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3월 2013-03-08   2879

[참여연대史]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07

‘올리브’가 서쪽으로 가서는 안 되는 까닭

2003~2008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변호사)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호에서는 2003년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논란과 반전 평화 운동을 짚어봅니다. 

 

 

2003년 3월 25일 국회 앞에서 이라크전 파병을 반대하는 1인시위 중인 가수 윤도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2001년부터 준비되어 오다가 2003년 3월 20일에 시작하였다. 한국군은 2003년 4월에 참전하였고,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은 2008년 말 자이툰 부대가 최종 철군할 때까지 이어졌다. 사진은 2003년 3월 25일 국회 앞에서 이라크전 파병을 반대하는 1인시위 중인 가수 윤도현. 이라크전 파병 반대 1인시위에는 방송인 김미화, 배우 변정수, 가수 신해철, 배우 정진영 등 유명인들이 참여하였다.

 

 

차병직 변호사

 

 

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영국군을 끌어들인 미군은 바그다드 남동부에 미사일 폭격을 시작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 어둠 속을 가르는 날카로운 금속음에 이어 불꽃이 폭발하는 섬뜩한 장면은 CNN으로 중계되었는데, 그것은 새벽의 신작 미드가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열한 정치적 욕망이 뒤엉킨 21세기의 활극이었다.

 

작전명 ‘이라크의 자유’를 개시하면서 미연합군은 그날이 목요일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예정된 시간에 맞춰 트럭에 태운 병력을 이동하고, 첨단 컴퓨터 장치를 이용하여 방위각을 조정했다. 대부분 승리를 확신했겠지만, 그럼에도 병사나 장교 중에는 취향에 따라 별자리 점괘를 읽으며 자신의 운명을 어루만져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백악관의 부시나 옛 바빌로니아를 향해 진군하던 군인들이 잠시 잊었던 사실이 있다. 날짜의 단위를 일주일로 나누고, 60진법으로 시간과 각도를 만들고, 최초의 문자와 바퀴를 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점성술을 창안한 바로 그 문명의 발상지에 무차별 폭격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이라크가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제국의 수메르인 후예라고 할 수는 없다. 610년 무함마드라는 이름의 아랍 상인이 예언자로 탄생하여 세계사적 경험을 하게 된 이후 이슬람의 움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가 전성기를 누린 중심부가 바로 그 땅이긴 하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정치와 문화의 토대를 지금 이라크와 동일시하기도 곤란하다. 하지만 이라크와 그 수도 바그다드 주변 지역이 품고 있는 역사적 상징성이 오만하고 비정하고 무모한 미연합군의 공격의 폭력성을 더 부각시킨 것은 사실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우뚝 서 있던 세계무역센터 빌딩 두 개가 잿더미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 미국 정부로서는 국면 전환을 위한 심각한 조치가 필요했다. 현실적 시급성에 보수적 정의감이 결합하면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현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힘이라고 믿었을 테다. 아프간을 침공하여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미국은 9·11 사건의 주범으로 알카에다를 지목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그 조직과 협력 관계에 있다고 단정하였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였던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여 자국민 보호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목적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라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몇 차례 한 뒤, 2003년 3월 17일 국제법에 따라 최후통첩을 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구실을 내세운 계획에 따라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개전 전부터 반대가 심하였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었다.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도 아니고 있다는 추측만으로 전쟁을 하겠다는 억지였다. 좋게 말해도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기 위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선전포고는 그들이 주장한 이유를 그대로 모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적법성마저 조건부로 유효했다.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면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셈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미국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무기 색출을 위해 이라크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으로 선전포고라는 어마어마한 카드를 내던지듯 써버린 것이다.

 

2003년 2월 15일 뉴욕의 UN본부 앞과 맨해튼에서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 시위는 그 장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평화단체를 비롯한 NGO들의 네트워크가 가동하여 전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반전 집회가 거행되었다. 그날 모인 세계 평화의 전사들은 실로 대단했다. 뉴욕 50만, 런던 200만을 비롯해 세계 800여 개 도시에서 미국의 야만적 의도를 질타한 군중의 수는 무려 36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기네스 위원회에서 최대의 집회로 공인할 정도였다. 그때 서울의 집회에 참가한 사람은 3000명이었다. 다른 데 비하면 초라한 규모였지만, 그 중심에 참여연대가 있었다.

 

2003년 4월 8일, 당시 참여연대 간사 이경미

참여연대 간사들은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서명을 받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사진은 2003년 4월 8일, 당시 참여연대 간사 이경미.

 

 

신속한 파병, 더 활발한 평화군축운동

 

참여연대 창설 당시 활동기구였던 ‘인권운동사랑방’이 몇 개월 만에 독립해 나갈 때 인권팀만 떠나고, 국제연대팀은 그대로 남아 한두 차례 조정을 거쳐 ‘국제연대위원회’가 됐다가 1997년에 ‘국제인권센터’로 거듭났다. ‘국제인권센터’는 2년 정도 활동하다 1999년 ‘국제민주연대’라는 이름으로 바꿔 독립해 나갔고,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시 국제연대위원회를 부활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참여연대의 해외 창구 역할에 그치는 듯한 국제연대 업무보다 더 역동적이고 구체적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 욕구는 남북문제를 포괄할 수 있는 평화군축으로 모아졌다. 그리하여 박순성, 이대훈을 중심으로 2002년 4월부터 발족 준비 모임이 가동되었으며, 이태호의 실무 작업으로 이듬해 3월 정식으로 평화군축센터가 출범했다. 국내외 정세와 관련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시민사회의 전략과 정책 대안의 모색이 목적이었다.

 

평화군축센터는 발족을 위한 준비 모임 단계에서 이미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전쟁의 발발 조짐이 가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군축센터 소장을 맡게 될 박순성은 이라크 파병 반대 비상국민행동의 정책사업단장을 맡아 이태호와 함께 2월 15일의 서울 집회를 주도하였으며, 미국의 선전포고 직후부터 박정은의 빈틈없는 노력으로 파병 반대의 릴레이 1인시위를 전개하였다. 우리는 전범 국가의 국민이 되기 싫다는 강력한 구호를 내걸었으며, 피켓을 든 임원 한 사람은 청와대 분수대 쪽으로 가려다 친절한 통의파출소 경찰관들의 제지로 30분 이상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라크 파병 반대 비상국민행동이 주도한 2003년 2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한 어린이

이라크 파병 반대 비상국민행동이 주도한 2003년 2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한 어린이.

 

2003년 3월 17일, 이라크 파병 반대 1인시위 첫날, 당시 평화군축센터 발족을 준비하고 있던 초대 소장 박순성

2003년 3월 17일, 이라크 파병 반대 1인시위 첫날, 당시 평화군축센터 발족을 준비하고 있던 초대 소장 박순성. 경찰관이 막아서는 바람에 청와대 앞까지 가지 못했다.

 

파병 반대의 열기가 조금씩 고조되는 가운데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전쟁이 터진 다음날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파병안을 의결하고, 그날 오후 국회 국방위원회까지 통과시켰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진전에 국회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고, 급기야 국회 안으로 진입했다가 끌려나오기까지 했다. 그런 한편 파병 반대의 당위성에 대한 주장과 항의와 호소를 담은 공개 서한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연속으로 보냈다.

 

참여연대의 집요한 노력으로 파병 반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3월 말에는 국회의원 53명이 파병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김창국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가인권위원회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성명을 냈다. 그러자 각 정당은 일제히 정부 편을 들고 나섰다. 민주당은 국가기관으로서 부적절한 태도라고 지적했고, 한나라당은 국가인권위원회의 본분을 망각한 국론 분열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자민련은 엉뚱하게도 항명 행위라고 흥분했다.

 

 

명분 없는 전쟁, 이름만 그럴듯한 부대

 

광화문 광장의 양쪽 가장자리에는 천여 개의 직사각형 석판이 깔려 있는데, 1392년 조선 건국 때부터 지금까지 각 연도별로 그해 일어난 주요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다. 세종대왕 동상 왼편 앞쪽을 더듬어 2004년을 찾아보면 ‘고속철도(KTX) 개통’과 ‘이라크 파병’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역사와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분명히 2003년에 했다.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거부할 적극적 의사도 용기도 없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파병 반대를 관철시키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파병 규모를 줄이고, 시기는 최대한 늦추며, 철군은 빨리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반면 정부로서는 어차피 파병을 할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보내야 명분을 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국회는 서둘러 4월에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고, 4월 17일 서희부대와 제마부대 선발대가 미연합군에 합류했다. 첨단무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이라크를 점령한 미연합군은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5월 1일 사실상 이라크에서 주요 전투 행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라크 상황은 종전 선언 이후에 도리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라크 내부의 무장 저항은 베트남전쟁에서처럼 연합군을 비정규전의 수렁에 빠져들게 했다. 9월이 되자 미국은 추가 파병을 요청하며 사실상 전투부대를 원했고, 반대 운동은 쉴 틈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2004년 2월 추가 파병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공식 명칭 이라크평화재건사단은 자이툰이란 별칭으로 불리었는데, 아랍어로 올리브였다. 올리브의 상징은 평화다.

 

정부로서는 3000명 규모의 자이툰만 파병 부대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조금 어이없는 일이다. 공병지원단 서희와 의료지원단 제마는 합쳐서 700명에 모자라는 병력이지만 엄연한 정규군으로 헌법의 절차를 밟아 파병한 군대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다. 아니면 훗날 조금이라도 늦게 파병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슬그머니 조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부의 안일한 태도는 2004년 8월 다이만 부대 파병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아랍어로 ‘항상 그대와 함께’라는 멋진 이름을 붙인 공군 항공수송부대를 파견하면서 국회의 동의도 얻지 않았다. 대신 이라크에서 슬쩍 자이툰 부대에 편입시켜 버리고 말았다. 참여연대는 즉시 위헌 행위라고 소리쳤으나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다.

 

2004년 여름,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친노 성향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이라크 전쟁과 파병 반대 운동은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는 온몸을 던져 뛰어다니던 간사들을 상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국의 요청을 거절한 프랑스나 독일은 평화의 대의명분 외에 국내 정치 사정이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노무현 정부로서는 파병 논란이 출범과 동시에 맞은 큰 시련이었지만, 시민단체가 평화의 희생을 대가로 밀월 기간을 가질 수는 없었다. 반대 운동이 전쟁도 파병도 전후 후유증도 아무것도 막지 못했지만, 오히려 국민과 정부를 대신해 국가의 자존심을 살려준 의미는 크다.

 

 

그 모든 어리석음을 지적하여

 

9·11 사건 직후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유명하다. 부시는 현대사회에서 악행의 중심이 되는 국가를 북한, 이란, 이라크로 꼽았다. 그것은 전쟁의 예고편이었다. 그 앞에 전쟁을 수식할 국가 이름을 선택하는 일만 남았던 것이다.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와서 보면 기묘하게도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이라크로 결정되고 말았다.

 

부시의 ‘악의 축’이라는 섬뜩하면서도 역사에 남을 만한 수사적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을까? 특별한 다른 사정이 없다면 칼 야스퍼스의 ‘축의 시대’를 모방한 표현일 것이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기원전 200년경까지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 탄생한 시기를 그렇게 불렀다. 고대 사상과 그리스 철학과 동양의 정신세계가 펼쳐진 것은 물론, 불교와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가 성립한 시기였다. 그 시대에 축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었던 페르시아가 지금의 이라크다. 부시와 미국은 어떻게 한 때 인류 정신의 축의 한 부분을 악의 축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악을 제거하기 위한 세계경찰국가로서의 노력이 아니라 평화를 위협하는 정치적 욕심이 빚은 역사적 이름의 대전환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슬람의 어원에는 평화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이슬람 왕조는 코란의 높은 이상과 원칙을 현실에서 지키고 실현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쟁이란 그 자체가 너무나 큰 재앙이므로 전쟁이 벌어지면 최단시간 안에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이며, 그 목표를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무슬림의 의무라고 하며 전쟁을 정당화했다. 부시와 미국 보수파 중심인물들은 어쩌면 무슬림의 그러한 정당화 논리에 매료됐는지 모를 일이다. 그 모든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나선 행동이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이었다. 

 

 

차병직 참여연대 창립 멤버. 전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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