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선언문 – 1994. 9. 10.

참여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사회를 함께 열어갑시다

지금 우리는 시대적 전환기에 서 있습니다. 경제성장이라는 구실을 내걸며 3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국민 위에 군림하던 군부정권은 마침내 국민의 결집된 힘 앞에 굴복했습니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를 계기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경쟁이 가속되면서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편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피땀 속에 출범한 문민정부는 국민의 열망을 외면한 채 개혁의 과제를 표류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에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경색된 공안정국의 분위기는 우리의 민주주의적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시점에 선 우리는 민주주의의 알맹이를 채우고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 여러분의 의지와 지혜를 모아가야 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온 현실을 직시하면서 모두가 참여하는 사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연대의 깃발을 들고자 합니다. 80년대까지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행동은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길거리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참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행동은 사회와 정치무대의 한복판에서, 그리고 국민의 일상생활의 과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문자 그대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주인이 머슴처럼 취급받고 국민의 공복에 불과한 사람들이 주인 위에 군림하는 시대착오적인 현상이 만연해 왔습니다. 누가 권력을 잡든 이러한 본말전도적 현상을 스스로 개선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국민 스스로의 참여와 감시가 필요합니다.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를 함으로써 나라의 주인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실상부한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국가권력이 발동되는 과정을 엄정히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인간성의 존엄이 실현되고 인권보장을 으뜸의 가치로 삼는 정치이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권력에 맞서 싸우면서 자유롭게 말하고 평화롭게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자 힘써 왔습니다. 그러나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는 과제는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수많은 사회문제, 인권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에 대한 무관심은 동료시민으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방기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기필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을 함께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지난 몇 달에 걸쳐 우리는 지방자치와 남북통일, 복지사회의 미래상과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가슴을 열고 논의를 펼쳐 왔습니다.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토론의 장에 참여하였습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 시민운동과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 뜨거운 정열이 넘쳐흐르는 청년학도들, 권력에 의해 부당한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면서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하소연할 곳을 찾지 못하던 시민들이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벌였습니다.

오랜 산고 끝에 우리는 새로운 사회의 지향점을 ‘참여’와 ‘인권’을 두 개의 축으로 하는 희망의 공동체 건설로 설정했습니다. 우리는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약칭 참여연대)’가 여러 시민들이 함께 모여, 다같이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조그만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새로운 시대, 참여와 인권의 시대를 만들어 갑시다.

1994년 9월 10일


* 이 표현은 창립 당시 ‘답답한 사정이 있어도 남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 애태우는 것’의 의미로 사용하였으나, 이는 언어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표현에 해당합니다. 참여연대는 이러한 판단을 각주로 남겨, 앞으로 차별적 표현 사용을 경계할 것임을 밝히고자 합니다. / 2021.5.15. 운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