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2월 2016-01-30   2436

[만남] 비빔밥을 만들며 – 장항준·김은희 회원

비빔밥을 만들며

장항준·김은희 회원

 

글. 호모아줌마데스사진. 천웅소 참여연대 시민참여팀장

 

<참팟>이라고 참여연대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 방송이 있다. 처음에는 참여연대가 참 여러 일들을 하는구나, 딱 그 정도만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앞날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서 때때로 인생은 스릴러물이 된다. 이번 인터뷰 주인공은 영화감독 장항준과 드라마작가 김은희씨 부부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도, 인터뷰를 <참팟>이랑 함께 진행하기로 했으니 나도 방송에 참여해야한다고 했을 때도 난 답장에 “?” 하나만 찍어 보냈다. 이 형이상학적 기호 하나에 담긴 구구절절한 내 심경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한다. 

『참여사회』를 담당하는 모 간사는 내게 방송 출연을 종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너무 단조로워도 재미없는 거야.” 그러나 정작 해체를 시작한 건 단조로운 삶이 아니었으니. 인터뷰를 불과 3일 남겨둔 어느 아침, 난 왼쪽 눈에 난 커다란 다래끼를 마주해야 했다.

 

참여사회 2016년 2월호

 

 

#1. 그의 이야기 

 

영화감독 장항준. 최근에 한 예능 프로에 출연한 그를 두고 각종 매체들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고 평했다. 그러나 정작 영화 쪽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는 요즘, 방송이 시작되자 스스로도 이런 현실을 의식한 듯 첫 대화가 오갔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를 무척 인상 깊게 봤다는 사회자(안진걸 협동사무처장)의 인사에 돌아온 그의 대답. “슬픈 일이죠. 데뷔작이 대표작이 된다는 건 말이에요. 사람이 뚜렷한 족적을 안 남기면 아무것도 안한 것처럼 보이는데 임팩트 있는 걸 안 해서 그렇지 시나리오 각색도 하고 조금씩 활동을 하긴 했어요. 지금도 영화 준비 중이고요.”

난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회자는 참여연대가 있는 통인동이 영화 쪽과 인연이 깊다며 사설을 길게 늘어놓았다. 20미터만 가면 명필름이 있고, 독립영화 감독님도 여러명 계시고….
“그렇군요. 독립영화 하는 분들이 많이 사실 거 같아요, 동네 느낌이.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는 이 동네(?)하고 느낌이 많이 다른데 어쩌다 참여연대 회원이 되었을까?
“사회구조를 먼저 바꿔야 해요. 그러지 않고서는 답이 없어요. 숨넘어가는 사람에게 물과 밥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사람이 숨넘어가는 일이 없게 해야죠. 그런 면에서 사회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참여연대는 제게 굉장히 소중한 단체예요. 이곳 말고도 기부하는 곳이 여럿 있는데 금액은 참여연대가 가장 큽니다.”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그는 한 아이의 아빠다. 어린 자식을 둔 이들이 대개 그렇듯 세상의 온갖 모순들은 곧바로 아이들의 미래와 연결되기에 시름이 더 깊다. 
“우리 딸은 무엇보다 제발 남편을 잘 만났으면 좋겠어요. 주위에 보면 남자들 사이에선 진국인데 생활이 개판인 사람들, 가정적으로 보면 악인에 가까운 사람들도 꽤 있어요. 근데 법으론 이들을 처벌할 수 없으니까…. 제발 우리 딸에게는 걸리지 마라, 이런 심정이죠.”

만연한 가정 폭력은 차치하고 최근엔 데이트 폭력이 또 다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얼마 전 한 여성이 경찰에 데이트 폭력을 신고하니까 그럼 그 남자랑 헤어지면 되지 않느냐면서 전화를 끊더라는 기사도 있었다. 폭력을 행하는 주체가 거대조직이든 개인이든 ‘폭력’의 본질은 변함이 없을 텐데 현실에선 사회가 정해놓은 피해자상과 정확히 ‘조건’이 맞아야만 비로소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지면 국가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혁신하잖아요. 그들은 그렇게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가는데 우리나라는 너무 쉽게 잊어요. 책에서 봤는데 ‘역사에서 정의의 반대는 불의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하더라고요. 누군가 잊지 않으려고 다시 그 얘길 꺼내면 거기서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으로 보니까 사람들이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외면하는 거죠. 요즘은 큰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내가 2012년 대선 끝나고 막 우는데(아 이건 몸이 아파서 운 겁니다, 하하하) 제가 그랬어요,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날 텐데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관심을 덜 가지는 게 편하긴 한데, 그런다고 또 안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의 일상을 살아야하기에 애써 무관심해지려는 사람들. 때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든 이 세상. 그러나 이 불의한 시대에도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남고자 발버둥치는 이들은 있다. 

 

#2. 그녀의 이야기

 

드라마 작가 김은희. 대표작 <싸인>, <유령>, <쓰리데이즈>. 영화감독 장항준을 작가 김은희의 남편으로 만들어버린, 억대 개런티를 받는 유명작가. 이런 문구들을 떠올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배우 김혜수가 김은희 작가라면 대본도 안보고 출연한다는 그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한 사람이었다. 
“제가 이 동네(참여연대가 있는 통인동)에서 태어났어요. 중고등학교도 다 근처에서 나오고. 인왕산 산기슭에서 나고 자란 셈이죠.”

그녀가 최근에 쓴 드라마 <시그널>은 화제작 <응답하라 1988>의 후속편으로 방영된다. 20%에 육박하는, 종편사상 기록적인 시청률을 달성한 작품의 후속작이라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일 듯하다. 
“<시그널> 쓰느라 올 8월부터는 작업실에 갇혀서 기계처럼 일만 했어요. 시나리오가 4부 정도 완성된 상태에서 캐스팅이 되고 감독님도 정해져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5~16부를 다 썼어요. 손목이 부러질 뻔했죠.”

<시그널>도 그녀의 예전 작품들처럼 사건과 수사 중심의 장르물이다. 로맨틱코미디가 더 잘 어울릴 법한 가냘픈 외양과 달리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무협지를 즐겨 읽었단다. 
“원래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엑스 파일> 같은 건 제 인생의 드라마라 할 수 있죠. 가장 한국적인 삶을 다루어 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장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장르물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이 지금 우리 사회랑 가장 닮아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장르가 어떻건 간에 작품 안에는 작가의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떨어지는 장르물을 쓰면서 작품에 담고자 하는 것은 ‘정의’, ‘진실’과 같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다. 
“<시그널>도 그런데, 제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의 이야기예요. 누군가가 죽임을 당하면 제대로 조사를 하고 처벌이 내려져야하는데, 결국 아무것도 해결이 안 돼도 세상은 금세 잊어버리고 결국엔 피해자들만의 기억으로 남잖아요. 누군가는 함께 기억해주고 그들의 억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줘야죠.”

장기미제 사건이 중심인 <시그널>. 그래서 이번 작품엔 유독 슬픈 이야기들이 많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공소시효라는 제도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도 했다. 특히 요즘에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범죄들을 보면 사회적으로 최약자층에 속하는 아이들의 인권만이라도 제도적으로 강력히 보호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시그널>의 홍보 포스터에서 주인공 차수현 형사 밑에 적혀 있던 짧은 문구 하나가 스쳤다.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하다!’

 

참여사회 2016년 2월호

 

#3. 그들의 이야기 : 인생은 여름방학처럼

 

남편 결혼한지는 18년쯤? 바빠서 요즘은 옛날만큼 같이 못 보내요. 예전엔 23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나이가 들고 애정이 식고 나니까 다른 여자도 눈에 들어오고…. 하하하.
아내 제가 늙고 난 이후에 그렇게 됐죠. 집에서도 각자 TV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요. 
남편 일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하는 편이에요.
아내 근데 요즘 감독님이 일이 별로 없으셔서….

 

질문 그래도 가사노동은 많이 도와주시지 않나요?
남편/아내 (깜짝 놀라며 동시에 외친다) 누가요?
남편 저는 가사노동은 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사도우미도 계시고, 장모님이 저희를 모시고 사시죠. 김은희 작가가 아무것도 안 하니 도와줄 게 없어요. 
아내 장모님을 도와야죠. 근데 저희 엄마랑 남편이랑 너무 잘 지내요. 누워서 서로 발로 베개도 건네주고. 장서방이랑 사는 게 너무 행복해서 죽는 게 무섭다고 하셔요.
 

남편 은희랑 저는 생각이 비슷해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엘리트 출신이 아니라서, 일상이 좀 느슨하다고 해야 되나요? 아등바등 살아서 삶이 좋아지면 좋은데 그런 과정에서 행복이 파괴되니까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아내 아이가 대학 안 가도, 대기업 안 들어가도 행복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어요. 
질문 아이가 두 분의 창작적 재능을 물려받았나요?
아내/남편 (동시에) 그런 것 같아요.
아내 동화를 썼다고 해서 읽어보니 장르물이에요. 뒷부분이 궁금해지더군요. 
 

질문 서로가 서로에게 본받을 점이 있다면요?
아내 남편은 제가 작가생활 시작할 때 사수였어요. 글쓰기나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 등 굉장히 많은 것을 배웠죠. 차수현 캐릭터,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한 사람이 바로 저희 남편이에요. 술 한 잔을 살 때도 남편은 자신보다 돈 잘 버는 사람한테는 절대 안 사고 상대적으로 벌이가 적은 연출부 팀원들하고 있을 땐 흔쾌히 돈을 내는 사람이죠. 남편의 그런 모습을 보며 살 수 있어서 참 좋아요.
남편 자기가 자기 얘기해도 됩니까? 농담이고요. 김은희 작가는 굉장히 어진 사람이에요. 그리고 성실함이 장점인데 정말 끊임없이 발전했어요. 많은 후배 작가들을 봤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성장하는 케이스는 처음이에요. 예전엔 부족함이 많았어요. 날라리에 생각도 없고 남자도 많이 사귀었고. 
아내 오빠도 많이 사귀었잖아!
남편 네, 그렇죠.
아내 저희가 결혼식 첫날밤에 둘이서 ‘바를 정正’ 자를 새겨가며 세어봤거든요.
남편 어쨌든 은희는 지난 18년간 끊임없이 노력해서 스스로를 발전시켰어요. 이런 성장세로 100세까지 살면 아마도 간달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 부부가 꾸려가는 가족의 가훈은, ‘인생은 여름방학처럼’이다. 

 

그들만의 비빔밥

 

팟캐스트 녹음이 끝나고 이들 부부와 점심을 함께 했다. 아내가 시킨 비빔밥에 남편이 자신의 메뉴인 김치찌개 국물을 한 숟갈 넣는다. 맛을 본 아내는 싱겁다고 한다. 남편은 싱거워야 다른 반찬들도 함께 먹을 수 있는 거라고 응수한다. 몇 번 더 맛을 보던 아내가 맛있다며 미소를 짓는다. 한창 요란하게 비빔밥을 만들던 그들은 이내 조용히 자신 앞의 음식에 집중한다. 평생 자신보다 상대의 얼굴을 더 많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부의 숙명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 곧 나도 내 비빔밥 그릇에 얼굴을 파묻었다. 

추운 날씨 탓에 한껏 불을 올린 식당의 방바닥이 뜨끈하다. 물 한바가지를 넣고 오래 끊여낸 숭늉에선 뜨거운 김이 살포시 피어오른다. 부산한 식탁의 풍경 사이로 18년을 함께 산, 어쩌면 내 모습일 수도 있는 한 부부를 바라본다. 오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따뜻하게 덥히고 있다.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참여연대 팟캐스트 ‘참팟’에서 장항준 김은희 회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플레이어가 보이지 않는 경우 : http://www.podbbang.com/ch/8005?e=21886634

* 아이튠즈로 듣기 : https://goo.gl/fLZkf2

* 유튜브로 듣기 : https://youtu.be/CU2DWwyC5I8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