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3 2023-03-01   593

[편집인의글] 재난의 불평등성, 클리셰 너머의 진실 

최혜지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한 파도, 지진으로 갈라진 도로가 일상을 삼키는 순간은 ‘재난’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클리셰이다. 순식간에 밀려든 파도는 집과 건물의 크고 작음, 화려함과 소박함을 가리지 않고 삼켜버린다. 무너지는 건물 사이를 내달리는 등장인물은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때론 멋진 신사이거나, 때론 초라한 노인이기도 하다. 시각화된 이미지 속에서 재난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계급을 가리지 않고 그 시간, 그곳에 있는 모두를 다르지 않게 대한다. 클리셰 속의 재난은 꽤나 민주적이고, 제법 평등해 보인다. 

태풍, 침수, 산불, 냉해 등이 우리가 경험한 재난의 전부였던 그 시절이라면 폭우가, 한파가 닥친 그 시간, 그곳에 있어야 했던 운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재난은 운이 없는 일부에게만 현실이 될 수 있는, 원칙 없는 운의 불평등한 분배의 결과인 듯했다. 적어도 코로나19 이전까지는 말이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의 일상을 바꾼 코로나19 상황은 운명의 선택을 받은 일부가 아닌 현대인 모두가 재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재난의 보편성을 각성하게 했다. 

무엇보다 코로나19는 재난의 문법은 다분히 정치경제적이라는, 클리셰에 가리워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했다. 재난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사회, 경제, 인적 자원의 층을 따라 재난에 대한 취약성은 차이를 보인다. 속도감 있는 재난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재난 대응 능력은 개인의 정치경제적 배경에 의해 결정된다. 재난 구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국적, 성별, 가족구조 등 흔히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집단을 중심으로 설계되고, 범용 가능한 보편적 대응으로 선전되곤 한다. 그러나 성적 정체성, 국적 등에 가로막혀, 전형에서 벗어난 우리 안의 누군가는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드러낼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복지동향 3월호는 코로나를 계기로 확대된, 재난의 불평등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보건, 복지, 노동, 젠더의 다양한 시각에서 재난 불평등을 분해해 보고자 했다. 먼저 기획원고 1은 코로나19의 부정적 영향이 노인, 불안정노동자,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재난은 유독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가혹하며 그 원인은 자본주의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재난의 불평등은 정치세력화된 시민을 통해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고 사회복지는 시민정치의 일선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획원고 2의 ‘재난 불평등과 건강’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중심으로 재난이 건강의 형평성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살펴보았다. 저자는 누구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지만, 사회경제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 바이러스와의 접촉 가능성, 감염에 대한 신체, 사회적 대응 능력 때문에 건강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코로나19 상황에서 관찰된 건강 불평등은 100년 전 스페인 독감 유행기와 차이가 없다고 강조한다. 

기획원고 3은 재난 불평등과 젠더 불평등의 교차성에 주목하여 재난 불평등을 젠더적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재난에 대한 취약성이 상대적으로 여성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조목조목 살펴보고, 재난의 대응체계가 젠더 민감성을 높여야 함을 설득한다. 

기획원고 4는 외환위기, 코로나19의 두 재난이 노동을 분할하고 노동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외환위기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빌미로 노동권을 와해하고 불안정 노동을 확대했음을 설명한다. 무엇보다 코로나19는 불안정노동자의 노동 기회를 박탈하고 노동조건을 악화시켰음을 강조하며, 재난 불평등이 드러낸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어야 할 우선 과제라고 주목한다. 

복지동향은 장애인의 이동권과 연금 개혁을 살펴보았다. 2001년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된 이후 20년 이상 지지부진했던 장애인 이동권의 실태를 살펴보고,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연금 개혁에서는 바람직한 연금 개혁을 위해 먼저 풀어야 할 오해를 설명하고, 연금 개혁의 희망적 방향을 제안했다. 끝으로 복지톡은 이동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복지재정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복지재정위원회 신설의 계기와 현안, 복지국가와 보편복지에 대한 견해를 나누었다. 

코로나19의 파고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마스크 벗은 일상이 코로나19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수의 우리는 재난이 빚어낸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여전히 난투 중이다. 재난의 고통, 재난이 확대한 불평등, 이 모든 파고를 무사히 견뎌낼 해법은 민주주의의 회복, 연대하는 시민 속에 있다. 지독한 클리셰이지만 지극히 옳으니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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