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6월 2007-06-01   1203

아버지의 도리와 이사의 의무

기업지배구조에 정답이 없다?

지난 5월 18일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선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당연히 삼성그룹이 발칵 뒤집혔고, “기업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며 반발했다. 기업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 한편으로는 맞고, 다른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다.

아무리 민주화된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기업경영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1인1표 투표를 통해 정할 수는 없다. 기업경영은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고도의 전문성과 함께 상당한 재량권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건전한 기업지배구조는 이사 경영진 지배주주 등 소수의 의사결정자들이 행사하는 재량적 판단을 존중하는 동시에 이 결정의 영향을 받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목표를 조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또한, 기업경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법령에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수의 의사결정자들이 준수해야 할 의무를 추상적으로만 규정해 놓고, 그 의무의 구체적 내용 및 위반에 따른 책임은 법원의 판례와 사회적 규범 등을 통해 ‘진화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현실적 방법이다. 여기서 이사 경영진 지배주주 등 소수의 의사결정자들이 준수해야 할 추상적 의무를 흔히 신인의무라고 한다.

의사결정자의 재량적 판단 존중과 이해관계자의 권익 보호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가장 잘 조화시킬 수 있는 기업조직 모델을 선험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기업지배구조에 정답이 없다’는 주장은 맞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수준의무원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삼성의 경영성과가 탁월한 것을 볼 때 삼성의 지배구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삼성의 암묵적 주장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무를 이행하는 길이 다양하다고 해서 의무의 내용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재벌체제는 이해관계자의 권익 보호라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의 이행에서 심각한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권리와 권한의 정립이 재벌개혁 요체

신인의무(fiduciary duty)에서 fiduciary라는 영어 단어는 ‘타인의 재산 운용이나 사무 처리를 위임받은 수탁자’를 뜻한다. 따라서 신인의무의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위탁자의 이익에 반하여 수탁자가 사익을 추구하는 것을 금지’하는 충실의무(또는 충성의무)이다.

이미 상식이 되었지만, 재벌총수 일가는 전체 자본의 5%도 안 되는 적은 지분을 소유한 사실상 소액주주이다. 물론 총수일가의 직접적 소유지분에 대한 재산권 행사는 그 누구도 제한할 수 없는 그들의 고유한 권리이다.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그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동시에 총수일가는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총수 또는 그 2세가 우수한 경영능력을 갖고 있다면, 5%가 아니라 1%의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경영권은 다른 이해관계자, 특히 주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기 때문에, 위임의 범위 내에서만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으며, 오남용하면 위임관계는 당연히 철회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재산권은 권리이고, 경영권은 권한이다. 이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재벌총수 일가는 소액주주임에도 불구하고 ‘오너’로 군림하고, 회사의 자산을 개인의 사유물로 착각하고, 심지어 이를 자식에게 상속하려고 한다. 이러한 권리와 권한의 혼동, 즉 충실의무 위반을 바로잡는 것이 재벌개혁의 요체이다.

충실의무 위반은 범죄다

충실의무 위반의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회사의 인적·물적 자산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유용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자식 사랑으로 변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상법 제382조의3에 규정된 충실의무를 위배한 행위로, 민형사상의 책임추궁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디 한화그룹만 그러겠는가. 작년 현대자동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 구속될 때에도 현대제철의 사외이사로 있는 전직 법무부장관 출신 인사가 맹활약했다. 지배주주를 감시해야 할 사외이사가, 변호사 선임계도 내지 않고, 지배주주의 형사문제에 개입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5월 29일에는 삼성에버랜드 CB(해외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 대한 2심 선고공판이 열린다. 이 사건의 핵심은 CB의 저가 발행, 계열사의 실권, 이재용 씨로의 배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 등을 포함한 그룹 차원의 조직적 공모가 있었느냐 이지만, 당시 회장비서실의 직원이 이재용 씨를 대신하여 실권주 인수 및 주금 납입 등의 실무를 모두 처리했다는 것은 1심 재판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총수일가의 재산관리나 사적인 활동을 보조하는 전담팀이 있다는 것은 삼성그룹만이 아니라 재벌 전체에 해당되는 일이다.

재벌기업의 주주총회장을 가득 메운 직원들을 볼 때에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물론 직원도 주주이면 주총에 참석할 수 있지만, 그 수백 명의 직원들이 주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주총장에 왔다고 믿을 수는 없다. 총수일가에 대한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를 방해하기 위해 직원들을 ‘야유부대’로 동원하는 것도 의무 위반이다.

직원 몇 명을 재벌총수가 사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행태는, 삼성그룹의 삼성에버랜드 사례처럼 회사의 주식을 헐값에 2세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현대자동그룹의 글로비스 사례처럼 회사의 사업기회를 유용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바늘 도둑을 방치하면 소도둑이 되기 마련이다.

최근 공기업의 감사들이 관광 성격이 짙은 남미 세미나 외유를 떠난 것에 대해 국민의 비판여론이 집중되었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 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한마디로, 남의 돈을 멋대로 쓰면 안 된다. 그런데 공기업의 돈만 남의 돈인가? 민간기업의 돈도 남의 돈이다. 재벌총수는, 공기업 감사와 마찬가지로 남의 돈을 성실하게 관리할 권한과 의무를 부여받은 수탁자이다. 이 간단한 원칙을 엄격하게 집행할 때에만이 재벌기업이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고, 한국은 선진사회가 될 것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연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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