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 불꽃을 털고 차분한 지뢰제거 작업을

『모래시계』신드롬에 대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충격

드리마 『모래시계』는 첫회에 TV를 켠 시청자 두 명 가운데 하나의 시선을 모으는 데서 출발, 마지막회(24회)에는 열 명 가운데 일곱 명 반의 시선을 잡아두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모래시계』가 범국민적인 관심의 초점이 된 또다른 증거는, 평소. TV드라마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 점잖은(?) 칼럼니스트들까지 이른바 ‘모래시계 신드롬’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을 펼치곤 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모래시계 신드롬’이 이처럼 여론의 중심에 놓였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 드라마가 우리 사회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인 ’80년대’를 정면으로 다룬 사실 때문이다. 특히 문민정부의 개혁 에너지가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엉덩이가 있는 풍경화’로 비유될 만한 ’90년대’적인 치우침이 갈수록 거리낌없는 기세로 판을 휘잡아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마치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양 뒤통수를 때리듯 튀어나온 ‘모래시계 신드롬’이 넋놓고 지내던 대중에게 어쩐지 아차직한 충격을 던져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분명 그것은 신선하다고까지 표현할 만한 충격이었다. 역사의 묵직한 아픔에 가슴 눌려보지 못한 신세대는 뭔가모를 걸림을 받아안았을 것이고, 역사와 동침했던 20대를 각자의 골방에서 냉가슴앓듯 반추하던 3, 40대는 시원스런 가슴뚫림을 느꼈을 것이며, 가부장의 꼬뚜레를 꿰고 경제개발의 깃발 아래 앞만보고 걷다가 언제부턴가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초로(初老)의 세대는 어쩌면 『모래시계』같았던 군사정권시대 생존의 논리를 회한(悔恨)으로 되씹었을런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같은 충격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쑥 마주친, 말하자면 우리들이 까맣게 잊고 지내던 ‘낯선’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길모퉁이에서 타인(他人)인 듯이 마주친, 짐짓 원치 않았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바래왔던 낯익은 지인(知人)과의 뭉클한 해후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모두들 그처럼 열광적으로 이 드라마를 지켜 봤으며 이른바 ‘모래시계 신드롬’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기억 저너머를 몽유병자처럼 헤메기

나이를 먹어가면서 갈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지난날을 가슴속에 갈무리해 넣는 일이다. 우리는 과거를 미이라처럼 박제해서 껴안고 살 수도 없으며, 반대로 가슴 한구석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그것을 낱낱이 끄집어 불살라 흐르는 강물에 흩뿌릴 수도 없다. 시시각각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는 몽유병자가 되어 추억 속을 헤메일 수도 없으며 머리 속이 텅빈 허재비의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흉내내서도 안된다. 우리가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모래시계 신드롬’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과거를 되돌아본 시선은 철저하게 멜로드라마 즉 신파(新派)의 틀거리에 기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끊임없이 엇나가는 안타까운 삼각관계를 통해 진행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절망스런 현실의 육중한 철문 앞에서 온몸을 던져 산화(散華)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곳에는 좌절이 있지만 그 못지않은 아름다움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패배감에 몸을 떨던 끝에 그런대로 속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이것이 바로 신파의 정서이며, 또한 『모래시계』의 밑바닥 정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같은 정서 속에는 ‘오늘의 자리에서 내일을 염두에 두고 어제를 바라보는’ 활달하게 열린 기운(氣運)이 결여되었다. 과거라는 닫힌 철문 너머에서 냉정한 현실직시가 아닌 ‘화려하지만 초라한 내면을 지닌’ 신화의 자리로 올라선 비극적인 영웅들의 이야기가 가슴찡하게 그려졌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지난날을 미이라로 박제하여 껴안거나 기억 저너머를 몽유병자처럼 헤메이는 내면풍경을 감추고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이 같은 ‘절망의 재확인과 위안의 갈망’이라는 야누스적인 정서 안쪽으로 열렬히 빠져들어갔던 걸까. 대답은 간단하다. ‘문민정부’ 2년이 지난 오늘날도 지난날 ‘군사독재’ 시절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만 미봉적인 응급처치가 행해졌을 뿐 병근(病根) 제거에 대한 목마른 기대가 수없이 좌절되는 가운데 속병은 휠씬 깊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의 상처에 대해 요 얼마간 잊고 지내던 산파적 카타르시스 요법을 화끈하게 제공하겠다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제안 속으로 앞뒤보지 않고 빨려 들어간 것이다. 하여 어쩌면 ‘모래시계 신드롬’이란 오늘날과 같은 불철저한 문민정권을 통해서는 역사적 상처의 근본적인 치유가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대중적인 절망감의 우회적 드러남일는지 모른다.

절망의 무한순환을 의미하는 모래시계

드라마 『모래시계』가 중반을 넘어선 시점에서 독재정권과 반목하게 된 카지노 대부 윤회장이 자신의 몰락을 어렴풋이 예감했을 때, 딸 혜린이에게 ‘모래시계’를 보여주며 자신의 운명을 빗대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래가 아래쪽 칸으로 다 내려가버리면 우리네 인생은 끝나는 거지’라고.

물론 이같은 비유는 지난날 군사정권 시절의 불도저식 독재정치하에서 몸붙이고 살아가던 삶을 빗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비록 오늘의 생존 뒤에는 내일의 침몰이 예정되어 있을 지라도 모두들 오로지 일단 ‘살아남기 위해’ 이같은 삶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비유법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모래시계’의 비유란 끝없이 반복되는 절망, 즉 절망의 무한순환을 의미하는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모래시계’의 비유를 생존을 위해 독재라는 악마에 영혼을 팔아야 했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악마와의 거래를 거부하고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생존 자체를 내던지고 싸운 사람들에게까지 적용시켰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다시말해 그것은 카지노 대부인 윤회장의 삶에만 해당되는 비유가 아니라 운동권 학생이던 윤혜린이나 좌절당한 삶의 에너지를 보상받기 위해 번연이 끝이 보이는 폭력배의 길을 선택했던 박태수, 심지어는 민주화를 위해 싸움의 길을 선택한 ‘광주의 그날’ 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비유법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 심지어는 민주화운동의 피땀마저 결과적으로 저멀리 막다른 골목이 보이는 절망스런 무한순환의 한도막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얘기다.

가슴속 불꽃을 털고 차분한 지뢰제거 작업을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잠시만 딴 생각하며 누구나 잊을 수 있는 일인 것이, 바로 문민정권시대에 들어와 불철저하나마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 결국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피땀어린 노력에 의해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 연속성을 간과하는 토막난 시선으로 내일의 보다 철저한 문민정권을 바라고 준비하는 기백을 축적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모래시계의 밑바닥 정조인 신파의 패배주의 역시 이 같은 기준에서 볼 때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물론 『모래시계』가 정의파 검사 박상원의 존재를 통해 패배주의에 의한 질식사 가능성을 희미하나마 경계하고 숨통트기하려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작품의 주된 정서에 영향을 미칠 만한 수준이 못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시계 신드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드라마 『모래시계』의 패배주의적 한계를 고스란히 받아 안기에는 이미 문민정부 2년을 경험한 대중들의 정서적 분위기가 전과 달리 활달하게 탈바꿈해버렸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절망의 재확인과 위안의 제공’이라는 드라마의 정서적 공간속에 한동안 목잠겨 있는 대신, 가볍게 그 속을 통과해 나온 뒤 한결 시원스런 몸짓과 목소리로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지난날 상처와 병균(?)에 대해 다시금 골똘히 생각하고 왁자지껄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인기를 그러모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정조가 대중의 정서로 고스란히 연결되지는 않는 것, 그것은 바로 대중이 자신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희미한 징표처럼 보인다. 이제 대중의 머리 속에서는 신파의 시대가 청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곳곳에는 지난날의 아픔이 여전히 지뢰밭처럼 남아 있다. 때로 정교한 모형지뢰를 만들어낸 작품이 등장하여 폭발예행연습을 시도한다면 폭발의 굉음과 불꽃은 순간적으로 대중의 가슴으로 따갑게 옮겨 붙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대중은 가슴 속의 불꽃을 털어버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지뢰제거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문민정권의 진짜 주인은 문민정부가 아닌 ‘문민국민’이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져가는 것 같다.

강영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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