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 1994-2024 2024-08-26   5610

진보와 보수 시민사회가 함께 추진한 평화·통일 사회적 대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한 수도권 시민들. 진보·중도·보수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가 함께 구성한 <평화·통일비전 사회적 대화 전국시민회의>는 2018년부터 2023년까지 10,000여명의 시민과 함께 대화를 이어왔다.

분단상황과 남북관계는 한반도 주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이에 관한 정책 결정은 정권과 밀접한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국민들이 소외되고 사회적 합의 기반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었다. 그럴수록 더욱더 한반도 문제는 국민들의 실질적 요구나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정쟁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이 일관성 없이 흔들렸다. 그 결과 남북관계에서는 혼선과 협상력 약화가 초래되고 사회구성원 사이에는 ‘남남갈등’이라 불리는 소모적인 사회적·정치적 갈등이 발생하였다.

민주화 이후,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에 관해 사회적 대화와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시민단체, 종교인들, 연구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되어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정치적 이념적 갈등의 가장 중요한 축인 분단문제에 관해, 생각 차이는 인정하고 존중하되 소모적 갈등을 완화할 공통의 합의기반을 도출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시민사회가 제안해온 사회협약을 위한 정치권의 호응이 가시화된 것은 2016~17년 촛불 이후 치러진 2017년 대통령선거를 통해서였다. 선거 과정에서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가 대선 공약의 하나로 발표했고, 당선 후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공식화했다.

이렇게 시작된 평화·통일에 관한 사회적 대화에는 보수·중도·진보 시민사회단체와 7대 종교가 균형 있게 두루 참여했다. 보수적 시민사회단체로는 전국 320여개 회원단체를 보유한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이,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로는 참여연대를 포함해 전국 330여개 회원단체를 보유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중도를 대표해서 한국YMCA전국연맹과 한국YWCA연합회, 흥사단 등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한국 최초의 시민단체들이 결합했다. 종교계에서는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 유교, 천도교, 민족종교 등 7대 종교가 공동으로 구성한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참여했다. 이들은 이 대화의 민간추진기구인 ‘평화·통일 비전 사회적 대화 전국시민회의(이하 통일비전시민회의)’를 2019년 결성하여 지금까지 함께 활동해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를 대신하여 이 대화추진기구에 상임공동의장(정강자), 공동운영위원장(이태호), 공동사무국에 임원과 활동가를 파견하여 이 기구의 설립과 운영, 다양한 사회적 대화 프로그램의 기획과 추진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진보와 보수가 함께 추진한 <평화·통일 사회적 대화>와 <통일국민협약>
보수-중도-진보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가 함께 참여한 통일비전시민회의(2019~)와 그 전신인 통일협약시민추진위윈회(2018)는 지난 7년간 평화·통일에 관한 사회적 대화와 이에 관한 사회협약의 목표와 원칙, 추진 전략과 방법 등을 설계하고, 실험하고, 적용하고, 평가 보완해왔다. 이 실험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민간이 주도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협력하는 사회운동으로서의 ‘평화·통일에 관한 사회적 대화와 사회협약’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기획의 1차적 목표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의 기초를 마련하고 국회와 정부를 포함한 민·관·정의 대화와 합의로 발전시켜 이를 사회협약 혹은 국민협약의 형태로 공식화하는 것이다.

한국판 보이텔스 바흐 협약 : 일회성 행사 배제, 풀뿌리 확산 추구

하지만 보다 궁극적인 목표는 이 기획이 몇몇 토론행사를 통해서 협약 문안을 도출하고 발표하는 일회성 행사에 머물지 않도록 평화·통일에 관한 사회적 대화를 풀뿌리로 확산하고 제도화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 미래상에 대한 숙의민주주의 프로그램을 제도와 문화로서 시민의 삶과 교육의 현장에 확산·정착시키는 것, 이를 통해 형성되는 유무형의 사회적 합의가 생명력을 가지고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남북관계에 관한 한국형 보이텔스바흐 협약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논쟁형 정치교육에 관한 독일 교육학자들의 합의인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지역교육학자간의 법적 구속력이 없는 합의였으나 이념 문제에 대한 진보·보수간 협의를 바탕으로 교육현장에서 공감을 얻어 현실교육 과정에 수용되고 이후 국가정책으로 공식화되었다.

미니공중 대화와 지역공동체 대화의 병행

이 대화 프로그램을 폭넓은 사회운동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전략은 미니공중의 합의와 각계각층 대화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대화참여주체만이 아니라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에게도 대화결과가 존중되려면, 전문여론조사기관이 일정 규모 이상의 시민들(미니 공중)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표본 추출해 참가자 구성의 객관성과 대표성을 보장해야 한다. 대화의 기획과 운영 역시 투명하고 공정하며 민주적이어야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의 동참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풀뿌리로 확산하기에는 너무 많은 행정적 재정적 비용이 소요된다. 일회성에 머무를 우려도 크다. 때문에 통일비전시민회의는 공신력 있는 미니공중 대화와 더불어, 학교나 지역공동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경량화된 대화 모델을 개발하고 확산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었다. 각 지역과 부문에서 시민들이 다수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 운동이 일상화, 대중화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통점을 찾고 차이는 인정하는 민주적 숙의모형 개발

통일비전시민회의는 사회운동으로서 사회적 대화를 지속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공통점을 구하고 차이점은 놔둔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 Agree to disagree)식 합의를 추구했다. 특히 토론에 참여한 시민들이나 단체들이 승자 혹은 패자라고 느끼지 않게 하며, 차이와 더불어 공통분모와 공감을 찾고 발견할 수 있도록 대화프로그램을 설계했다.

통일협약시민추진위윈회(2018)와 통일비전시민회의(2019-)는 사회적 대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앞서 관련 전문가들과 연구단체들의 자문 아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와 협약 체결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숙의 모형을 도입하거나 직접 개발하여 사용해왔다. 숙의 모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①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 모형 : 숙의 전과 후, 참가자 개인의 생각 변화를 측정하는 숙의모형이다. 공론조사 모형은 제임스 피시킨 스탠퍼드대 교수가 1988년에 개발했다. 한국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정책 쟁점에 대한 시민 의견을 수렴하는 용도로 종종 사용해오던 모형이었다. 특정 쟁점에 관해 서로 상반되는 입장, 정보, 전문가 의견 등을 토론 참가자들에게 소개하고 일정 시간 동안 토론할 기회를 제공한 후에 참가자 개개인의 생각의 변화를 측정하는 숙의 모형이다. 이 모형은 보이텔스 바흐 협약 등이 강조한 대화식/논쟁식 교육에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② 합의 모형(통일국민협약 모형): 참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모아내는 숙의모형이다. 통일비전시민회의는 합의형성워크숍(consensus workshop method) 기법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시민의회 모델 등 다른 토론모형에서 유용한 요소를 추가해 통일국민협약 모형을 설계했다. 이 모형은 토론에 참가한 시민들이 특정주제에 관한 자료와 정보, 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청취한 후 스스로 합의를 위한 후보문장을 제안하고 조별 토론과 전체 토론, 최종투표를 거쳐 합의문장을 도출하도록 설계되었다. 한편, 이 모형에서도 공론조사 모형과 마찬가지로 관련 쟁점, 만족도 등에 대한 사전사후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참가단의 생각 변화와 합의의 맥락을 추적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모형은 사회협약(Social Pact) 도출에 유용하다.

6년간 10,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숙의토론 참여

지난 6년간 이 사업을 통해 약 10,000명의 시민들이 사회적 대화를 경험했다. 통일비전시민회의가 2018년부터 진행해온 평화⋅통일 사회적 대화 사업은 크게 ▷통일국민협약안 마련을 위한 사회적 대화 프로젝트를 비롯한 통일부 협력사업 ▷지역 주민, 사회단체 활동가들, 종교인과 함께 하는 평화·통일 사회적 대화 풀뿌리 사업 ▷숙의 의제/교재 개발 사업 3가지로 구분된다.

시민 100명, 총 8일간의 숙의를 통해 <통일국민협약안> 도출

이 중 가장 중심적인 사업(프로젝트)은 통일부와 함께 진행한 통일국민협약 사업(2018-2021)이었다. 약 4년간 진행된 이 실험은 전국을 권역별로 나누어 다양한 방식의 사회적 대화(공론조사형+합의형)를 실험적으로 진행한 후, 그 중 100명의 시민참여단을 추첨형식으로 선정하여 ‘통일국민협약안 도출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실시하는 프로젝트였다. 시민참여단은 2020부터 2021년까지 1년간 총 9일간의 사회적 대화를 통해 통일국민협약안과 권고안을 도출했다. 한편, 서울시, 인천시, 강원도, 경기도 등 광역지방자치단체와 진행한 평화·통일 사회적 대화 사업은 통일국민협약 사업 추진과정에서 이 사회적 대화를 보다 넓게 확산·정착시키고 제도화하기 위해 통일비전시민회의가 각 지방자치단체와 국회, 종교계에 별도로 제안해 진행한 별도의 사업이다.

정권교체 이후에도 지속되는 대화와 장애물

평화·통일에 관한 사회적 대화는 2022년 보수정부인 윤석열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통일대북정책에 대한 사회적 대화’라는 이름으로 2023년까지 계속되었다. 2023년 통일비전시민회의는 통일부의 요청으로 통일방안 개선방향 도출을 위한 합의형 대화를 추진했다. 그런데, 당초 통일방안 개선 공론화에 의욕을 가지고 전문가, 시민을 망라하는 논의를 다각적으로 진행하려 했던 윤석열 정부는 남북관계 악화, 김영호 장관의 취임 등을 계기로 소극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사회적 대화에 경험이 있는 통일부 직원들도 대거 ‘인사이동’ 되었다. 결국, 2023년에 통일방안 개선방향 도출 대화가 전문가, 시민 차원에서 이루어졌지만, 정부가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실질적인 개선을 시도하는 과정이 아니라 규모를 줄인 용역사업 이행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2024년 이후에도 사회적 대화에 정부가 참여할 지는 미지수다.

의제·교재의 개발

평화·통일 사회적 대화의 풀뿌리 확산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손쉽게 사용할 수 있고 알기쉬운 믿을만한 의제와 토론교재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다. 정권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없이 소규모 토론회를 개최하기에 적합한 교재는 특히 절실하다. 통일비전시민회의는 시민 토론용 소책자, 『더 나은 통일을 위한 대화』”(열린책들, 2019)를 출판한 데 이어, 학교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 대화 중등교재, 『토론으로 만나는 평화·통일』”(ORP연구소, 2022)을 출판했다. 특히 『토론으로 만나는 평화·통일』은 학교현장에서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교사단체들이 공동제작한 균형잡힌 대화형 교재로서, 현장교사용 매뉴얼도 제공하고 있다. 통일비전시민회의가 개발한 쟁점해설자료와 토론교재는 보수진보를 망라한 정책전문가와 활동가, 그 밖에 숙의토론의 전문가들이 함께 집필하고 검증했기에 믿고 사용할 수 있고, 정권이 바뀌는 등의 변동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어 일선현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 사업을 통해, 시민 숙의를 통해 남북관계와 한반도의 미래상에 관한 협약안을 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했다. 대화에 참가한 시민, 활동가들은 공정성에 대한 평가, 이해 증진, 만족도 등에서 매우 긍정적이고 높은 평가를 내렸다. 참여한 시민들의 만족도도 98%(2018년)로 유사한 사회적 대화 중 가장 높게 나타났다. 참고로 같은 기간 진행된 신고리원전에 관한 사회적 대화, 입시제도개선에 대한 사회적 대화의 참가자 만족도는 각각 89%, 78%로 알려져 있다. 또한 참가자의 90%이상이 대화가 공정하게 운영되었다고 답했다. 보수진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공정하고 합리적인 토론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다.

“보통 다툼을 걱정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피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를 선호했는데, 오늘 자리를 계기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유연성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 연령별로 고르게 참여하고, 정답 도출보다는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문제를 공유하며 숙의해나가는 과정이 매우 좋았습니다”

2018년 이후 2023년까지 평화·통일에 관한 갈등 현안을 다룰 수 있는 숙의모형, 콘텐츠, 초정파 민간 추진기구가 형성되었고 총 1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이 대화를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 성향을 달리하는 전문가 그룹, 교사 그룹, 퍼실리테이터 그룹, 그리고 이 활동을 지지하는 여야 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그룹이 형성되고 있다. 또한 보수와 진보 교육주체들이 함께 참여한 중등교과서가 제작되어 공교육 현장에서도 대화를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윤석열 정부 이후 2년 간 지속되었던 통일부의 사회적 대화 프로젝트는 2024년 잠시 중단된 상태다.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사업은 2024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통일비전시민회의가 개발하고 보급한 대화모델은 남북관계 이외의 분야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선거제도 개혁방안 마련을 위한 사회적 대화도 그 하나다. 통일비전시민회의도 대화의 분야를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정치개혁, 개헌 등의 분야로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한국의 정치는 갈수록 진영화되어가고 있다. 정치의 진영화와 대의제의 오작동은 전세계적 현상이다. 참여연대가 통일비전시민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이 안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대화의 정착에 나선 이유는 이 길에서 참여민주주의의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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