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6월 2016-05-30   1023

[특집] 애국이라는 이름의 병

특집3_고장 난 나라, 빗나간 애국

 

 

애국이라는 
이름의 병

 

 

글. 장은주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철학

 

 

한국 보수의 자가당착
최근 ‘전경련’과 ‘청와대’가 각각 ‘돈’과 ‘권력’을 매개로 ‘어버이연합’ 같은 극우 단체를 정치적으로 활용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 보수 세력의 한심한 민낯이다. 보수 세력 없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상상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일삼는 자들이 스스로를 보수라 하고 또 집권까지 하는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를 외치고 또 스스로를 ‘애국세력’이라 칭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기막힌 정치적 블랙코미디가 아닌가 한다. 그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것에 가장 반하는 짓거리들을 했으니 말이다. 

정치적 체제로서 또 사상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어버이연합 같이 폭력도 불사하겠다는 방식으로 애국을 독점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는 바로 시민 누구든 자신만의 정치적 견해를 갖고 마음대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할 자유를 의미한다. 그런 체제를 정체로 가진 나라에 대한 사랑, 애국이란 바로 그런 자유의 질서와 원리에 대한 헌신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애국 세력이 수호한다는 자유민주주의는 정확히 그 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말 우습지 아니한가.

그러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이 블랙코미디의 백미는 어버이연합이 일당 2만원을 주고 숱한 탈북자들을 동원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북한으로부터 조국을 배반한 자들이라고 비난받고 공격받는 사람들이다. 좀 더 사람다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등지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던 사람들이다. 어버이연합은 결과적으로 그렇게 힘겹게 이제 막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시민이 된 사람들을 푼돈으로 사서 다름 아닌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그래서 다시금 조국을 배신하는 일에 동원한 셈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참으로 잔인한 일이 아닐까 싶다. 

 

참여사회 2016년 6월호(통권 235호)

민족주의적 애국주의라는 일제의 잔재
물론 탈북자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몸은 떠나 왔어도 북한에서 나고 자라며 배운 애국의 방식에 대한 생각만은 버리지 않았기에 그랬을지 모른다. 어찌되었건 자신들의 조국은 이제 남한이고, 정부를 불신한다거나 그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이며,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애국 행위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종북세력 척결’을 입에 달고 다니는 우리 보수 및 극우 세력이 외치는 애국이 바로 이런 북한식 애국하고 똑같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식의 애국주의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지닌 민족주의적 또는 국가주의적 애국주의다. 이것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과거의 공통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겠지만, 사실은 일제가 발전시킨 애국주의의 거울상 같은 애국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애국주의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유사한 애국주의는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되지만, 일제는 이른바 ‘황도유학’을 통해 그 애국주의를 (엉터리지만) 유교적으로 정당화했다. 곧 자신을 낳고 기른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듯이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말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했던 박정희의 유신이 ‘충·효’를 함께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였다. 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 이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애국주의는 너무도 역설적인 일제의 잔재다. 

문제는 이런 애국주의가 아직도 강고하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어버이연합 활동을 하는 노인들이나 탈북자들만이 아니다. 최근 불거진 아이돌 스타들의 역사의식 논란은 청년 세대의 민족주의적-애국주의적 편향을 잘 보여준다. 단순히 보수 세력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배외주의적 공격에서 보듯이,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 역시 자주 민족과 국익을 앞세우며 이성을 잃곤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몇몇 개인이나 단체의 일시적 일탈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앓고 있는, 일제의 영향에 뿌리를 둔, 깊은 병의 하나라고 보고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 

 

민주적 애국주의라는 치료제
지금까지 많은 이들은 도덕적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를 치유책이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는 국가가 무턱대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가치 실체가 아니며 우리와 다른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다른 먼 나라의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연대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인식을 우리 사회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문화의 일부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의 한계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개인이 지닌 불가침의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는 도덕적 개인주의는 근본적으로 옳지만,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만이 그런 가치를 지켜줄 수 있다. 국가 단위의 정치공동체가 무조건 개인보다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가치 실체는 아니지만, 개인이 많은 권리들을 누리고 삶을 위한 물질적 기반을 확보하며 자기실현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 사람들은 아무 매개 없이 쉽게 일면식도 없는 낯선 이방인들과 정서적 일체감 같은 것을 형성할 수 없다. 보편적 인권과 평등한 자유의 원칙 위에서 조직된 민주공화국 시민들의 연대라는 기반 위에서만 세계 시민의 연대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애국주의는 깊은 사회적 병이다. 그러나 치료제는 그에 대한 단순한 경멸이나 부정이 아니다. 국가를 그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약이라고만 여기거나 사라져야 할 악이라고 보는 태도도 아니다.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은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참된 조건이다. 민주공화국의 헌정적 원리와 가치와 제도에 대한 사랑과 헌신, 곧 ‘헌법애국주의’ 또는 ‘민주적 애국주의’가 그 병에 대한 참된 치료제다.

애국주의가 병리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그것을 보수의 전유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보 세력이야말로 참된 애국 세력임을 정치적으로 자명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진보의 정치적 정체성의 핵심은 민주공화국을 제대로 민주공화국답게 만들려는 노력과 분투, 곧 헌법애국주의적 실천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진보는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고, 애국주의라는 사회적 병도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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