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2016년 12월 2016-11-30   1343

[통인뉴스] 혐오에 대한 ‘저항 발언’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혐오에 대한
‘저항 발언’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글. 이기찬 참여사회연구소 간사

 

 

참여사회연구소는 2009년 하반기부터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는 <참여사회포럼 : 대화>를 실시해 왔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참여사회포럼 : 대화>를 다시 시작하면서 최근 우리 사회의 인권과 참여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주목해야할 저서와 번역서의 저자와 역자, 그리고 사회적으로 공유할 만한 깊은 통찰을 전해줄 수 있는 여러 연구자, 전문가, 활동가들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참여사회 2016년 12월호 (통권 241호)

 

‘언어적 따귀’

법학자이자 활동가인 마리 마츠다는 인종혐오발언과 같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언어적 따귀에 비유했다. 따귀를 맞아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깊은 수치심을 주는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수치심 이전에 따귀를 맞는 순간의 무참함과 얼얼함, 상식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폭력이 왜 나에게 벌어지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공황상태가 먼저 펼쳐지기 마련이다. 혐오발언도 이와 같다. 표현력이 떨어지는 소설의 한 자락이나 인터넷의 어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나 댓글에 드러난 혐오발언이 아니라, 내 앞의 구체적인 사람이 그의 생생한 육성으로 나에게 혐오발언을 했을 때의 충격은 따귀에 버금간다. 

문제는 이런 혐오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대수롭지 않게 두루 쓰일 때다. 마츠다에 따르면, 혐오발언은 그 내용이 열등성inferiority에 대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억압된 집단을 향하고, 박해적이고,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며, 비하적이다. 그러므로 혐오발언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사회란 직접적 또는 비유적으로 그 발언의 대상이 되는 사람 또는 집단들이 열등하며 억압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뜻한다. 

‘김치녀’, ‘홍어’와 같은 말들은 그래서 우리 사회가 최근 여성과 지역차별에 얼마나 둔감한지,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단어들은 생각보다 많고 어떤 것은 차마 지면에 옮기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이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며 일부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과거에 ‘공돌이’, ‘공순이’라고 칭하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비하하는 용어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 서울대에서는 ‘지균충蟲’, ‘사배충蟲’이란 호칭이 문제가 되었다. 지균충은 지역 간 교육 환경의 불균형(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지역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사배충은 기초생활수급자의 자녀와 같이 경제적 형편상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취약계층배려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다. 

페미니스트 분석철학자 레이 랭턴은 혐오발언이 상대방을 ‘종속’시키고 ‘침묵’시키는 발언내행위라고 정의한다. 발언내행위란 말이 곧 의도한 행위가 되는 언어행위을 일컫는다. 이는 실제로 말에는 어떤 무시하지 못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권력을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 “꼭 그런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버틀러에 따르면 혐오발언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11월 7일 <참여사회포럼 : 대화>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을 소개한 역자 유민석은 이러한 버틀러의 주장을 잘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혐오발언이 항상 작동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발언의 뒤에 있는 권력들은 겉보기보다 덜 일방적이고 불확실한 것이다. 과거와 달리 혐오발언의 발화자는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과거의 이데올로기와 관습 등이 그 발언에 누적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되받아쳐 말함으로써,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좌절되면 거꾸로 침묵하게 될 수도 있다. 국가권력을 통해 혐오발언을 섣불리 규제하는 것도 반드시 약자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결국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국가 또는 법원은 약자보다 강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이런 방식과 주장을 통해서 혐오발언에 저항할 수 있는 여지와 공간을 넓히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한국에선 무용하다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의 저자로 함께 초대된 오찬호 작가는 혐오발언 자체를 규제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버틀러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그의 논의가 ‘이러나저러나 한국에선 무용하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시장에 대한 신뢰가 있는 미국에서는 혐오발언을 한 사람들의 시장가치가 떨어지(리란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과연 한국에서 이것이 가능할까? 과거에 망언을 하고도 버젓이 TV에 나오는 인사들을, 그들이 정치인이든 언론인이든 연예인이든, 우리는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혐오발언의 ‘가능성’만큼이나 버틀러가 말한 대항발언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결국 누가 더 많이 용감히 발언하고 싸우는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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