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하루 지구생각] 사람다운 세상살이

가족 여행 중이었다. 시절이 어수선한 와중이었으나 한참 전에 잡힌 일정이라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일단 출발했다. 그러나 내 감각은 온통 뉴스에 꽂혀 있었다. 남도의 빈 밭에는 기러기 떼가 내려앉았는데 농민들은 밭일할 때 쓰는 트랙터를 끌고 상경하고 있다는 속보를 접했다. 국회가 발의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대통령 권한대행인 국무총리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곧이어 남태령 일대에서 경찰에 가로막혀 대치 중이라는 소식, 2명이 연행되었단 속보가 떴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목숨은 아무도 없는데, 우리 삶의 근본인 밥상 주권은 삶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데도 농민의 목소리는 언제나 희미했고 쉽게 무시당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물 폭탄에 목숨을 잃어도 농민의 삶이 테이블에 제대로 올라온 적이 있었나 생각하니 울분이 차올랐다. 농민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대할 방법을 찾다가 후원 계좌를 알게 되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소액을 송금하고 나니 미안한 마음 한 자락이 살짝 가벼워졌다.
영하의 추위 속에 경찰과 대치 중일 농민과 트랙터가 다시 생각난 건 한밤중이었다. 농민들 곁에 수많은 시민이 함께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농민들과 함께 밤을 지샜고 밤샘 시위 현장으로 닭죽, 핫팩, 어묵, 김밥 등 응원 물품들이 밀려들었다고 했다. 잠이 확 달아났다. 함께하지 못하는 시민들이 보내는 연대의 마음을 읽어 내려가는데 눈이 뜨거워졌다. 아침이 되면서 농민들과 함께하려는 시민들이 점점 늘었다. 그리고 28시간 만에 차벽이 열렸다. “막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합법한 시위고, 저희는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민주시민으로 거듭나는 시간을 살아내는 중이다.
도시 문화에 익숙한 청년들이 농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었다는 사실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감격스러웠다. 농민들을 분노하게 만든 양곡관리법이란 간단히 말하면 남는 쌀을 정부가 매입하고 양곡 가격이 평년 가격 아래로 하락하면 차액을 정부가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농민만을 위한 정책 같지만 결국 우리가 곡식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기본 장치가 양곡관리법이다. 그러니 농민의 분노에 수많은 시민이 연대한 것은 당연한 권리행사였던 셈이다. 이런 연대야말로 사람다운 세상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에 비친 여러 풍경 가운데 트랙터 삽날에 묶여있던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농민 헌법 쟁취!’ 농민의 권리와 농업의 가치를 담은 농민 헌법은 국가가 직접 지불 방법으로 농어민의 소득을 보전해 주자는 게 요지다. 농사를 지을수록 빚만 쌓인다는 얘기가 나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농산물 수입 개방이 결정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된 지 30년이 넘었다. 값싼 수입 과일이며 채소가 쏟아져 들어오는 데다 기후마저 받쳐주질 못하니 농사를 지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는 게 농민의 처지다. 사과 가격이 치솟으면 정부는 수입 과일 물량을 늘리는 방법으로 대책을 마련한다. 2024년에는 물량을 늘리는 것을 넘어 관세를 아예 없애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이 땅의 농부들은 그나마 수확을 해도 가격 경쟁에서 버텨낼 도리가 없다. 당장 가격이 안정되면 소비자는 부담이 덜 가서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수입 농산물이 낮춰 놓은 가격이 생산자인 농민에겐 직격탄이 되고 작물 재배지가 줄어드는 결과로 돌아온다. 재배지 감소는 다음 해 생산량 감소로 이어지고 결국 가격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기후라는 변수는 더욱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다. 이게 과연 지속가능한 일일까? 당장은 수입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만약 우리가 농산물을 수입하는 그 나라에 기후든 정치적 불안정이든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기후위기는 전 지구적인 문제다. 몇 년째 이어지는 브라질 가뭄으로 커피와 오렌지주스 가격이 올랐고, 전 세계 카카오의 70~80%를 생산하는 서아프리카에서 가뭄과 폭우로 생산량이 감소하자 초콜릿 가격도 잇따라 올랐다.
과일이나 기호식품이야 없어도 생존에 크게 지장은 없으나 곡물의 경우 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현재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이 19.9%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식량 주권이라는 게 실감 난다. 고추 대란으로 고추 경작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 그 뒤를 배추가 따르고 있다. 수입 없이 온전한 자급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어찌 됐든 이 땅에서 우리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이 안심하고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는 제도는 적어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농민 수를 늘리지는 못하더라도 농사를 포기하는 농민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농가는 99만 9,000가구로 백만 밑으로 떨어졌다. 관련 조사를 시작한 1949년 이래 처음 벌어진 일이다. 농가 인구는 208만 9,000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4% 남짓한 숫자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민의 삶이 얼마나 더 피폐해질지 예측 불가능한 이 시대에 농민의 목소리에 크게 반향해 줄 언덕이 절실한 이유다. 그러기에 이번 자발적 시민들의 연대가 더 뭉클할 수밖에 없다. 헌법이 유린당한 시대에 전봉준투쟁단이 거리에 내건 “농민 헌법 쟁취!”가 우리의 밥상 주권을 실현하는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뜨거운 연대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농업에 관심 갖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농민의 분노에 수많은 시민이 연대한 것은 당연한 권리행사였던 셈이다.
이런 연대야말로 사람다운 세상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최원형 환경생태작가
큰유리새의 아름다운 새소리를 다음 세대도 들을 수 있는 온전한 생태 환경을 바란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착한 소비는 없다》, 《사계절 기억책》 등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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