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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19년 11월
  • 2019.10.30
  • 506

인간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가?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환상

사람은 오랫동안 자연의 지배자이자 정복자로 군림해왔다. 사람만이 이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자 모든 것의 우두머리인 것처럼 행세해왔다. 내건 깃발은 산업화, 근대화, 경제성장, 개발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것들을 이끈 원동력은 인간의 탐욕이었고, 그 방식은 난폭했다. 그렇게 해서 쌓아 올린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 산업 문명이다. 

 

이 시스템은 거대한 위기를 낳았다.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환경 위기다. 이는 기후뿐만 아니라 지구 시스템 전체를 뒤흔들면서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불평등으로 상징되는 경제·사회 위기다. 이는 인간 삶과 공동체의 바탕을 뿌리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인류는 예측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위험과 불확실성의 협곡에 갇혀 있다. 이 위기는 기존 시스템이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정치의 위기’이기도 하다. 나라 차원이든 세계 차원이든 문제 해결책은 본질적으로 정치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진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이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는 환경위기가 아니라 정치적 위기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런 위기에 우리는 올바로 대응하고 있는가?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말이 있다. 미국 출신 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더글러스 러미스가 사용한 말이다. 1912년 4월 15일, 거대한 초호화 여객선이 대서양에서 침몰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영국을 출발해 미국으로 가다가 그만 빙산과 충돌하는 바람에 1,500명 넘는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은 대참사였다. 그 배의 이름이 타이타닉이었다. 동명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이 배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배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빙산이 가까이에 있다는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항해를 계속하다가 그만 재난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영화가 잘 묘사하듯이 사고 당시 배에서는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한데 그때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했던 또 하나의 냉엄한 현실이 있었다. 잠시 뒤 부딪히게 될, 그리하여 자신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을 빙산의 존재가 그것이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웅장하고도 휘황찬란한 문명의 배 위에서 펼쳐지는 향연은 신나고 흥겹다. 하지만 그 배의 승객들은 그것이 안겨주는 달콤함에 취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재앙’과 ‘죽음’이라는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또는 알면서도 무시했다). 바로 이것이 ‘타이타닉 현실주의’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이 지구가 타이타닉 호와 비슷한 처지에 빠져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참여사회 2019년 11월호(통권 270호)

9월 27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청소년들이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에 나서고 있는 모습 Ⓒ녹색당 

 

생태위기,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한 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지만, 동시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고통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이다. 사람은 단순히 고통을 견디고 이기는 것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의식할 줄 안다. 공감과 연대의 능력.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고통을 나눌 줄 알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이런 능력이 자연과 다른 생명에까지 확장된다면? 다시 말해 오늘날 이 지구와 모든 생명이 당하는 고통을 우리 인간이 ‘나의 일’로 받아들이고 이의 해결에 적극 나선다면? 이렇게 된다면 인간의 위대함은 더욱 높아지고 깊어질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이기적 본성에 찌들어 있지만은 않다. 이기심을 이겨낼 줄도 안다. 이기적 성향과 이기심을 극복하려는 성향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과 경합, 그 만만찮은 갈등과 투쟁을 우리 인간은 받아들이고 또 감당할 수 있다. 인간이 위대한 또 하나의 근거가 이것이다.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인간만의 욕망과 이익을 좇는 것을 넘어 이 지구와 다른 생명체들을 더욱 아끼고 배려한다면? 그래서 생명 세계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한다면? 이렇게 한다면 인간의 위대함은 한층 고양될 것이다.

 

세 번째는 지금의 현실 너머를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다. 지리멸렬하고 남루한 ‘지금 여기’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알고 상상할 줄 안다. 아마도 이것이 ‘희망’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현실에 몸이 묶여 있더라도 그 너머를 꿈꾸고 사유할 줄 아는 능력. 인간의 위대함은 여기서 비롯한다. 이런 능력으로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를 넘어 새로운 내일, 곧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동시에 정의롭고 민주적인 미래를 열어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가장 보람차게 꽃피우는 길이 될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것은 오만이나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추구하자는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완수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의 위기는 인간이 낳은 위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일으킨 자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 빚을 진 자가 빚을 갚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종류의 일이다. 지금 우리는 파국과 구원의 가능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변화 사태가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지구가 보내는 위기의 경보음이 정말 예사롭지 않다. 인간의 위대함을 발휘해야 할 때다. 결과를 섣불리 낙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담대한 행동과 단호한 실천에 나서야 한다. 

 


글. 장성익 환경과생명연구소 소장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학술 연구, 출판 기획,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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