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자유·평등·진보의 시험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미FTA 봉우리를 지나니, 더 큰 봉우리 한중FTA가 떡하니 나타나 아연 긴장시킨다. 한미FTA가 발효되면서 아직 찬성과 반대 주장의 진위를 검증할 시간을 갖지 못했는데, 또 다른 ‘자유무역’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힘에 의해 새로운 세계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전통적인 해금(쇄국)과 책봉-조공 질서를 깨뜨리고 개항과 조약을 통해 서구 문명으로의 대전환이라는 격변에 맞닥뜨려야 했던 19세기 동아시아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강요된 자유
흔히 동아시아 개항의 서막이던 아편전쟁(1839~1842)을 영국의 자유무역과 중국의 제한무역 간의 대결이라 부른다. 영국이 중국의 제한무역을 자유무역으로 전환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건 실제와 다른, 다만 영국의 변명을 합리화한 말에 불과하다.
정작 중국에 자유무역을 요구한 영국은 아편의 생산과 교역 독점권을 동인도회사에 부여하는 보호무역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 정부는 중독성 마약인 아편의 수출이 영국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여론에 아랑곳 않고 아편무역의 장애물인 중국의 제한무역의 벽을 무너뜨리고자 전쟁까지 불사했다. 영국은 높은 보호관세 장벽을 쌓고 사는 유럽 국가들에겐 자유무역을 적용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자유의 사도라 자처하고 자유무역을 근대 보편 원리라 주장하며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에만 강요했다. 강요된 자유, 그 자유무역이라는 유령이 21세기 한반도에 다시 출현했다!
평등으로의 길은 험난하다
아편전쟁의 결과 난징조약(1842)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신호탄으로 동아시아는 문호 개방과 함께 서구와 조약을 체결하여 불평등한 관계를 맺어갔다. 불평등한 조약의 부당성을 깨닫고 심각한 폐해가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은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871년부터 미국과의 조약 개정에 나섰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영국, 독일 등 다른 열강이 방해하기 일쑤였다. 1887년에는 추진 중인 개정안이 불평등하고 굴욕적이라며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후에도 안팎의 압력 속에 개정 교섭은 난항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와 한국 병합 과정을 거쳐 1911년에 이르러서야 서구 열강과의 평등한 조약 관계를 실현할 수 있었다. 불평등한 조건을 평등화하는 데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조건은 일본의 제국주의화였다.
중국의 경우, 일본보다 앞서 영국과 불평등 조약의 폐기를 추진했지만, 영국 상인들의 압력에 굴복한 영국 정부의 거부로 좌절되고 말았다. 힘에 눌려 불평등을 감수해야 했고, 힘을 키워야만 평등 구현이 가능했던 19세기 제국주의 경쟁의 역사가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1876년 조선의 개항에 자주화를 강조하여 근대화를 거부하는 보수나 근대화를 내세우며 자주화를 경시하는 진보의 편향성은 난세를 타개하는 옳은 노선이 아니었다.
진보, 주장만 있고 전략은 없었다
조선에서는 1876년 개항을 전후하여 개화파와 위정척사파가 입장을 달리하며 다퉜다. 위정척사파의 대표 주자 최익현은 개항은 곧 공멸의 길이라며 반대했다.
“저들이 우리가 방비가 없고 약한 존재라는 실상을 알고 강화를 맺으려고 하는데, 앞으로 밀려올 구렁텅이 같은 저들의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응해주지 못하면 저들은 노여워하며 반드시 우리를 침략하고 짓밟아 우리가 이전에 들인 모든 노력은 허망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약 체결이 난리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첫째 이유입니다.”
개화파를 상징하는 김옥균은 서구 문물을 속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패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야흐로 세계는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산업의 크고 많음을 자랑하고 경쟁하는 때이거늘, 아직도 양반을 제거하여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국가의 패망은 기어코 앉아서 기다리는 꼴이 될 뿐입니다. 하루빨리 무식무능하고 수구완고한 대신들을 축출하고 문벌을 없애고 인재를 골라 중앙 집권의 기초를 확립하여 백성의 신용을 얻고 널리 학교를 세워 백성들이 지식을 깨우치게 해야 합니다.”
위정척사파는 문호개방에 반대했다. 개화파는 문호개방이 근대화의 출발점이라며 찬성했다. 이렇게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 망한다는 최익현과 체결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김옥균,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라. 두 사람의 지적과 우려가 모두 그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최익현의 우려대로 결국 조선은 침략주의·제국주의 일본의 탐욕에 희생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김옥균의 말처럼 서구 문명으로의 전환 속도와 역량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금석이었던 것도 분명했다. 위정척사=보수, 개화=진보의 프레임으로 따지면, 보수는 자주화에, 진보는 근대화에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허나, 자주화를 강조하며 근대화를 거부하는 보수나 근대화를 내세우며 자주화를 경시하는 진보의 편향성은 모두 난세를 타개하는 옳은 노선이 아니었다. 절실한 건 진정한 진보의 길, 즉 자주화와 근대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전략적 전망과 실천이었고, 비극은 그것이 부재했다는 사실이었다.
FTA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과 무조건적인 폐기라는 양극단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지금, 19세기 동아시아의 운명을 돌아보며 또 다시 전략 부재의 혼돈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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