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도와주고 민원을 처리해주는 것에 감사하기라도 해야 할 듯 다분히 시혜적인 자세이다.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에 대단한 만족을 느끼는 모양이다. 본인은 장애계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비장애인인데, 사회복지관련 행정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경우를 수 차례 보아왔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착한 일 한다"는 소리를 종종 듣기도 한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서, 장애인 인권활동이 나의 존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혹시라도 인권위원들이 진정사건에 대해 자기 존재와 무관한 현상이라 생각한다면 그나마도 부실한 국가인권위원회에 우리가 기대할 것은 없게 된다. 다른 사람의 인권을 유린하고 평등권을 침해하는 자는 계속해서 또 다른 희생물을 찾아 나설 것이고 이를 묵인·방조하는 사회 속에 특정인이 보호받을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 내 이웃을 괴롭히는 사람은 언젠가 나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인권'은 소외계층을 위한 무슨 복지시책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사회적 가치요,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인 것이다.
당사자주의, 인권위원회의 기본 운영원칙으로 반영되야
장애인 인권 운동의 국제적 흐름으로 최근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당사자주의"라는 패러다임이 있다. 이 당사자주의는 장애인 문제의 진정한 해결자는 장애인 당사자이므로 장애인의 입장과 시각이 정책입안과정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경사로나 편의시설, 기타 정책들이 실제로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런 당사자주의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기본운영 원칙이어야 하며, 인권위원들은 진정인의 입장이 바로 자신들의 입장이라는 전제 하에 활동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나 장애계에서는 여성계처럼 대표성을 띤 장애인 인권위원이 선임되지 못했다. 얼마 전 사직서를 낸 민주당의 이일세 前장애인특별위원장이 국가인권위원회 관련해서 누차 제기해왔던 인구의 10%격인 장애인의 대표성은 인권을 전담하는 국가기구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이 이런 상황이므로 장애계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개별 인권위원들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지침으로 "당사자주의"패러다임을 적용하는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 당사자나 당사자 집단들의 의견들을 모아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당부이다. 다수인 보호시설 관련해서도 이런 전제 하에 그 대상과 범위, 진정절차 등이 논의되어야 수용자들의 진정권이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
인권위원들이 오직 사명감만으로 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장애인 문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연대감을 강조하는 게 아니듯, 인권위원들이 도덕적이라서 진정인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미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키고 인권상황을 전체적으로 한 단계 향상시키는 것이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임을 인권위원들은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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