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는 노란봉투를 포기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 배춘환

배춘환 노란봉투캠페인 최초 기부자, 전 손잡고 대표 ⓒ박상환

2013년 12월 중순 주간지 〈시사IN〉에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47억 원 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셋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시민 배춘환은 기사를 읽고 봉투에 4만 7,000원을 담아 손 편지와 함께 〈시사IN〉으로 보냈다. 편지에는 “이 나라에서 셋째를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해서,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적었다.

〈시사IN〉은 2014년 첫 호에 그가 보낸 돈과 편지를 공개했고 이를 읽은 수많은 ‘4만 7,000원’들이 손을 내밀었다. 현행법상 언론사가 큰돈을 모금할 수 없어 아름다운재단이 동참하면서 노란봉투캠페인이 본격화됐다. 가수 이효리 등 많은 유명인이 함께했고 학계·정치권도 참여하는 등 사회적 관심이 쏠렸다. 약 3개월 동안 4만 7,547명이 14억 6,874만 1,745원을 모았다.

2014년 2월 26일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도 공식 출범했다. 손잡고는 노란봉투캠페인의 기부금으로 해고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입법활동도 펼쳤다. 2015년 4월, 19대 국회에서 손배가압류의 근거가 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개정하는 일명 노란봉투법이 발의됐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손잡고 발기인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도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다.

20대 국회 때도 21대 국회에서도 발의만 되던 노란봉투법은 2023년 11월 9일 드디어 국회를 통과했다. 노조에 대한 손배 청구를 제한하고 하청 노조가 원청과 교섭하도록 사용자 범위를 넓힌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통령 거부권에 부딪혔다. 12월 첫날, 시민이 만든 법을 대통령이 거부했다. 1주일 뒤인 12월 8일 국회에서 다시 표결했지만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노란봉투법이 또다시 좌절된 2023년 12월 겨울, 노란봉투캠페인의 첫 기부자이자 전 손잡고 대표인 시민 배춘환을 만났다.

‘실망’이라고만 말하기엔 표현이 약하고 며칠간 정말로 몸이 아팠다.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전부터 여당이 대통령에게 거부권(재의요구권)을 건의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 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국회에서 재표결할 때도 100% 포기하진 않았다. 그동안 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도저히 기대를 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게 시민으로서 나의 의무 같았다. 노란봉투는 내가 처음 보냈지만 그 뒤에 수많은 분이 있다. 여전히 안부가 궁금한 분이 있는데 ‘불치병이 있는 아이의 아빠’라며 참여한 분이다. 그 아빠가 “아이가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내 아이가 어른이 된다면 좋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참여한다”라고 말한 것을 잊을 수 없다. 부끄럽게도 내가 이런 분들을 대신해 인터뷰하고 있다. 내가 포기하면 그분들을 대신해 포기하는 것 같았다.

인터뷰를 통해 한풀이를 좀 해야 할 것 같다(웃음). 나는 노란봉투법이 처음 19대 국회에서 발의됐을 때 통과될 줄 알았다. 국회의원들이 줄지어 캠페인에 참여하고 단체로 노란봉투 들고 사진도 찍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안건이 올라가지 않은 것을 보고 좌절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손잡고 발기인으로도 참여했고 응원 메시지도 보내줘서, 정권이 바뀐 뒤에는 뭐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또 안됐다. 민주당 의원들은 노란봉투법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카드가 되기 전까지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노동자 출신, 노조위원장 출신인 국회의원들에 대해서 좀 기대를 했는데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나부터 돌아보면 2009년 쌍용차 파업 당시 저녁을 먹다가 뉴스로 경찰 진압 장면을 봤는데 ‘왜 저렇게까지 하나’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2013년 12월에 〈시사IN〉 기사를 보고 그제야 ‘아, 그때 내가 본 뉴스가 그거구나’ 알았다. 그전에 나는 노조도 없는 작은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파업에 대해서 ‘저 사람들은 노조도 있으면서 참 이기적이다. 월급 올리려는 밥그릇 싸움인데 이렇게 민폐를 끼치면서 파업을 하냐’고 생각하며 살았다.

언론이 만든 이미지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빨간 띠 두르고 길바닥에 앉아서 구호 외치는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양복 입은 아나운서가 ‘불법파업’이라고 표현한다. 노란봉투법 반대 근거를 들어보면, 노조가 결성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고는 “한국의 노조 결성률이 저조하니까 노란봉투법은 노조가 있는 소수 노동자만을 위한 법”이라고 한다. 빨간색을 칠해놓고 “넌 빨개서 안 돼”라고 하는 식이다. 그런 말들을 내가 흡수했고 동료 시민인 노동자가 왜 저렇게 절실하게 외치는지 물음표를 안 가졌다는 게 나 자신에게 충격이었다.

정말 딱 10년이 됐네.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그때 왜 그랬지?(웃음) 돌이켜 보면 이기적인 이유였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너무 안 됐기 때문에 (돈과 편지를) 보낸 게 아니라 내가 이 나라에서 셋째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니 정말 갑갑해서 보낸 거다.

나도 예전에 해고를 한번 당해봤다. 정체성이 무너진 느낌이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버려진 기분이 든다. 게다가 그때 해고노동자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당사자뿐 아니라 아내 분이 돌아가신 사례도 있었다. 손배가압류가 제도적으로 허용되니까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회사가 아니라 국가가 청구한 돈도 있었다.

그때 나는 파업이 불법이고 나쁘다고 생각했지만(웃음), 아무리 그래도 국가가 국민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충격이었다. 이런데 내가 어디서 희망을 찾아 셋째를 낳겠나. 그래서 분노가 폭발했고 서랍을 열어보니 아이 태권도 학원비밖에 없어서 그 돈을 보냈다.

남편이 〈시사IN〉을 정기구독했는데, 가판보다 배달이 늦지 않나. 제 편지가 지면에 공개된 것도 모르고 있다가 〈시사IN〉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언론사에 돈을 보내면 안 된다. 이걸 왜 보냈냐”고 혼내려는 줄 알고 엄청 떨었다(웃음). 그런데 독자들이 4만 7,000원을 계속 보내서 입금 알람이 사무실에서 계속 띵똥띵똥 울리는 바람에 업무를 못 보고 있다는 거다. 그때는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다. 손배가압류가 그토록 심각한 문제인지도 몰랐던 거다. 내가 얼마나 노동 문제에 무지했냐면, 이후 〈시사IN〉 인터뷰를 했을 때 기자에게 ‘파업은 진짜 불법인가요?’라고 질문할 정도였다(웃음).

뿌듯한 마음이라기보다 안심이 됐다. 사람들이 4만 7,000원을 보내는 이유가 별로 거창하지 않더라. ‘이번 달에 에센스를 안 산다’, ‘우리 가족 이 달에 외식 안 한다’ 이런 사연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우리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돼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아무도 손 내밀어주지 않을 것 같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분이 함께해준 거다. 아이를 낳아도 되겠다고 희망을 봤다.

내가 대표가 된 건 손잡고 2기 때였다. 손잡고 1기는 캠페인이 뜨거워서 돈이 모이는 단계였고 정말 현명하게도 그 돈을 이용해 노동자를 지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손배가압류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란봉투법 입법활동도 함께했다. 그땐 3년이면 활동이 끝날 거라고 생각해서 단체가 법인 등록도 안 했다. 그러다가 정치인들의 관심이 사라지면서 상시 운영해야 하는 단체로 변했다. 법안 통과가 정관상 목표라서 그전에는 단체가 해체될 수 없다.

그때 “이 단체는 시민으로부터 시작했으니 시민이 대표를 맡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처음 편지 쓴 사람이 대표를 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이 모이면서 내가 대표를 맡게 되었다. 사실 손잡고에 함께하는 변호사 등 여러 전문가를 보면서 기가 죽기도 했는데, 점점 ‘시민이라는 분야의 전문가는 시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현실의 문제를 감각하고 판단하는 건 결국 시민 아닌가. 그래서 나중에는 시민으로서 뿌듯한 자존감도 생겼다.

물론 이렇게 입법이 오래 걸릴 줄은 모르고 대표를 맡은 거다(웃음). 그리고는 약 7년간 대표로 일했는데, 배를 다 만들어놓고 물 들어오길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버틴 게 가장 훌륭한 일 같다. 버티는 데 에너지가 진짜 많이 들었다.

ⓒ박상환

나는 스스로 합리적인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시민으로 세금 잘 내고 법규 잘 지키고, 심지어 꼭 안 내도 되는 적십자 회비를 한 번이라도 안 내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았다. 그리고 국가 권위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입법 전문가로서 좋은 법을 잘 굴러가게 할 거라는 신뢰도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도 아닌데 국가가 사람이 죽도록 몰아갈 수 있는 현실을 보면서, 그 권위가 뭐였나 생각하게 됐다. 아, 그냥 기득권의 이기적인 마음이었구나.

이전의 나는 ‘질문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노란봉투를 만나고 ‘질문이 생긴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게 가장 큰 변화인 것 같다. 예전에는 그저 주어진 일을 잘하려고 ‘어떻게 잘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왜 그렇지?’라고 전제를 물어본다. 그래서 삶이 피곤하다(웃음).

그렇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을 보게 됐으니까. 저는 손잡고 운영위원들을 보면서 굉장히 감동을 받는다. 아무 대가 없이 ‘이게 옳은 일’이라는 생각으로 헌신하는 분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런 세상을 알게 돼 감사하다.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다. “뉴스에 나오는 세상은 너무 나쁘지? 그런데 뉴스에 나쁜 놈들이 많이 나와서 그렇지,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아. 엄마랑 일하는 분들 봐봐. 남을 위해 자기 능력을 쓰는 멋진 사람들 덕분에 아직 세상이 안 무너지는 거야.” 이제는 이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피곤해도 지금이 좋다.

사실 손잡고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캠페인 했고 입법 청원도 했고, 정말 다 했다. 국회로 공이 넘어갔으니까 그만할 때라는 생각도 했는데 이제 오기가 생긴다. 나중에 법안이 정말로 통과되는 날, 노란봉투캠페인에 참여한 분들의 사연을 내가 다시 얘기할 거다.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아 보여도 괜찮다. 예전에는 내 안에서 희망을 만들어내야 하는 줄 알았는데 희망은 밖에서 오더라. 10년 전에 나는 아이 키울 희망도 없었는데 밖에서 희망이 몰려오지 않았나.


글 장슬기 미디어오늘 기자 사진 박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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