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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14년 10월
  • 2014.09.29
  • 5229

광기의 시대 지나온 

‘닥터 K’에게 묻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제보자’ 류영준 강원대 의대 교수

 

박상규 

사진 박영록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이쯤 살아보니 알겠다. 옛말 그대로, 10년이면 정말 강산이 변한다. 어디 강산만 그런가. 갓 태어난 아이가 학교에 가고, 중년에겐 없던 병도 생기는 시간 아닌가. 오래된 동네를 밀어 금방 고층 건물을 짓고, 수천 년 견딘 산을 깎아 순식간에 도로를 놓는 한국에서 10년 세월은 천지개벽할 시간이다. 

2005년 겨울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 ‘국민영웅’ 황우석 박사가 논란이었던 그때, 난해한 생물학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줄기세포’, ‘체세포’, ‘핵이식’ 등으로 머리가 아팠다. 서울 종로 피맛골에서 동료 기자와 고등어갈비에 막걸리 마시다 토로했다. 

“난 도저히 모르겠다. 내부 고발자 ‘닥터 K’인가 뭔가 그 인간이 당당히 나타나 특강을 하든가. 왜 갑자기 온 국민이 생물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고, 애국주의 열풍이 과학적 근거를 억누르던 ‘광기의 시대’로부터 10년 가까이 흘렀다. 국민영웅 황우석은 몰락했고, 피맛골도 사라졌다. 그리고 황우석 신화를 무너뜨린 제보자 ‘닥터 K’가 드디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황 박사의 생명 윤리(난자 매매)와 연구 윤리(논문 조작) 문제를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닥터 K’ 류영준 현 강원대 의대 병리학 교수. 그는 진실을 알렸다는 이유로, 거짓 영웅의 진짜 모습을 밝혔다는 이유로 짧지 않은 세월 도망자로 살았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광기의 시대를 벗어나 한국 사회는 좀 나아졌나요? 이제 진실이 좀 통하나요?”

지난 9월 19일 오후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는 지난 3월 <나들>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이날도 그는 기자가 있는지 모르고 왔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언론과 기자들의 글들과 행동이 제 머리에 다 있습니다. 어떤 기자가 어떤 기사를 썼고, 무슨 헛발질 했는지…….”

 

제보자 류영준은 왜 하필 지금 자신을 공개한 걸까.

“벌써 황우석 사태가 터진 지 거의 10년이 됐죠. 한학수 MBC 피디 등과 지금도 자주 연락하는데, 10주년이 되면 원하지 않아도 나설 수밖에 없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10년이면 사람 감정도 누그러들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니까……. 역시 계기가 생겼습니다. <네이처>, <사이언스> 등이 특집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마침 대법원에서 황우석 박사에게 최종 유죄 결정도 내렸고요.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10살이었던 그 아이, 계산해보니 17~18세 정도 됐겠더라고요. 한창 사춘기 시절을 지낼 그를 생각하면 (내가 세상에 나가서 말하면)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 건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미리 상의도 할 겸 아이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었죠.”

 

그 소년은 류영준이 제보자로 나선 결정적인 이유였다. 류영준은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소년을 2003년 인천 길병원에서 처음 만났다. 그가 직접 아이의 배에서 피부세포를 뗐다. 류영준은 그 아이의 줄기세포는 꼭 만들어주고 싶었다. 부모로부터 얻은 아이 사진을 연구실 책상에 붙여놓고 ‘노력하겠다’고 수시로 다짐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소년의 줄기세포를 만들어 주겠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연구실을 떠났다. 

2005년 4월 경, 원자력병원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을 때 그는 황우석 박사가 소년의 몸에 줄기세포를 주입해 임상실험을 한다는 소식을 서로 다른 서울대 연구팀원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황 박사가 만들었다는 줄기세포를 믿을 수도 검증할 수도 없는 상황. 수술이 진행되면 아이가 암에 걸리거나 어떤 나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걷게는 못 해줘도 아이는 지켜야 했다. 결국 류영준은 제보자로 나섰다. 

 

“사람들은 어떻게 ‘골리앗’ 황우석과 맞섰냐고 묻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하느님 원망도 많이 했죠. 왜 나한테 그런 힘겨운 선택을 하게 하는지. 다른 길이 있었으면 피했을 겁니다. 근데 괴로워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2005년 당시 PD수첩 방송, ‘황빠’들의 PD수첩 취재팀 처벌 촉구 기자회견 사진. ‘최초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기대는 황우석 박사 본인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흥분시킨 ‘광기의 시대’였다.

그 이후에 일어난 폭풍은 이미 우리가 아는 대로다. MBC <피디수첩>에서 난자 매매 문제를 다룬 후부터 류영준은 도망자가 됐다. 

“날짜도 안 잊어버려요. 완전히 나라가 뒤집어졌죠. 2005년 12월 2일, 제가 환자를 돌보던 원자력병원 병동에 모방송사가 카메라를 딱 설치해 놓았더라고요. 제 담당 과장이 ‘빨리 도망가라, 얼굴 알려지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병원 뒷길로 도망 나오면서 생각했죠. ‘아 이제 시작이구나.’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퇴근하면 절대 집으로 가지 말라’고 했어요. 집에 계시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에게는 6개월 된 우리 아이 데리고 빨리 집(부산)으로 내려가라고 했고요. 그날 아내와 둘이서 찜질방에서 잤습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참여연대에서도 내부고발자 보호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어려웠다. 일이 있기 전 미리 긴밀하게 준비하던 이재명 당시 참여연대 투명사회팀장과 시민과학센터 김병수 간사도 급하게 일이 닥치니 준비가 안 된 상황이어서 여관비 하라며 쌈짓돈을 찔러주기도 했다. 얼마 뒤, 일명 ‘YTN 사태’가 터진다. 류영준은 “뉴스를 보는데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리더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국정원 직원과 당시 과학기술부 관료도 원자력병원에 다녀간 상태였다.

 

“원자력병원 자체가 과학기술부 소속 병원이잖아요. 당시 오명 과기부 장관은 황 박사를 두둔하는 사람이었고. 병원 처지에서도 도저히 일이 안 되기도 했죠. 계속 항의하는 전화 오고, 욕설 듣고 하니까. 그러다보니 담당 과장이 ‘당장 와서 사표 쓰라’고 하더군요. 이후 파악한 바로는 여러 가지 정황이나 증거 상 정권 차원에서 저를 내쳤다기 보다는 밑에서 알아서 움직인 것이라 판단하고 있어요.”

 

그때 대한민국에서 ‘황빠’ 아닌 사람은 얼마나 있었을까.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황빠’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황 박사 연구실을 직접 찾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아니어도 이미 황우석은 정치인, 고위 관료, 언론, 기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황’우석 박사는 ‘김’병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 ‘박’기영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에게도 지지받았는데 이들은 일명 ‘황금박쥐’로 불렸다. 

 

“당시 참여정부에서 큰 프로젝트가 두 개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반기문씨를 UN유엔 사무총장 만드는 거, 다른 하나는 황우석 교수 노벨상 타게 하는 것. 실제로 스웨덴의 카로린스카 노벨 위원회에 있던 한국인 고위 관계자도 ‘그대로 갔으면 황우석이 노벨상 받았을 것’이라고 언론에 밝히기도 했습니다. 제가 바로 옆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황 전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동길감을 얻는 성공적인 접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고급 학문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만날 소 똥꼬나 만지는 사람입니다.’ 이러면서 대통령과 비슷한 비주류 행세를 하죠. 또 허리가 좋지 않은 대통령이 개 척수마비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것을 황전교수는 알았어요. ‘걷지 못하는 개가 줄기세포 치료로 걷을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통령의 지지를 받은 황 박사는 수직상승을 하죠. 언론을 이용해 정권에 접근했고 이제 최고 권력자와 손을 잡았으니 국민 속이기는 얼마나 쉽습니까. 이제 다음 목표는 노벨상 이었던 거죠.”

 

모든 걸 휘어잡은 황우석과 맞섰으니, 그의 도망자 생활이 얼마나 고됐을까. 류영준 부부는 방 두 칸짜리 김병수 간사 집에서 은둔했다. 6개월 된 아이는 부산 부모님 집에 맡겼다. YTN 보도 후 여론이 좋지 않았다. 제보자가 직접 나서 국민에게 설명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이재명, 김병수와 함께 중심을 잘 잡고 위기를 넘겼다. 2005년 12월 중순부터 서울대에서 진상조사위가 활동을 시작했다. 류영준 부부는 서울대 인근으로 거처를 옮겨 조사위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집에는 여전히 갈 수 없었다. 

 

“제보자였지만 저 역시 각 과정에 검증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조사위에 제출해야 했죠. 근데 문제는 증거 데이터가 모두 집에 있었어요. 그걸 갖고 나와야 하는데……. 어느 날 새벽 2시에 집에 가보니까, 기자 약 30명이 집 앞에서 ‘뻗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집에도 못 들어가고 다시 도망 나오는데, 기자들이 ‘류영준이다!’ 하면서 쫓아왔어요.”

 

우여곡절 끝에 확실한 증거를 서울대 조사위에 제출했고 검증과정도 인정받았다. 이번엔 검찰 조사가 류영준을 기다렸다. 또 다른 고난이 시작됐다. 

“검사 9명, 수사관이 50여명 배치됐는데, 정말 갑갑하더라고요. (워낙 전문 생물학 내용이어서) 법대 출신들이 바로 이해하기엔 어려웠지요. 그 중 검사 한 명이 이야기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검사가 참고인으로 매일 나와 달라고 요청해서, 검찰로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그런 생활을 2005년 6월까지 했습니다.”

 

서울대 조사위와 마찬가지로 검찰은 황우석의 조작을 밝혀냈다. 대신 류영준은 ‘백수’가 됐다. 일절 수입이 없었다. 그나마 빚이 없어서 견딜 수 있었다. 그에게 12월 29일은 일종의 기념일이다. 

“2006년 12월 29일 ‘브릭BRIC, 대한민국 생물학연구정보센터’ 연구자들하고 한 번 모였어요. 명목은 ‘과학지킴이상 시상식’이었지만 불우이웃 돕기였어요. 오랫동안 실직 상태라 그분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주었지요. 서로 부둥켜안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황우석 사태가 어느 정도 잦아든 2007년 3월. 류영준은 고려대학교 병원에 레지던트로 입사했다. 그때도 말이 많았다. 병원 내부에서 ‘그런 사람은 절대 받아주면 안 된다’는 말이 나왔고 일부의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류영준은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나 오해를 풀기 위해 4년 동안 성실히 일했다. 서울대 수의대 박사과정까지 수료가 끝났지만, 그는 다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등 인문의학으로 박사과정을 선택해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전문의 취득 후 아산병원에서 2년 전임의 생활을 거쳐 강원대 교수가 됐다. 보수적인 학계에서 인간적인 면과 실력을 동시에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세월에는 오묘한 힘이 있다. 아픔과 슬픔도 어느 시기가 지나면 조금은 웃으며 과거를 돌아보게도 하니까. 진실을 밝힌 대가로 그는 약 10년간 어려움을 겪었다. 

“다음 제보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첫째, 제보할 때 자신에게 이득이 없어야 합니다. 그걸 바라고 제보하면 자신이 망가집니다. 두 번째, 제보를 한 뒤 그 일이 좋게 해결되지 않더라도 자기는 행복해야 합니다. 제보 후 일이 잘 안 풀렸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어요. 셋째, 꼭 혼자의 힘으로도 일어서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제도적으로 제보자를 보고하고 생활 안정을 도와야겠지만, 설사 그게 없더라도 자기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영화 <제보자> 제작과정에도 도움을 줬다. 황우석을 연기한 캐릭터 이경영에게도 조언을 했을까?

“임순례 감독에게도 이경영씨에게도 부탁했어요. 황우석 박사를 전적으로 나쁜 악마로 만들지 말아달라고요. 선악으로 구분하지 말고 다면적으로 그려달라고. 개봉 전에 영화를 보니까, 황 박사 캐릭터는 다면적으로 잘 나온 거 같아요. 일부에서는 따지기도 하더라고요. 왜 황 박사를 긍정적으로 만들었냐고.(웃음)”

 

류영준은 황 박사에게 연민의 감정도 보였다. 말이 나온 김에 더 물었다. 황 박사는 왜 그렇게 노벨상에 집착했나요?

“그는 이미 권력, 재력, 명예 다 가졌었잖아요. 이제 남은 건 노벨상이죠. 그거 갖고 있으면 평생 권력이고.”

 

참여사회 2014년 10월호 (통권 215호)

사람들은 어떻게 ‘골리앗’ 황우석과 맞섰냐고 묻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하느님 원망도 많이 했죠. 왜 나한테 그런 힘겨운 선택을 하게 하는지. 다른 길이 있었으면 피했을 겁니다. 근데 괴로워도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 난리를 겪어도 황 박사는 여전히 건재한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제 눈에는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법원 판결도 났잖아요. 사회적 인기와 명예, 권력 그런 것이 필요한 사람인데, 그게 다 날아갔잖아요. 대법원 판결 전에 맘모스를 복제 한다 뭐 한다 하는데, 이제 사람들이 신경이나 쓰나요?”

 

돌아보면, 기자들만 응징 받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언론사와 기자를 상대로 잘못된 기사를 썼다고 고소, 고발 한 건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은 스스로 한없이 반성해야 합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기자들에게 기본이지 않습니까? 시각이 다를 수는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고 전달하지 않거나 못 본 채하는 것은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요. 후배들 보기에도 민망할 것이고 스스로도 괴로울 것입니다.”

 

제보를 마음먹어도 참여연대를 찾아오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약 2년 동안 (제보를)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최승호, 한학수 MBC 피디, 참여연대 이재명 팀장, 김병수 간사,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님, 왕규창 전 서울의대 학장님, 그리고 어려울 때 도움 준 고려대 선생님들을 비롯해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10년 가까이 지났는데, 한국 사회가 좋아진 것 같나요?

“(한숨) 저는 한국 사회의 쏠림현상, 진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언론, 보고체계가 엉성하고 상황파악을 잘 못하는 권력 등을 지난 10년간 겪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국민의 힘으로 진실을 밝혀내고 쏠림 현상이 잦아든 거 보면 희망이 있는 것도 같기도 하지만……. 글쎄요.”

 

 

어쨌든 거짓된 황우석 신화는 무너졌다. 류영준은 어려움을 겪은 뒤 이제야 자리를 잡았다. ‘광기의 시대’에 겨우 6개월이었던 그의 아이는 이제 초등학생이 됐다. 그리고 류영준을 제보자로 만든 그 소년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모든 게 달라진 지금,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정말 한국 사회는 좋아졌는가? 

 

 

박상규

오마이뉴스 기자. 단언컨대, 서른이 될 때까지 ‘기자’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거의 10년 동안 일했다. 너무 오래 일했다. 곧 세계여행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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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우석 줄기세포 이상한 제보자] 부끄러운 이야기

    그런데, 자신의 실수는 착오라고 간단히 치부하고, 타인의 과오는 팩트에도 맞지 않게 사기이고 범죄라고 매도하는 이상한 제보자의 이야기가 언론에 자꾸 나오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의 왜곡된 현실이 부끄러운 마음에 글을 썼다. 끝.

    2014. 2. 3. 권단 변호사의 IP블로그.

    --- 참여연대는 뭐하는곳입니까??

         이런 내용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고는 있는내용입니까?

        본인의 답변을 알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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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제보자를 제대로 이해하시려면 다음 팟캐스트 방송 "제보자의 두얼굴"을 함 들어 보세요~
    http://www.podbbang.com/ch/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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