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7월 2010-07-01   1539

아주 특별한 만남-박상증 목사


박상증 목사


교회일치운동으로 싱그러운 세상 펼치는
살아있는 신학


이경휴 수필가,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구원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대항하는, 경제 정의를 위한 노력을 통해 이뤄진다/ 구원은 인간의 생활 속에 있는 절망에 대항하는, 희망의 노력을 통해 이뤄진다.
(「박상증과 에큐메니컬 운동」중에서. 강주화 지음)


지루한 녹음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건너뛰는 순간이다. 산딸나무, 이팝나무, 층층나무… 녹색의 키 큰 나무들이 피워냈던 흰 꽃들의 잔치는 끝났다. 눈부시고  오묘한 색상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잔칫상이 미처 파하기도 전에 장마 전선이 일찌감치 남녘에 머무르며 북상을 시도한다. 후덥지근하고 짜증난다. 불쾌지수가 턱도 없이 높아진다.  단지 장마 탓일까.

6·2지방선거 여당 참패, 역풍을 만난 북풍,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46명의 부하를 잃고도 개선장군인 국방부 관계자들, 의심만 증폭시킨 천안함 조사 결과보고서,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주요 엔지오들이 유엔에 대해 전개하는 일상적인 활동을 시대적 마녀사냥으로 몰고 가는 보수언론들의 패악 짓거리들. 덩달아 날뛰는 백주의 테러…. 퇴행하는 민주주의요, 다른 목소리는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로 대한민국은 가고 있다.

‘독립운동’하는 듯한 비장한 심정으로 참여연대 사무실을 들락거린다. 어지럽고 부아가 치민다. 그러나 참여연대에 대한 격려와 지지는 놀랍다. 새삼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절감한다. ‘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는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 라는 글이 떠오른다. 한바탕의 수레바퀴는 지나갔다. ‘절망에 대항하는 희망의 노력’으로 머잖아 민주주의의 봇물은 또 쏟아지리라.

답답한 마음을 감당하기 어렵던 차에 눈에 번쩍 띄는 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박상증과 에큐메니컬 운동」(강주화 지음/ 도서출판 삼인) 5월에 출간된 책이다. 박상증- 따뜻하고 정겨운 목사님이며 참여연대 전 공동대표님(1997-2007)이시다. 작년 팔순을 넘기고 아름다운 여생을 ‘아름다운 재단’에서 보내고 계신다. 이사장이라는 직함으로. 직접 뵙고 나면 마음이 한결 진정되고 힘이 날 것 같았다.




에큐메니컬 운동, 한국 교회와 민주주의 초석이 되다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실 주변은 한옥으로 빼곡했다. 때문에 고즈넉한 한옥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통유리 벽에 기대어 살핀 꽃밭에는 시누대가 바람에 잎을 흔들며 반겼고, 개망초, 박주가리, 담쟁이들이 한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어디선가 흰나비 한 쌍이 날아와 망초꽃과 하나가 되어 분위기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목사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맞았다. 백발이 성성한 머릿결에 천진한 웃음은 근엄한 목사님이라기보다는 휴머니티가 넘치는 소박한 신사의 인상이었다.

“힘들죠?”

첫 마디에 참여연대 사무실을 나오면서부터 긴장했던 마음이 일순 풀어졌다. 차를 권하시며 마음을 더욱 다독여주셨다. MB정권도 왔다 간다, 보채지 말고 좀 기다려라, 지금은 매를 맞는 때다. 매를 맞는 것도 배워라. 모든 건 때가 있으니 참고 기다려라….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열 번 백 번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가슴에 놓인 불덩이는 여전히 활활 타올랐다. 

창 밖에 서있는 여린 시누대 잎이 바람 한줌을 선물했다. 그 바람은 다탁 위에 놓인 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박상증과 에큐메니컬 운동』- 박상증 평전이다. 넥타이를 헐겁게 매고 부드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 책 표지 전면이다. 표지만 보아도 목사님의 유연하고 온화한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에큐메니컬 운동Ecumenical Movement. 한마디로 정리하면 교회일치운동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속에 세계를 하나로 보고 일치를 추구하며, 기독교의 각 교파들이 다양성을 서로 인정하고 교류와 협력을 주장하는 운동이다. 그 운동의 선두에 섰던 박상증 목사님을 교계 안팎에선 에큐메니컬 운동의 1세대로 추앙하는데 이의가 없다.

목사님은 함경남도 원산을 고향으로 한 가난한 선교사(박현명)의 장남으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시절, 그 집안은 가정예배로 하루를 시작했다. ‘너는 이 집의 첫 열매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목사가 되어야 한다.’ 주변의 숱한 기대와 바람 속에 소년기를 보내며 진로를 고민했다.

역사 공부에 뜻을 두고 서울대 예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극심한 좌우대립의 혼란 속에  갈등하다가 1949년 미국으로 신학공부를 떠났다. 그 와중에 부친은 납북되셨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59년 귀국 후, 부친이 생전에 강의했던 서울신학교 전임강사로 교단에 섰다.

400쪽 분량의 책 내용 중 삶의 큰 궤적만 대충 옮겨 본다.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간사,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부총무, 민주동지회사무국장…. 1990년 아내(이선애 목사. 99년 작고)와 함께 영구 귀국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원장,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이사장, 한국지도자육성장학재단 이사장…. 그 중에서도 빛나는 업적은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지원이었고, 그 노력은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불씨를 지폈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유럽 교포 사회가 경직되자 ‘한국민주화운동기독교동지회’를 결성하고, WCC 인혁당사건 조사단으로 입국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광주항쟁 비디오를 제작하여 미 국방성을 항의 방문했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교회가 만나는 일에 앞장을 섰다.

그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한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오늘날 시민운동의 한 원류를 열었다.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등은 그의 재단裁斷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게다. 



가치 있는 일, 흔들리지 않는 원칙으로 재단裁斷하는 분

책 제목이 어떠한지, 마음에 흡족한지 여쭸다.

“나를 주의 명령에 복종하는 아벨의 후예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주의자. 살아있는 신학…. 수식어가 많지만 평생 나는 마이너리티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제목을 놓고 고심했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뜻으로 동의했죠. 만족합니다.”

유쾌한 웃음을 날리며 손을 들었다. 순간 약지에 반짝이는 실반지에 눈길이 오래 머물자,

“이게 결혼반지에요.”

혼자되신 지 10년이 넘건만 결혼반지가 손가락에서 떠나지 않았고, 댁의 문패에는 아직도 사모님의 이름을 그대로 달고 있다고 한다. 휴머니스트, 페미니스트가 어디 따로 있으랴. 참여연대 조직 내에서도 여성의 능력과 지위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공동대표, 사무처장 자리에 여성이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신 남녀평등주의자이시다.

인터뷰가 아닌 종교, 철학, 역사를 아우르는 인문학 강의를 듣는 분위기였다. 개인적인 삶과 사상, 신학뿐만 아니라 파란만장한 한국현대사와 한국 교회 분열사, 에큐메니컬 운동과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 등 걸림과 막힘이 없는 지식의 파노라마였다. 질문이 필요 없는 인터뷰였다. 귀국하여 하신 일 중 인상에 남는 일이 궁금했다.

“지도자육성장학재단 일이죠.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장학재단이었는데, 재단의 태생과 관계없이 가치 있는 업무였기 때문에 일을 맡았습니다.”

주변에선 재단의 성격 상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업무 보고를 받자마자 이사회 승인 없이 외부인에게 빠져나간 돈 30억을 거둬들이고, 장학금 수혜자를 찾아 재정을 늘이고, 실무자들과 재단 이사들 모두를 해외의 선진 장학 프로그램을 시찰하고 연수하게 시켰다. 그것을 바탕으로 장학재단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여 재단의 인지도를 높였다.

“나는 비서를 두지 않는 대신 기계실 직원들과 내 운전기사를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고 이사회에 요청을 했습니다. 고졸이었던 기사는 내 권유로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했고. 정규직 직원이 되었지요. 그런 일들이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합니다.”

재임의 권유도 마다하고 박수칠 때 떠나온 멋쟁이 노신사였다. 장학사업이나 기부운동은 배분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재단 관계자들이 의욕을 가지고 일을 추진해야지 그 자리를 즐겨서는 안 된다는 일침도 날카로웠다.

어렵게 쟁취한 민주화운동이 그 관련 사업들을 펼치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과연 정부 지원금 삭감이 부당한지, 배분사업이 다양해질수록 그 과정의 관료화를 경계해야 하며, 기부재단의 정신은 항상 빈 손 바닥이어야 한다. 참여연대 대표 재직 시에도 실무자들의 각성을 위해 수시로 내리친 죽비소리였다.
 

하나 되는 공동체 정신, 교회일치 운동

에큐메니컬 운동의 한 흐름으로 지평을 연 시민사회단체의 이야기로 장을 넘겼다. 자연스럽게 참여연대 시절로 돌아갔다.

“공동대표로서 도움을 준 것보다는 실무자들이 하는 일에 반대 의견을 더 많이 낸 것 같아서 좀 미안해요. 그런데 비판만으로 반대만으론 안 됩니다. 비판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고민하는 것이 시민운동의 기본자세입니다.”

책임 있는 운동 자체라면 운동의 실질적 효과와 그 영향을 받을 모든 이들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며, 화해와 협력의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또한 참여연대 공동대표 자리를 수락하기까지 스스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참여연대가 말하는 시민은 과연 누구인가, 특정한 이념을 공유하는 특정한 일부 시민을 말하는가, 도덕적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건 아닌지, 엘리트주의에 빠진 단체는 아닌지…….”

하지만 실무자들을 직접 만나보고는 그들의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에 마음이 움직였다.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을 하나 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이 아닌가. 시민운동 역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운동이다.’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자, 실무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대신 앞으로 10년 만 일하겠다. 어떤 일이든 기한 없이 오래하면 관성에 젖는 법이지. 항상 시작할 때와 끝날 때를 정해놓고 일을 시작하는 거야.”
공동대표 10년 동안 참여연대는 시민단체의 대표 주자로 우뚝 섰다. 삼성의 편법증여에 관한 문제 제기로 국내 최초 1인 시위, 공천 반대 낙선운동, 안기부 X파일 사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 대해선 개인적인 의견을 충분히 피력하고, 비록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결론에 대해선 철저히 전체의 뜻을 따르고 협조했다.



듬직하고 믿음직한 걸음으로 함께 오래가는 시민운동을

젊음은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다. 목사님은 나이라는 숫자보다는 배려와 애정, 그리고 열정으로 생을 갈무리하는 중이시다. 공동대표의 자리를 떠났지만 관심은 여전하다. 언론에 성명서가 발표되면 그 간사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간혹 간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직접 요리도 해주신다. 텃밭에서 가꾼 야채를 곁들인 스테이크 솜씨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간사들의 입을 못 다물게 한다.

그들은 사회의 모순과 사회 구성원들의 미래를 위해 오늘을 헌신하지만 근무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이직률이 높은 이유도 그 중 하나이리라.

젊은 시절 성가대에 섰던 경험도 있는지라 음악에 대한 열정은 백발의 청년이다. 좋아하는 공연이 있으면 혼자서도 연주회를 가고, 검은 양복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모습은 청중들로 하여금 절로 기립박수를 끌어낸다.

인터뷰 예정 시간을 훨씬 지났지만 자리를 정리하기가 아쉬웠다. 마무리 질문으로, 대표 자리를 떠난 입장에서 참여연대에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시민운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듬직하고 믿음직하게 버티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참여연대 사무처는 간사들의 이직률이 높은 걸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들이 재미있게 시민운동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재원 마련을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참여연대가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통과하는 통로가 되어선 안 되죠. 조직은 운동의 지속성, 영속성을 위해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가, 활동가들이 책임의식을 느끼며 활동하도록 다양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인터뷰가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느긋하게 기다려라, 지금은 버틸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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